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49화 (149/177)

# 위대한 것 1 #

콰앙!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소리와 비교하면 해골이 받은 충격은 그리 크진 않은 듯하다. 심지어,

“크크..크크크..”

또 비웃는다.

비틀거리며 조금 물러나서 유쾌하게 웃어 재끼는 해골. 딸깍, 딸깍 쉴 새 없이 오르락 내리는 저 턱을 한 대 시원하게 후려쳐주고 싶은 마음이 뭉클 샘솟았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아는가! 신성력을 대항할 방법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연구하고 연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강철같은 몸을 소유하게 되었지! 라고 말했다. 워낙 말이 느려터져서 듣는 사람이 속 터질 지경이었지만, 저 늦어터진 말 덕에 숨은 돌리게 되었다.

-대단한데?

악마가 감탄한다.

-어떻게 한 거지? 신성력을 분쇄했다. 튕겨 나가지 않았어. 분명 먹혔다고! 궁금해!

악마 입장에선 어떻게든 배워두고 싶은 기술이었겠지만, 번에겐 짜증만 치솟을 뿐이었다. 상극인 속성이 통하지 않으니, 쉬운 길은 없는 가 보다. 그러면 남은 방법은 하나.

“제기랄!”

힘으로 깨부수는 수밖에!

“흐아아압!”

번은 신성력을 풀고, 그 자리를 어둠으로 가득 채웠다. 그러자 좀 전과는 전혀 다른 검게 물든 두 주먹이 해골을 향해 빠르게 접근했다.

-죽이지 마! 저 놈이 발견한 연구를 알아내야 해!

악마는 녀석에게 큰 관심을 보이는 듯 했지만, 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죽이고 싶어도..!’

퍼억, 퍽!

‘죽일 수가 없다고!’

번은 상대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주먹이 놈의 뼈에 닿아봐야 콰직 부러지는 소리 대신, 퍽퍽 돌 두드리는 느낌만 났다. 이건 뭐, 상대가 반응을 보여야 공격하는 쪽도 즐거운 건데, 전혀 먹히질 않으니 환장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그러면서도 놈이 쭉쭉 뻗는 손이나 발, 불쾌한 이빨 같은 것들이 스칠 때마다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이 느껴지니, 긴장을 풀 수도 없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이건 마치 너와 비슷한 놈을 상대하기 위해 맞춰진 것 같다.

그랬다. 어떻게 된 일인진 모르겠지만, 해골은 어둠과 신성력에 맞서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만약 번이 다른 속성을 다루는 마법사였다면, 이리 고생하지 않았으리라.

“크크크, 그.. 눈! 좋아보..인..다. 내게.. 바쳐라..”

갈퀴처럼 눈알을 손으로 파내려고 하며 다가서는 해골의 가슴팍을 걷어차며 뒤로 훅 물러선 번.

‘이대론 안 되겠어.’

짧은 공방이었지만, 번은 할 수 있는 건 다해봤다. 머리로도 받아보고, 독도 뿌려봤으며 심지어 아까 처음 손속을 겨룰 때부터 약을 빨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건지 분명 공격이 들어가긴 하는 데, 그게 전혀 대미지를 주질 못하고 있었으니 더 해봐야 지치는 건 이쪽이었다.

결국, 해골을 노려보다가,

“치잇.”

옆으로 급히 몸을 트는 번.

“어..디.. 가..느냐! 서라!”

번은 일단 자리를 뜨기로 했다. 뭔가 수단이 필요했다.

“이..노오..오옴..!”

가지 말라고 떠나는 연인을 향해 애절하게 손짓하는 사람처럼 해골은 번의 뒤를 따르며 팔을 뻗어보았지만, 둘의 거리는 점차 벌어졌다. 아무래도 번이 속도는 더 빨랐기 때문이었다.

한데,

“거긴, 안..된다! 아니..된다!”

녀석이 느린 어투지만, 절박하게 외쳐대기 시작했다.

"······?"

안된다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이다. 심지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저놈이 반대하면 꼭 해야 하지 않겠는가? 번은 방향을 잡은 것만으로도 놈이 기겁하는 통로를 향해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노..옴! 눈..알이라도 주고.. 가라!”

저 멀리서 들리는 녀석의 간절함을 뒤로하고, 번은 힐끔 돌아보며 한숨 돌렸다.

한국에 살 때, 공부하다 잠깐 쉴 겸 게임 같은 것을 해보면 초장에 꼭 선택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전사, 검사, 마법사, 엘프 같은 것들 말이다. 이걸 다시 두 종류로 나누면 대미지를 주는 것에 특화된 딜러냐, 아니면 반대로 강한 대미지에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는 탱커냐가 되는 것이었는데, 저 해골은 이제껏 번이 만난 그 어떤 생물보다 강력한 탱커였다.

-갈림길이다!

‘봤어!’

번은 본능적으로 오른쪽을 향했다. 삼안으로 주변을 투사해봤지만, 딱히 걸리는 게 없었으니 이럴 땐 찍는 거다.

‘요즘 내가 운이 꽤 좋거든!’

자신있게 악마에게 말했지만, 그러나 이건 번의 대단한 착각이었다. 지지리도 복이 없었으니, 지렁이나 파리 따위로 살며 그 고생을 했던 건데, 요즘 좀 살만해졌다고 운명이란 놈을 너무 얕봤나 보다.

