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대한 것 2 #
이대로 끝인가?
모르겠다. 몇 번의 환생을 거듭해보았던 번이었지만, 그때완 조금 달랐다.
내리쬐는 이 빛.
조금 전부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감각을 느낄만한 기관조차 기능을 상실한 거다. 그렇다면 나는 살아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엔 답을 할 순 없을 것 같다. 생각마저 내 뜻대로 흐르는 게 아니었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의식의 흐름을 관조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무력하고 무기력한 이 감각.
‘느껴본 적 있어.’
익숙했다.
평소 잊고 살아왔지만, 분명 나는 이런 경험이 있었다고 번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
걸레처럼 자빠져있던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눈동자에 맺힌 것은 그가 살아왔던 어떤 한 지점이었다.
.
스스스스. 바람이 불었다.
그걸 시원하다고 느끼진 않았지만, 인식할 순 있었다.
비가 왔으면 좋겠다. 이런 가벼운 바람에도 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마음 아프다. 그래도 그는 살아간다. 비록 한 걸음도 떼지 못하는 비참한 운명이었지만, 아침을 맞이하고, 다시 밤이슬에 몸을 적시는 이 긴 시간을 그는 아주 짧게 인식하고 있었다.
어느 날,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녀석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에 둥지를 만들었다. 그는 손님을 반갑게 맞았다. 무료한 삶. 이렇게 친구가 생겨서 좋았다. 하지만 새는 금세 떠났다. 알에서 태어난 녀석들이 무럭무럭 자라 화창한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그 세월이 너무도 짧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긴 가뭄이 닥쳤다.
- 더워.
- 힘들어.
- 싫어!
그는 뇌가 없었다. 작고 구멍 숭숭 뚫린 위태로운 바구니에 담긴 영혼처럼 그저 자연이 흔드는 대로 살아갈 뿐이었다. 눈이 없으니 보질 못하고, 귀가 없으니 듣지도 못했다. 하지만 고통은 느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후두두둑.
빗방울이 떨어질 때, 그는 전율한다.
이 쾌락, 이 기쁨, 이 행복, 이 만족감. 정말 별거 아닌 비에도 이렇게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이리라.
어느 덧 구름이 물러가고, 흠뻑 젖은 대지는 다시 뜨거운 태양 빛을 받았다.
아아아아아아.
그토록 뜨겁던 빛이 이젠 너무도 포근하게 그를 감쌌다.
토옥, 톡.
앙상하던 가지에 꽃망울이 맺혔다. 그것들은 곧 넓은 잎으로 자라, 저 빛을 머금고, 싱그러운 녹색 빛으로 물들 것이다.
.
“으으으..”
번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된 거냐? 야! 번!
악마의 목소리에 대답할 정신은 없다. 지금 번은 잊고 지냈던 어떤 과거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거미, 각종 벌레, 뱀, 지렁이, 사슴, 쥐 따위로 살아봤으면서도 왜 단 한 번도 ‘식물’은 생각하지 못했을까?
스스스스스.
번의 피부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투명한 장갑을 낀 손이 슥슥 문지르 듯 반질반질하게 문대진 살결이 내리쬐는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광합성光合成을 시작합니다.」
「새로운 성분 77종을 흡수합니다.」
「빛에 내성을 만듭니다.」
“아아아..”
번의 입에서 다시 신음이 터졌다.
하지만 이건 고통의 그것이 아니었다. 전율과 감탄에 흠뻑 빠진 자연의 위대함을 실감하는 한 미약한 인간의 깨달음에서 오는 환희였다.
“아..아아-”
「빛 성분이 상단전에 자리 잡았습니다.」
「성력을 흡수합니다.」
상단전의 터줏대감은 새로 온 손님을 당해내지 못했다. 비슷한 놈들이라고 해도 섞일 순 없었으니, 빛은 신성력을 단박에 잡아먹으며 세력을 키웠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빛이 기맥을 타고 이동합니다.」
「중단전에 진입합니다.」
「하단전에 진입합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지만, 빛은 빠르고 넓다. 게다가 번의 몸에는 이미 비슷한 녀석이 도사리고 있었고.
오색 마나.
그 중에서도 평소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던, 모든 속성의 바탕이 되던 하얀 녀석이 빛에 합류했다. 그러더니,
“흐으..”
번은 절정을 느끼는 사람처럼 치를 떨었다. 마나와 합성된 빛이 그의 몸 구석구석을 너무도 부드럽게 어루만진 것이었다.
흙, 물, 빛만 있으면 나무는 자란다. 따스한 기온, 풍부한 양분과 적당한 바람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지만, 어떤 악조건에서도 불평 한 번 하지 않고, 뿌리를 내리며 살아간다.
