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52화 (152/177)

# 바퀴 #

“당분간 제가 모실거예요.”

융은 두려움과 감탄이 공존하는 눈빛으로 해골에게 말했다.

오른쪽 광대뼈가 드러난 얼굴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구더기가 기어갈 것 같은 환상이 보일 정도로 역겨웠지만, 다행스럽게도 융은 마녀.

‘리치를 보게 될 줄이야.’

그것도 영생에 아주 관심이 많은 나이 지긋한 할머니였으니, 어찌 신비롭지 않을까.

예로부터 부두교나 흑마술을 연구하던 사람이라면, 셋 중 하나는 그 인생 끝에 리치 분야에 손을 대게 되지만, 그 많은 이들 중 성공했다는 사례가 들려오지 않은 것은 그만큼 어렵고 힘든 작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버젓이 여기 성공한 사람이 서 있는 거다. 그것도 전직 마도왕국의 왕이 말이다.

“나는.. 무얼.. 해야.. 하는 가..”

융이 번에게 들은 명령은 단 하나였다.

「그를 진정한 왕으로 만들 것.」

에비뉴의 저 황제나 콩가의 카시오페이아처럼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대륙에 퍼져있는 온갖 불결하고 더럽고 포악한 것들의 왕이 되란 소리지.

“우선은..”

해골을 보며 침을 꼴깍 넘긴 그녀는 결심했는지 당차게 말했다.

“사람들 많은 곳에선 최대한 말을 하지 마세요.”

“..왜...인...가?”

“그게 좋으니까요.”

아주 가끔 무게 잡으면서 저렇게 느릿하게 말하면 모를까, 평소에 저러면 덜떨어진 놈으로 보일 것 같았다.

“너는.. 내 하인.. 인가?”

“동료라고 해두죠.”

이마를 찌푸린 융이 품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냈다.

“잘 기억하셔야 해요.”

융은 주머니를 풀며 말했다.

그녀가 봉인해둔 것이 풀리자, 탁! 하고 주머니에서 어둠이 풍겨 나왔다.

“이건 허리케인 아이라는 물건이에요. 발동시키면 이 파장을 느낀 언데드나 몬스터, 혹은 맹수들이 몰려들 거에요.”

“그건.. 내게도.. 익숙한..”

해골 역시 비슷한 마법을 만든 적이 있었다. 뼈다귀에 살점을 붙이려고 생물을 모을 때 본능적으로 했던.

“다행이네요. 가요.”

융은 모닥불을 서둘러 끄며 말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떠날 채비를 마친 융은 해골에게 주머니를 쥐여주며 유쾌하게 외쳤다.

“폴라리스!”

“······?”

그게 어디냐는 듯 묻는 해골의 눈빛에 융은 묘하게 웃었다. 그러며 외친다.

“배신자에겐 죽음을!”

경쾌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말하며 걷는 융을 보며 해골은 갸웃했지만, 얌전히 따랐다. 아주 오랜만에 나온 세상. 나쁘진 않은 기분이었기에.

.

.

.

“어때?”

대청.

네 사람이 모여 있었다.

대 에비뉴의 절대자가 앉은 황좌를 사이에 두고 심각한 표정들의 사내들은 말이 없었다.

“어떠냐니까?”

황제의 물음에 입술을 꾸욱 다물고 있던 딘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 물으셔도 저는 싫습니다.”

“허어, 싫어? 그게 황제한테 할 말이야?”

“······.”

황제고 뭐고 딘딘은 상대하기 싫다는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모습에 기막힌 표정으로 황제가 입을 떡 벌리더니 지원을 요청한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스캇을 바라보며 말하는 황제.

“뭐가 문제야? 용돈도 벌고 그 제국의 변경백인지 뭐시기도 한번 밟아주고 오라는데.”

스캇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용돈이라고 하기엔 1만 골드면 좀 많긴 하죠.”

“그럼 더 좋지! 우리 애들 술 한번 거하게 사주고!”

“대장이 대륙 최강이라는 칭호를 얻으면 애들 사기도 오를 거고요.”

“그렇지!”

스캇이 거들자, 힘을 얻은 황제는 딘딘을 째려보며 다시 자극했다.

“설마 질까 봐 그래? 그런 거야?”

“······.”

이게 무슨 골목대장 뽑는 애들 놀이도 아니고.. 딘딘은 울컥했지만, 더 상대해봐야 말릴 것을 알기에 대응하지 않았다. 당장 여길 박차고 나가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쩝..”

황제는 딘딘이 호락호락하지 않자, 다른 쪽을 노리기로 했다.

