# 쎈놈 #
“3만 명을 쫄쫄 굶겨 보내실 땐 언제고.”
대장군이 갈 터이니 부족함 없이 잘 챙겨주라니. 참으로 뻔뻔도 하셔라.
번은 머리를 흔들며 피식 웃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다루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뭐가?”
“아무래도 대장군이 대회에 참가하면..”
“내가 질까 봐?”
“아,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발키리 다루는 안다. 에비뉴 철의 군대에서 딘딘 대장군의 명성을. 그게 헛소문이 아니라는 것 또한 피부로 체감했고 말이다. 심지어 태자는 그런 딘딘이나 은사, 스캇등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아 경연을 마친지 몇 년 지나지도 않았지 않나? 번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진면목을 다 알지 못하는 다루로선 덜컥 걱정부터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번 또한 제국의 최강자라는 변경백이 대회에 참가한다는 소문은 들었다. 아마 딘딘이 오는 이유도 그것이리라.
‘용담호혈龙潭虎穴이라.’
당사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든, 구경하는 입장에선 이보다 신나는 일이 또 있을까?
묘한 웃음을 짓던 번이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해. 걱정마.”
그의 말에 다루는 배시시 웃으며 끄덕였다. 걱정해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아니까 말이다.
마차는 세븐 스타로 들어섰다.
그렇지않아도 포화상태나 마찬가지였던 도시는 이제 콩나물시루처럼 어딜 가든 사람 머리가 빼곡하게 보였다. 거리는 더러웠고, 심심찮게 고성이 오갔으며 치안도 나빴다. 하지만 그럴수록 도시엔 돈이 모였다. 대회에 참가하러 온 사람이든, 구경 온 여행자든 그들은 먹고 자고 마셔야 했으니, 그 비용은 고스란히 도시에 축적되었다.
“잠깐, 저건 뭐지?”
인파 때문에 느릿하게 사람들을 헤치며 이동하던 마차가 평소라면 놓쳤을 광경을 번에게 선물했다.
최근 세븐 스타에 머물며 작전을 전담하던 다루가 금세 알아보곤 말했다.
“도박장이에요.”
“도박?”
번의 안색이 살짝 변하자, 다루가 움찔했다.
“용병들이 흘러들면서 생긴 곳인데, 저들이 저거라도 하지 않으면 사고나 치고 다니니 영주성에서도 눈감아주고 있는 분위기에요.”
“흐음.. 그래?"
"다행히 큰 사고도 없으니 그리 염려..."
"저리로 가지.”
다루가 말을 끝내기도 전, 번의 목소리가 마부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부는 급히 고삐를 틀어 길을 옮겼다.
공식적으로 세븐 스타는 영주 권한이었지만, 심심찮게 이런 말이 나돈다.
영주 위에 부마.
콩가에선 이제 번이 가지 못할 곳이 없었고, 특히 5개 신도시에서 번의 이름은 여왕의 그것과 동급으로 놓고 생각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물론 이게 싫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도시들의 발전에 번이 깊이 이바지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포커인가?’
도박장이라곤 하지만, 허름한 뒷골목 의자와 테이블 몇개 갖다놓고 삼삼오오 모여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처음엔 그저 갈 곳 없는 용병들이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대낮부터 술이나 마실 요량으로 모여들었는데, 그러다 보니 둘이 넷이 되고, 넷이 여덟이 되며 이제는 골목 하나가 통째로 바글거렸다.
‘이건 마작과 비슷한 방식이군.’
마차 안에서 스윽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대충 돌아가는 꼴을 알겠다.
“흐음.”
번의 반응에 다루가 바짝 마른 입술로 묻는다.
“명령만 하시면 당장 해산시킬게요. 영주성에 요청하면 병사를 보내줄 거에요.”
번의 심기가 좋지 않다고 여긴 다루가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모른다. 번의 눈동자가 지금 어떤 과거를 떠올리고 있는지를 말이다.
‘라스베이거스.’
아무것도 없던 사막에 일으킨 기적.
‘마카오.’
아시아 최대 규모의 검은돈이 흐르는 곳.
‘정선.’
수많은 좀비를 양산하며 어지간한 부자는 명함도 못 내민다는 그곳들의 공통점은 바로 판만 깔리면 사람은 알아서 모여든다는 것이었다.
뭘 생각했을까?
“영주성으로 바로 가지.”
