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51화 (151/177)

# 톱니 #

-쓸모도 없어 보이는데, 그냥 처리하지?

해골은 대부분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다. 마법적 지식이나 연구 자료 같은 것을 쌓아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살았으며, 동물 따위가 보이면 잡아서 키메라를 만드는 것이 전부였던 녀석.

"그그그극.."

그러나 녀석도 공포는 느끼나보다. 본능에 충실한 만큼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쉽겐 아니지.”

-또 뭘 하려고?

번은 해골을 노려보며 머리를 굴렸다. 무의미한 것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게 그의 장기 아니던가.

‘해골이라..’

번은 녀석을 그냥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마도왕국의 과거 따윈 이 녀석에게 아무런 장점이 되지 않았고, 숨겨둔 보물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딴 건 쥐뿔도 없는 몸뚱이 하나뿐인 뼈다귀였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흐음..?”

뭘 떠올린 걸까?

‘마도왕국..?’

그러고 보니 이거 써먹을 곳이 있겠는데?

번의 눈이 반짝 빛났다.

.

.

.

번이 돌아왔다.

카시오페이아는 그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번에게 안겨 펑펑 울었다. 그간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보고 있는데 이러나 싶다. 그 마음이 예뻐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번.

‘이런 여자라면 나쁘진 않군.’

-이제 슬슬 해볼 마음이 생기냐?

움찔.

좋던 기분이 한순간에 나빠졌다.

‘너 때문이라고! 너!’

-내가 뭘?

“어휴.”

말을 말자. 악마놈을 떼어내지 않는 한 마음 편하게 사랑을 나누긴 힘들 것 같다.

“왜요?”

번의 한숨에 카시오페이아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들어갑시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대청을 향했다. 국정을 보다가 번이 왔다는 소식에 헐레벌떡 나온 카시오페이아. 당연히 아직 대청엔 대신들이 잔뜩 자릴 지키고 있었다.

“대공.”

“오셨습니까. 대공.”

“멀리 떠나셨다고 들었는데, 무사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한 마디씩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속에서 유독 뜨거운 눈을 활활 불태우며 번을 바라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또 변했다?’

늙은 마법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번의 변화를 바로 감지한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번의 상태를 측정해보려고 하다가 이내 포기해버렸다.

가늠할 수 없는 사내.

그게 마법사가 번이란 사람을 보는 시각이었다.

“그간 별일 없었소?”

자리에 앉는 카시오페이아의 옆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묻는 번.

“큰일이라고 한다면 두 가지가 있고, 작은 것은 하나예요.”

조곤조곤 말하는 그녀에게 번이 끄덕이며 물었다.

“큰 것은 무엇이오?”

카시오페이아는 잠깐 뜸을 들이다 말했다. 수심 가득한 그녀의 표정과 떨리는 목소리가 일이 얼마나 중한지를 대변해주었다.

“음.. 폴라리스가 우리와의 동맹을 어기고 다른 왕국에 붙었어요.”

“허어..?”

이것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카시오페이아는 마저 다른 한 가지도 알려주었다.

“제국이 우리 콩가를 향해 경고했고요. 계속 평화를 헤치며 주변국을 공포와 불안에 떨게 한다면 무력을 사용해 진압하겠다고요.”

“······.”

번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맛을 다셨다.

“발키리 때문이군.”

“아마도 그럴 공산이 커요. 콩가에 에비뉴의 군대가 진입했으니,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었겠지요.”

“폴라리스도 그래서 다른 편에 손을 든 것일 테고.”

“그래요. 그들은 우리에게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을 거예요. 그들이 말을 갈아탄다고 페널티를 받는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이미지와는 다르게 꽤나 영리하고 발 빠른 녀석들이다. 그러나 과연 갈아탄 그 말이 어디까지 뛸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겠지.

“걱정 마시오. 그들이 없다고 끝난 것은 아니니까.”

번은 카시오페이아를 안심시키며 묻는다.

“작은 거 하나는 뭐였소?”

이번엔 좋은 소식이라 할 수 있었다.

“용병들이 반응했어요.”

예상했다는 듯 미소짓는 번.

“모이고 있소?”

“예, 이미 상당한 숫자가 5개 신도시에 고루 퍼져 들어와 있다고 생각돼요.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적어도 1만은 가볍게 넘어간다고 해요.”

“꽤 시끄럽겠구려.”

“맞아요. 중독자들이 많아서 매일같이 말썽이 생기는 모양이예요. 하지만 다행히 아직은 사람이 죽거나 하진 않았어요.”