“넌 어때?”

은사였다.

“제 얼굴이 노출되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향후 임무 수행하기에도 곤란해질 것 같고요.”

“변장하면 되잖아.”

이건 억지다.

“그러면 명예가 없지 않습니까?”

“아, 그건 그렇군.”

실책을 깨달은 황제는 입맛을 다시며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스캇은 빼도 딘딘이나 은사, 둘 중 하나만 나가도 우승은 떼놓은 당상일 것 같은데, 이것들이 협조를 안 한다. 사실 그에게 1만 골드 따위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마는 그 제국의 변경백이란 놈이 콩가에서 열리는 무투 대회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짜증이 치솟기 시작했다.

에비뉴에서 아무리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놈이 이긴다면 대륙 전체가 그 변경백 놈을 최강의 사내라고 떠들 것 아니겠는가? 그건 향후 제국과 전쟁을 계획하고 있는 에비뉴에게 아주 좋지 않은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

“역시 너 밖에 없어.”

황제가 다시 딘딘을 보자, 여전히 묵비권을 행사하는 딘딘.

“아, 정말!”

황제는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리며 벌떡 일어났다.

“그럼 내가 나간다?”

황제의 말에 스캇이 웃어 재꼈다.

은사가 황제의 옆으로 다가왔다.

“고정하시지요.”

전장에서의 황제는 충분히 인정하는 그들이었지만, 한 나라의 왕이 그런 대회에 나가서 웃음거리가 되고 조롱당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때였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있게 나누고 계십니까?”

부채를 살랑거리며 대청을 걸어오는 집정관.

“재미는 개뿔!”

황제가 버럭 외쳤다.

‘왜 또 그래? 이 양반?’ 이라는 뜻의 눈빛으로 스캇을 보며 갸웃하는 집정관에게 황제가 말했다.

“자식놈이 애비를 위해 그럴듯하게 판까지 깔아줬는데! 이 기회를 날려? 도대체가 충신이 없어요! 충신이!”

“······.”

“······.”

“······.”

어이가 없는지 황제의 말에 단체로 입을 다물었다가 집정관이 말했다.

“콩가의 그 무투 대회 말입니까?”

“그래!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뭐 그리 어려워서! 엉덩이가 어찌나 무거우신지! 들!”

딘딘과 은사를 보며 삐친 기색을 팍팍 풍기는 황제의 모습에 집정관은 가볍게 웃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태자가 폐하를 위해 판을 벌인 건 아니라 할지라도 제국의 최강자라는 그 변경백이 참가 의사를 밝힌 순간, 우리도 무시할 수만은 없게 되긴 했죠.”

“그렇지!”

황제가 옳다구나 장단을 맞추자, 집정관은 딘딘을 보며 말을 이었다.

“승률은 어때?”

말을 아끼던 딘딘이었지만, 집정관에겐 빗장을 열었다.

“소문이 모두 사실이라면 반반이겠지. 그는 소드 마스터라 불리니까.”

검의 정점에 선 자만 얻을 수 있는 명예로운 이름. 그게 제국의 변경백이다.

“반반이라..”

집정관이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에비뉴가 아무리 최근 위세를 높이고 있다곤 해도 제국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다. 이걸 바꿔 말하면 승률 반반 도박에 걸린 게 생각보다 유리하단 것이다. 이쪽은 지더라도 본래 제국보다 명성이 높지 않았으니 사람들도 그러려니 하겠지만, 만약 이긴다면?

“나쁘진 않은데?”

대륙이 진동할 것이다. 게다가 기사들 간의 실력 겨루기는 잘 일어나지 않는 이벤트다. 명예가 생명인 그들에게 패배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고, 그만큼 목숨을 걸 중대한 사안이 아니면 칼을 뽑지 않았다. 그런데 이 대회는 아주 합법적이면서도 공신력 있을테니, 이길 수만 있다면 돈으로 살 수 없는 엄청난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너까지 왜 그래? 우린 절반의 확률로 움직이진 않아.”

그렇다. 철의 군대는 항상 이길 싸움만 해왔다. 최근 변수가 발생하는 일이 잦아 위험한 상황에 폐하를 노출시킨 뒤론 더욱 그랬다. 물론 이런 충신들의 사려 깊은 마음을 이 남자가 알아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시원하게 밟아주고 와. 만약 지더라도 널 욕할 사람은 없어. 내가 머릿속에서 날아갈 수 있을 때까지 술 살게.”

“······.”