본래는 한창 공사 중인 대회장을 둘러볼 계획이었지만, 번은 노선을 바꿨다. 기발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는 동안 번은 머릿속으로 정리를 끝냈다. 심각하게 생각하는 그를 보며 다루는 가슴을 졸였지만, 마차는 무사히 영주성에 도착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원래 세븐 스타의 영주는 40대 중반의 건장한 사내였다. 하지만 신도시 조성 초반에 번과 자잘한 마찰을 일으키던 그가 어느 날 칩거를 해버리자, 그의 장남이 대리로 일을 맡게 되었는데, 이 자는 꽤나 번과 죽이 잘 맞았다.
“도박장..말입니까?”
식사는 하셨냐는 질문에 다짜고짜 본론을 꺼내는 번. 호록, 옆자리 의자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던 다루는 사례가 들렸다.
“정확히 말하면 유흥단지라 할 수 있소.”
“어떤 유흥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술, 여자, 도박. 거기에 음악과 춤이 함께한 쇼까지 함께라면 금상첨화겠지.”
에비뉴 사람들은 다 이런지, 아니면 이 남자가 특이한 건진 모르겠지만, 도박과 성매매가 공식적으로 금지된 세븐 스타에서 대놓고 영주에게 할 말은 확실히 아니었다.
“어차피 하지 말래도 음지에 숨어 할 것 아니오? 이왕 그럴 거면 그런 이들을 한대 모아 우리가 관리하는 편이 낫지 않겠소? 지금도 자잘한 문제가 계속 생긴다고 들었소만?”
잃는 사람이 있으면 따는 이도 있을 것이다. 공돈은 언제나 쉽게 쓰는 법. 게다가 술과 여자는 더더욱 떼려야 뗄 수 없을 테고. 문제가 문제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긴 합니다만..”
“몇 가지 법령을 준비해서 바로 시작할 수도 있는 사업이라오.”
“사업..이요?”
“그렇소. 이게 사업 아니면 뭐겠소?”
개인의 도박장 개설은 불허한다. 초장에 몇 놈 보란 듯이 잡아 족치고, 포상금 제도까지 같이하면 무서워서 엄두를 내지 않을 거다. 영주성에서 허가받은 도박장에만 고용된 딜러들을 두고 술과 음식을 팔며 숙식까지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호텔이라 부르면 되겠소.”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오. 그대를 돈방석에 앉혀줄 역사적인 사업이라고만 생각하면 되는 거지.”
물론 비까번쩍한 50층짜리 건물을 올리진 못하겠지만, 아직은 그런 화려한 외형에 신경 쓸 단계는 아니었다.
“일단 시범 삼아 한 구역만 지정해서 돌려보면 어떻겠소? 이번 대회 기간 전에 이게 되겠다 싶으면 다른 도시들에도 전파하고.”
사람은 하던 걸 못하게 막으면, 뒷구멍을 찾기 마련. 무릇 통제란 숨 쉴 구멍을 만들어주며 살살 달래가면서 해야지 뒤탈이 없다.
“으음. 가뜩이나 치안 때문에 말이 많은데..”
“그러니까 몰아두자고 하는 것 아니오? 양이 산 이곳저곳에 흩어져 풀을 뜯고 있으면 당연히 관리가 어려운 것이지. 한곳으로 모아야 하지 않겠소? 그런 명분이면 병사들이 도시를 다니며 자유롭게 검문해도 말이 안 나올 것이고.”
“그들은 양이 아니라 늑대입니다. 자칫 서로 물어뜯으면 어찌할지.”
“죄없는 양을 물어 뜯는 것 보단 낫지 않겠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님과 상의도 해봐야 할 것 같고요.”
대대로 영지의 도박이나 음지의 일들을 허락하지 않아 온 영주였다. 알면서도 눈감아주긴 했지만, 그게 공식적으로 합법화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귀족들에겐 품위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서민들의 향락행위였으니까 말이다.
“내가 언제 틀린 말 한 적이 있었소?”
“그건 그렇지만..”
“한번 믿어 보시오. 분명 그대도 만족할 결과가 나올 테니까.”
아무리 법으로 막아도 안 되는 것들이 인간사회에선 존재한다. 술과 담배 같은 것들은 애초에 팔질 않으면 어느 정돈 잡히지만, 도박이나 이성에 관한 것들은 국가라는 개념이 없을 때부터 사람 모이는 곳엔 언제나 있어왔다.
“뭐든 빛 아래에서 관리가 쉬운 거라오. 세금도 걷을 수 있고. 괜한 놈들 배 불려 줄 필요가 있소?”
“여쭤.. 보겠습니다.”
“그리 오래 못 기다리오.”
.
.
영주성의 답은 생각보다 빠른, 그날 저녁 왔다.