예로부터 인간은 궁금해했다.
식물은 영혼이 있을까? 불교나 채식주의자들은 고기를 먹지 않고 살아가지만, 어떤 과학자들은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고 밝혀냈다. 그러면 고통은 누가 느끼는 건가? 그저 육체의 화학적 반응인가? 그 고통을 인지하는 주체는 대체 뭔가?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나는 식물로 살았다고. 그것도 무려,
‘1,841번.’
엄청난 횟수를 거듭하면서 말이다.
이제 번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정신이 드냐?
악마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번은 아직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1,841번이라니..’
동물과 식물의 구성이 완전히 다르기에 모르고 살았었다. 아직도 나무나 꽃으로 살아갈 당시에 내 영혼은 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에 대한 답은 할 수 없었다. 동물로 치면 머리란 게 있으니 보통 거기에 영혼이 담겼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양파나 당근 같은 걸 생각해보면 혼란만 생길 것이다.
“젠장..”
번의 팔이 바닥을 디뎠다.
‘이걸 왜 지금에서야 안 거지?’
-이겨낸 거냐? 그런 거야? 야! 번!
‘그래, 좀 조용히 해. 골이 울린다.’
번은 팔을 뻗어 손바닥으로 벽을 더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줄기를 뻗을 수 있습니다.」
2천 번에 가까운 식물의 삶.
미나리, 도라지, 파, 마늘, 양배추, 뿐만 아니라, 민들레, 튤립, 장미, 백합, 무궁화 같은 꽃과 각종 그 꽃을 피우는 나무까지. 어떤 생은 지나치게 짧았고, 또 어떤 생은 지나치게 길었다. 어떤 때는 씨앗인 상태로 수년이나 처박혀 있다가 간신히 뿌리를 내린 적도 있었고, 그렇게 고생해서 싹을 틔웠는데, 산짐승에게 뿌리까지 뜯겨 먹힌 적도 있었다.
「잎을 틔울 수 있습니다. 수분이 부족합니다.」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수분, 양분이 부족합니다.」
그 삶에서 얻은 77가지의 능력이 지금 번에게 싹 텄다. 가지를 뻗고, 잎을 만들고, 빛을 머금으며 꽃을 피우는 그 모든 것이 다 스킬이 되었다.
-너..? 뭐야? 뭔데? 지금!
악마도 뭔갈 느꼈는지 물었지만, 번은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빛은 넘치는데, 수분이 없다.
푸욱.
발기부전 환자의 그것처럼 볼품없이 늘어져 있던 그의 꼬리가 바닥에 힘차게 박혔다.
물론, 바닥은 이곳을 이루는 공간처럼 단단했다. 만약 아래가 약했다면 아까 들어왔을 때, 이미 바닥을 파서 탈출했을 것이다.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었던 그였으니까.
그러나 번은 서두르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하찮고 흔하며, 움직이지도 못하고 늘 다른 생물의 먹이가 되는 꽃과 나무. 그러나 이들은 그 누구보다 먼저 이 세상에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느리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래서 빠른 것보다 단단해질 수 있는. 그 어떤 생물보다 강인한 투지.
「뿌리를 내립니다.」
그게 바로 식물의 힘이었다.
이걸 태어나자마자 알았다면 지금쯤 대륙 전체에 뿌리내린 거목이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뒤늦은 깨달음에도 번은 실망도, 후회도 하지 않는다. 대신,
샤샤샤샤샤샤샤..
뿌리 끝이 수천 개의 가느다란 혈관처럼 갈라지며 바닥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차오르는 양분과 수분이 그의 몸을 채워 나갔다.
머리카락보다도 훨씬 얇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느다란 그것은 아무리 단단한 것도 뚫고 나아갔다. 그리고 물이 한 방울 한 방울 긴 세월 떨어져 단단한 바위를 부수 듯 뿌리는 아주 작은 틈도 놓치지 않았다.
사물을 이루는 모든 것이 세포의 결합이다. 반드시 사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번의 뿌리는 빛의 속성을 띄었다. 역설적으로 느린 식물이었지만, 빨랐고 넓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시간의 개념은 사라진다.
번이 그토록 많은 삶을 기억하지 못하다가 지금 이 순간, 한 번에 받아들인 것처럼 지하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성분은 흩어져 있을 땐, 아무것도 아니다가 그의 몸에 한대 모였을 때, 의미를 찾는다.