“1만이라..”

번은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 낀 채 고민했다. 대신들 모두가 그런 번의 모습을 긴장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한눈에 마법사가 눈치챈 것처럼은 아니었지만, 다른 이들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어디를 다녀왔기에 이렇게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하는가?

전에도 심상치 않았긴 하지만, 지금은 보라. 그가 마치 왕이라도 된 양 행동하는데도 아무도 저지하지 못하지 않고 있나? 은연 중 풍기는 번의 ‘빛’ 속성은 이런 효과도 가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밝은 것을 바라보며 따르는 인간. 빛에서 따스함을 찾고, 안락함과 포근함을 느끼며 오래전부터 태양을 최고의 신으로 숭배한 이유는 다르지 않았다. 그저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유가 되고 상징이 되니 말이다.

“재정은 넉넉하오?”

어떤 생각을 떠올린 것인지 번이 조금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마치 웃음을 참으려고 하는 것 같은 그 표정에 카시오페이아가 갸웃하며 대답했다.

“용병들을 고용할 돈이요?”

“그렇소.”

“장기간은 힘들어도 몇 달은 될 거에요.”

“1만의 용병을 대상으로 말이오?”

“네.”

“두당 얼마로 책정했소?”

“1달에 1골드요. 적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당장 쓸 돈이 궁할 거라는 대신들의 조언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틀린 말은 아니다. 평소 얼마를 받고 일을 했든 그건 상관없다. 시세란 건 동네마다 다른 법이니까.

“그들은 술과 여자, 마약 말곤 아무것에도 흥미가 없다고 해요.”

“그것들을 즐기려면 돈이 필요하겠고.”

“맞아요. 1골드면 참여하는 용병들이 많을 거예요.”

목숨값으론 지나치게 짠 편이었지만, 무려 만 명이다. 아무래도 이들을 고용하려는 왕실에서는 엄청난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막대한 손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으니, 그렇다고 투자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만 골드라..’

-성 한 채 지을 수 있는 돈이네.

인건비나 나라의 생활, 문화 수준에 따라 조금씩 물가는 다르겠지만, 여기 콩가 기준으로 일만 골드면 악마의 말처럼 성을 하나 지을 수 있는 막대한 돈이었다. 그걸 몇 달 용병을 고용하는 비용으로 소비하는 게 과연 옳은 걸까? 대안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이 해야겠지만, 이왕이면..

‘그냥 하면 심심하지.’

생각을 정리한 번은 대신들을 보며 말했다.

“내년 봄까지 우리는 최대한 병력을 모아야 하오. 폴라리스가 우리 곁을 떠난 이상 그와 비슷한 세력과 동맹을 맺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땐 다른 곳에서 충원해야 하는 상태요.”

번의 말에 대신들이 말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대공. 용병을 몇 달 부린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섯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고, 거기에 제국 눈치까지 봐야 하는 상황 아닙니까?”

“차라리 좀 더 기다리는 건 어떻습니까? 이제 1년 하고도 조금만 더 버티면 에비뉴의 황제 폐하와 약속한 그때가 오지 않습니까?”

“오! 맞소! 차라리 에비뉴와 함께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할 거요!”

대신들은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조금만 더 버티다가 그때 연합하자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그러나 그건 번이 싫다. 그리되면 아버지가 모든 전권을 쥐고 흔들게 될 것이다. 또한 콩가는 어떻게 될까? 이리저리 휘둘리다 전쟁이 끝나면 속국으로 전락하거나 어쩌면 에비뉴에 먹힐 수도 있을 거다.

그러면 지금과 무엇이 다른가?

제국의 개나, 에비뉴의 개나 어차피 개 팔자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당하고도 한 치 앞을 못 보는구나.’

번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내, 제안 하나 하겠소.”

“말씀하세요.”

카시오페이아가 경청하겠다는 듯 번을 예쁜 표정으로 바라보자, 번은 끄덕이며 대신들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대들이 염려하는 마음 충분히 아오. 하지만 해볼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 하지 않겠소? 그간 준비한 것도 있고 여기서 꼬리를 말면 우리 꼴만 우습게 될 것이니.”

판을 키워보자.

“전단을 돌리시오. 대륙 전체 구석구석 멀리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소문도 만들고.”

“어떤..?”

“천하제일 무투가를 뽑아 그에게 우리 콩가 왕국의 명예 기사 자릴 주는 거요. 상금은 일만 골드!”