“자기 손엔 더러운 걸 묻히기 싫다는 거군?”
서찰을 바라보며 피식 웃는 번을 보며 영문을 모르는 미루가 갸웃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계속해.”
“예.”
흑마법사와 마녀가 우글대는 비밀스러운 지하에서 번은 미루에게 이것저것 그간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자리를 비운 융 대신 그녀가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약 유통상들의 세력 다툼이 치열하다고 해요. 목숨을 잃는 사람까지 생겨났다는데, 이미 제국에 뿌리박은 그들을 쉽게 밀어내긴 힘들 것 같아요. 지역 유지와 그 친인척들이 전부 관계되어 있는 통에..”
“막대한 돈이 걸렸으니 밥그릇 뺏기긴 싫은 거겠지.”
“계속 추진할까요?”
“아니야. 괜히 피를 볼 필욘 없지. 우리 구역도 아니라 바로 대처하기도 어렵고. 차라리 묵혔다가 다른 곳에 풀지.”
“어디로요?”
“그건 조만간 알게 될 거야.”
번이 뭔가를 떠올리며 미소 짓자, 미루는 끄덕였다.
“끝났나?”
“몇 가지 사안은 정리되면 한 번에 보고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나가지.”
“지금요?”
“그래, 지금.”
모두 잠자리에 들 시간에 대체 어디를 간다는 건지 의아했지만, 미루는 번의 뒤를 따랐다. 마차도 없이 두 필의 말에 올라 도시를 가로질렀다.
‘기분 좋아.’
밤이슬 맞으며 둘만 함께 하는 데이트라 그런지 미루는 어디 경치 좋은 곳에라도 가시려는 걸까? 헛물을 켰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아까 낮에 번이 지나쳤던 바로 그 골목이었다.
“어때?”
“..바글바글하네요.”
술에 취한 사내들.
그런 사내들의 등에 매달려 가슴을 내놓고 콧소리를 내는 여자들.
“아자! 이 판은 내가 먹었다!”
“쳇, 다시 패나 돌리라고.”
타지에서 흘러든 용병뿐 아니라 기존에 도시에 있던 사람들까지 자연스럽게 모여드니, 이건 마치 한여름 더위를 피해 한강 변에 나와 있는 인파 같았다.
“여기.. 심각한데요? 애들도 있어요.”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는 미루를 보며 번은 웃었다.
“그래, 심각하지.”
무법지대란 바로 이런 곳을 두고 생겨난 말일 거다. 내일이 없는 술 취한 사내들과 그런 사내들에게 웃음을 팔아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여인들. 그리고 그런 어른들을 호기심 어린 얼굴로 바라보는 청소년들이 한대 어우러져 거대한 오물통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저들은 그리 생각하진 않겠지만, 여기 미루처럼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그렇게 보인다는 거다.
“저들을 수용할만한 공간이 있을까?”
“세븐 스타에요?”
“그래.”
미루는 번의 말에 꼼꼼히 둘러보았다. 저 끝까지 보이는 골목이 사방으로 얼마나 구석구석 연결되고 사람들이 들어차 있는진 알 순 없지만, 얼추 수천 명은 되어 보였다.
“성벽 안쪽은 힘들고요, 강 주변이라면 어떻게 될 것 같긴 해요.”
“난민과 부랑자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그 강 말인가?”
“맞아요.”
세븐 스타 동남쪽, 남문으로 나가 20분쯤 걸으면 도시의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 있었다. 이 세계는 아직 환경보호 같은 개념 자체가 없어서 쓰레기를 강에 죄다 내다 버렸는데, 쓸만한 것들을 주워 팔거나 상하지 않은 것은 먹으며 생활하는 극빈층이 거주하는 곳이기도 했다. 최근엔 타지에서 모여든 난민도 대거 그곳으로 흘러들었고.
“가지.”
“에엑? 어디요? 지금요?”
훤한 대낮에도 가길 꺼리는 장소다 보니 미루가 기겁했는데,번에겐 아주 딱 들어맞는 장소였다. 일거리 없어 쓰레기를 뒤지는 노동력 충만한 곳이자, 강이 바로 옆에 있으니 물을 대기도 쉬운.. 아무래도 유흥은 오물을 동반하게 마련아닌가?
“어서.”
번이 손목을 잡아끌자, 미루가 어어어? 하다가 외쳤다.
“자, 잠깐만요! 성에 지원요청을..!”
“지원은 무슨.”
빛을 얻은 이 남자.
세상 어느 곳의 어둠이든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