「성분 10,256종을 흡수했습니다.」
「수분을 흡수했습니다.」
「파괴된 세포를 재생합니다.」
「뼈가 더 단단해집니다.」
「혈관이 더 튼튼해집니다.」
「피부가 더 강인해집니다.」
「빛에 면역되었습니다.」
번은 이제 벽을 짚지 않고 서 있었다. 흡사 갓 태어난 사람처럼 어떤 표정도 그의 얼굴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깊은 눈은 세상의 비밀을 듬뿍 맛본 사람처럼 고고했다.
살랑.
그의 꼬리가 바닥에서 떨어졌다. 더 이상 양분과 수분을 흡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뽑아낸 수분은 그의 몸을 다시 본래대로 돌려놓았고, 미라 같던 얼굴은 포동하게 살이 올라왔다.
“광합성이라..”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도 정상이었다. 혀도, 목도, 목젖까지도 촉촉하다.
“허어..”
미쳤다. 이건 진짜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어쩌면 이제, 마법사들이 고생고생해서 대기의 마나를 모으거나, 유명한 기사들이 매일 아침 좌선하며 맑은 기운을 몸속에 담으려고 노력할 때, 번은 그저 태양 아래에서 언제든 힘을 축적할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그렇게 모은 빛 속성을 어떻게 쓰느냐는 다른 문제였지만, 신성력까지 잡아먹고도 모자라 온몸 가득 채워버린 힘이다. 어둠은 이제 번의 몸에서 버틸 여력이 없어 꼬리에 죄다 쏠려버렸고, 오색 마나는 자연스럽게 빛에 탑승했다.
“어이가 없네.”
번은 두 눈과 함께 삼안까지 뜨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와는 또 다르다. 홀로그램처럼 사물을 인식하던 것이 지금은 모든 것이 빛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젠 보인다.
저 하얀 벽 뒤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해골이.
저벅, 저벅 그쪽으로 걸어간 번.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고, 뒤로 팔꿈치를 뻗었다가 그대로,
퍼억!
후려쳤다.
“..꺼..어..?”
관통.
이 또한 빛의 속성이 가진 힘의 일부였다. 그냥 때린 것 같아도 벽에 닿기 직전에 그의 팔은 전체가 형광등처럼 변했었다. 우윳빛 머금던 신성력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끄으으으.. 으으?”
벽에 붙어 있다가 뚫고 나온 번의 주먹을 맞고 나뒹군 해골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가리를 들었다.
번은 주먹이 지나갔던 구멍으로 녀석을 바라보다가 다시 주먹을 쥔다. 그리고,
퍼억! 퍽!
구멍 몇 개를 더 만들더니, 그대로 잡아 뜯어버렸다.
우수수.. 무너지는 벽.
하얀빛으로 발광하는 손을 허공에 탁탁 털며 다가오는 번을 보며 해골은 몸을 떨어댔다. 딱딱딱 부딪히는 그 윗니와 아랫니가 심경을 말해주었다.
“으으으.. 어..떻..게..?”
빛에 면역인 해골이다. 하지만 녀석이 지금 느끼는 공포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포식자.
빛을 잡아먹고 사는 괴물이 실험실 안에서 뛰쳐나왔다. 빛의 반대라면 보통은 어둠을 떠올리겠지만, 아니다. 이건 그런 단순한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더 고차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이었다.
“이제..”
번은 해골에게 바짝 다가서서 녀석의 대가리를 손으로 덥석 쥐며 말했다.
“차 한잔 내올 마음이 생기냐?”
세상을 지배하는 위대한 식물의 계승자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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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녀석은 자기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 뿐 아니라 자기가 살던 왕국의 이름도, 가족도, 신념조차 잊었다. 오직 세상에 대한 원망과 강해져야 한다는 일념, 신성국에 대한 복수심만이 그를 지탱해온 원천이 되었다.
-마도왕국이군.
그랬다. 오래전 신성국과 제국, 그들의 동맹국의 연합군에 의해 지도에서 사라져버린 마도왕국의 왕이 바로 그의 정체였던 것이다.
“거, 참.”
군대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버렸다던 그가 이곳에 리치가 되어 아직도 살아 있었다.
“빨리, 빨리 안 움직이냐?”
“히..이..익!”
번에게 맞아 해골 한쪽이 박살 난 해골이 헐레벌떡 뛰어오다 앞으로 훅 고꾸라졌다.
“······.”
자빠진 녀석을 바라보던 번은 주인의 폭력에 길든 강아지처럼 흔들리는 시선으로 고개를 쳐드는 해골을 보다가 손짓했다.
“됐으니까 앉아.”
물 한잔 떠 오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조차 제대로 못 할까. 후다닥, 기다시피 번의 발치로 온 해골을 보며 번은 입맛을 다셨다.
이제 이놈을 어찌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