1만 명에게 1골드씩 줘봐야 아무도 호응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리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중요한 건 2위부터 100위까지도 100골드씩 받을 수 있게 상금을 거시오. 또한, 대회 예선은 5개 신도시에서 고루 열 수 있도록 하고, 참가 제한은 없소.”

대신들이 황당한 얼굴로 뭐라고 소리치려는 찰나, 카시오페이아가 선수를 쳤다.

“이 시기에.. 축제를 벌이자는 건가요?”

“바로 그렇소! 축제! 모두가 이 대회를 그리 인식할수록 좋은 거요!”

“사람들이 모이려고 할까요?”

“당연하오! 1만 골드 아니오! 보통 사람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거금이니까!”

“하지만 대부분 알 텐데요? 본인이 1등을 하지 못할 거라는 걸요.”

“그건 그대가 잘 몰라서 하는 소리요. 남자란 동물은 그리 여기지 않거든.”

설명우가 살던 대한민국에서 이런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샤워 후에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으며 나온 남자와 여자가 거울을 봤을 때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말이다.

이때, 여성의 92%는 자기 얼굴을 못났다고 느끼며 쌍커플이 있었으면, 코가 조금만 높았으면, 왜 피부가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온갖 근심 걱정 가득한 얼굴로 단점을 찾는 반면에, 남자들은 99% 한 가지 반응을 보였다.

-캬!

그저 감탄한다. 이 정도면 괜찮은데? 라며 만족해했다는 것이다. 이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남자란 동물을 살게 하는 원천이자, 행동 패턴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상금이 무려 1만 골드.

이런 도박은 그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뛰게 하는 마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어찌 끌리지 않겠는가?

“그리고 돈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요. 1등은 정해져 있으니까.”

미심쩍어하는 대신들이 번을 바라보았지만, 카시오페이아를 보며 어깨를 으쓱하는 번의 표정은 아주 묘하게 음흉했다.

-너 설마? 참가하려는 거냐?

“크크크..”

아주 작은 목소리로 웃는 번을 보며 카시오페이아는 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

.

.

일확천금一攫千金. 혹은 로또라고 해도 좋다. 국가적으로 보면 1만 골드가 그리 크게 와닿는 액수는 아니었지만, 그게 개인이나 작은 단체가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특히, 용병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내들에겐 죽지 않고 큰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소문에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을 찾는다!」

남자, 여자, 애, 노인. 누구든 어떠한 무기를 가지고 참여할 수 있으며 콩가의 명예 기사가 된다고 해도 콩가에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단, 엘프나 드워프 같은 이 종족의 참가는 불허하며, 철저한 개인전으로 토너먼트 방식을 채택한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게 얼마나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냐면 콩가 왕실에서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불과 보름 만에 주변국을 넘어 제국과 에비뉴에서까지 짐을 꾸리는 사내들이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1등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100명 안에만 들면 100골드를 받을 수 있었으니 그 돈이면 몇 년은 흥청망청 살아도 되는 거금이었고, 아껴가며 산다고 치면 평생 용병 일 따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액수였다.

그렇게 번의 예상은 정확하게 착착 맞아들어간다. 내가 100명 안에 들지 못할 걸 알면서도 사내들은 콩가로 모여들었다. 그러며 궁금해한다.

대륙에서 가장 강한 자가 누굴까?

인간계 최강의 무투가가 누구일까?

그렇지않아도 이것에 대한 궁금증은 누구나 갖고 있었고, 그 역사적인 절대자가 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보고자 귀족들까지 마차를 대절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 이렇게 무투 대회로 떠들썩할 때, 콩가의 북쪽.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음침한 산에서 내려오는 한 괴인이 있었다.

딸깍, 딸깍.

로브를 깊숙이 눌러쓴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직 남쪽으로 향하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 부딪히는 소음이 계속해서 났는데,

“······.”

첫 번째 강이 나타났을 때, 그는 본다. 저 앞 강너머 피워진 모닥불을. 그리고 그 모닥불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여자를.

“아..”

그녀는 괴인이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탄성을 질렀다.

“리치..”

진짜였어! 박수라도 짝! 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괴인을 자극하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들었기에 조심해서 접근했다.

“융이에요.”

다소곳하게 인사를 하며 괴인을 바라보는 융.

“끄르르..”

마침 구름이 걷히자, 달빛이 괴인의 얼굴 안쪽을 비추었다.

“흡..”

융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평소 온갖 걸 다 보고 살아온 그녀였지만, 해골 위에 덕지덕지 살점을 발라 놓은 것 같은 그 기괴한 모습에 본능적인 공포가 밀려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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