집정관까지 가세하자, 딘딘은 벼랑 끝에 몰렸다. 신하 된 도리로 주군이 원하는 일은 뭐든 해야 함이 마땅하나 이건 좀..

광대가 되라 하시는 것 아닌가?

무인인 이상 강자와 겨루는 것을 꿈꾸지 않는 이 없겠지만, 딘딘은 전쟁과 함께 살아왔던 남자였다. 적의 피를 마시며 성장했고, 적의 목숨을 빼앗으며 그 한으로 커왔다. 그런 그에게 이런 비무는 생각만 해도 낯간지러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그때, 은사가 동아줄을 내려주었다.

“그 변경백을 암살할까요?”

은사의 말에 황제의 눈빛이 변했다. 목소리 또한 장난기가 싹 가셨다.

“가능하겠나?”

말투 역시 군주의 그것이다.

은사는 눈동자를 흔들며 생각을 정리하더니 끄덕였다.

“이 역시 반반은 될 것 같습니다. 혼란스럽고 들뜬 대회 중이라면 틈은 반드시 생길 것이니까요.”

황제가 집정관을 본다.

“어때?”

은사의 의견이 타당하냐는 물음이다.

집정관도 장난기 빠진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하더니, 입술을 혀로 적셨다.

“성공만 한다면야 우리로선 나쁠 게 없습니다. 거사 전에 걸림돌 하나를 치우는 셈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이래서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이곳저곳 쏘다니지 않는 것이 좋다. 적들에게 기회를 주는 셈이니까. 물론 그건 딘딘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상대적으로 콩가는 에비뉴의 동맹국 아니던가? 여차하면 그곳에 있는 태자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을 것이니.

“일거양득.”

황제가 손뼉을 쳤다.

“둘 중 하나만 성공해도 꽤 괜찮은 그림이 나오지 않겠나?”

딘딘이 무투 대회에 참석하는 여장을 꾸리면 은사는 쥐도 새도 모르게 대회장에 침투한다. 경기를 치르다 보면 분명 기운을 다 써 약해지거나 상처를 입는 순간도 있을 테니 은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나오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끄덕이는 딘딘이다. 황제는 딘딘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녀석 보면 전해.”

태자를 말하는 것이리라.

“조만간 내가 한번 보잔다고.”

“알겠습니다.”

갑자기 늙은 것 같은 딘딘을 보며 황제는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개운한 표정의 황제를 보며 스캇이 묻는다.

“헌데 그건 결정하셨습니까?”

갑자기 무투 대회 때문에 정작 처리해야 할 일을 잊고 있었다.

“뭘?”

너무 당당하게 되묻는 황제를 보며 스캇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2차 경연 말입니다.”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어느새 아이들은 어른이 된다. 번이 지난 경연에서 후계자로 낙점되었다지만, 그새 황국의 수많은 황자들은 더욱 자라났고, 나 이제 다 컸다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잠자리에선 황비들이, 대청에선 대신들이 심심찮게 말을 꺼내기에 그러면 경연을 한 번 더 하라고 툭 던진 황제.

“대충 해. 어차피 그놈이 그놈인 것을.”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럼 약식으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던지.”

알아서 하라는 듯 손짓하는 황제.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 경연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를 말이다.

.

.

.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큰 행사 하나 준비하려면 몇 달은 필요하다. 그런데 이곳은 나라 하나를 이동하려면 족히 두어 달은 훌쩍 가는 열악한 환경이었고, 여행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한 시대라 아주 큰 마음을 먹어야 대회장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만큼 이런 국제적인 규모의 이벤트가 드물었기에 열기는 뜨거웠는데, 콩가는 지금 밀려드는 구경꾼과 대회 참여 희망자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말할 수 있었다.

예선은 약 1달간 5개 신도시에서 동시에 열린다. 아직 방식이나 구체적인 일정이 나오진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이를 두고 머리를 굴려댔는데, 혹 대륙의 이름난 강자와 괜히 같은 예선에 편성됐다가 재수 없게 조기 탈락할 우려 때문에 분위기를 살피며 도시를 이동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그렇게 세븐 스타를 떠나는 사람들을 창문 밖으로 바라보며 마차에 앉아 있던 번.

“······.”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양피지를 확인하고 있다.

“이게 사실이야?”

오늘 아침 에비뉴에서 도착한 소식이다.

“벌써 짐 쌌대요.”

마차에 함께 타고 있던 다루가 심각히 말했다. 그녀 역시 황당한 건 마찬가지다.

딘딘이 온단다.

에비뉴에서 가장 강할 것이라 평가받는 그 남자가 여기 콩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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