“······?”

오른쪽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알았다.

“······!”

여긴 아니라고.

일단 5미터쯤 앞이 막혀 있었는데, 몸으로 뚫을 수 있는 얇은 벽도 없었다.

‘이런?’

급히 몸을 돌리려고 해봤지만.

‘없어?’

분명 조금 전 지나왔던 길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흡사 정신병원을 연상하게 하는 하얗고 깨끗한 벽이 어느새 나타나 그를 가로막고 있는 게 아닌가?

밀실.

그랬다. 번은 이 공간에 갇혀버린 것이다.

-여기서 나가!

뭔가를 감지했는지, 악마가 다급하게 외쳤다.

콰앙-!

이미 움직이고 있던 번이 어깨로 흰 벽을 들이받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쾅, 쾅! 쾅!

역시 포기를 모르는 남자라 그런지 몇 번이나 시도한다. 그러나 이건 보통 물리법칙이 통하는 벽이 아니었다.

“..가지..말라..했..건..만..”

벽 뒤에서 해골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놈은 진심으로 걱정해서 했던 말이었던 것이다. 그래봐야 놈의 손에 눈알이 뽑히거나, 여기 있거나 양자택일하라고 하면 엎어치나 매치나였겠지만, 이곳의 진가는 아직 시작도 안한 듯 하다.

“멈..춰..라..! 멈춰!”

퉁퉁.

해골이 반대편에서 벽을 두드리는 게 느껴졌다. 이러니 당황한 건 번이다. 대체 뭐가 있기에 녀석이 저리 반응할까?

파팟!

의문은 이내 풀렸다.

“어?”

그그그그그그그그그..

어떤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가 주변 전체에서 들려왔고,

-빛이다! 위!

악마가 바로 반응했다.

누군가 위에서 스윽 손으로 훔쳐 흙을 치워낸 듯 천장이 투명한 유리처럼 변해 있었는데, 그 위로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누가 봐도 가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인위적이었고, 문제는 강렬한 빛이 본래 태양을 웃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가야 해! 저거 심상치 않다!

그 옛날.

해골은 마법적 접근을 아주 달리했었다. 기존의 방식으론 침략자들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깊이 통감하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연구했다. 이건 그가 이미 이 시점에 인간이길 포기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는데, 신성력이란 뭘까? 라는 고민을 몇 년이나 하다가 그것이 태양이나 불같은 양기의 원천에서 힘을 끌어 쓴다고 여겼다.

그래서 만들었다. 인공 태양을.

그런 뒤, 오브를 안전한 곳에 두고 몸통을 실험실에 넣었다.

그렇게 180년.

그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인지하지 못했지만, 실험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의 뼈는 빛 속성에 면역이 되었다. 무식하고 기발한 방법이었지만, 보통 사람은 절대 시도할 수 없는 수단이기도 했다. 면역을 얻기 전에 늙어 죽을 테니까 말이다.

애초에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실험실 안에서 음식을 공급받을 방법도,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는 수단도 준비해 놓지 않았다.

“······!”

불 속에 내던져진 것 같은 고통은 없었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막의 모래 위에 서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은은하게 내리쬐는 태양 빛이 시간이 지날수록 얼마나 괴로운지를.

점차 노출된 피부는 바늘로 푹푹 찌르는 것같이 아파 왔다. 그것도 모자라 죽죽 벗겨지기 시작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빛은 점차 강해졌고, 입안의 침이 순식간에 말라버리며 갈증이 났다.  또한, 혀 안쪽까지 수포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이물감은 불쾌했고 역했으며, 그걸 느끼는 동시에 터져버렸다.

고통에 익숙한 번이다. 아픔을 차단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소용이 없었다. 애초에 건조한 뼈다귀 몸을 단련하기 위해 제작된 공간이었으니까. 그것도 미친 마법사가 만들었으니, 정밀한 설정 같은 것들이 제대로 되었을 리도 만무했다.

「경고, 경고, 손상된 세포를 재생력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경고, 경고, 지나치게 과도한 자외선에 노출되었습니다.」

우연은 참으로도 기막혀서 미친 마법사는 다른 부분에 다 실패했지만, 단 한 가지는 성공했다. 이 실험실 본연의 목적 말이다.

“크윽..”

번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파스스스.

바닥에 닿은 무릎 끝이 익어버렸다.

지금 이곳의 공기는 90도를 가볍게 웃돌고 있었고, 숨을 쉬는 행위만으로도 폐가 익어버릴 지경이었다. 여자친구 손 붙잡고 찾아갔던 불 한증막 따위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빛지옥. 그래, 여긴 지옥이었다.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이 수만 년간 고통받는다는 바로 그 형벌처럼 빛은 번을 움켜쥐었다.

-정신 차려!

피가 끓었다.

묘사나 비유가 아니라 진짜 그랬다. 몸의 모든 부분, 세포 하나하나 단위로 익어간다. 뇌가 부글부글 터질 것 같은 기분에 현기증이 범람하고, 코는 이 와중에도 고기 익어가는 냄새에 식욕을 느낀다.

이마저도 잘 버텨낸 거다. 일반인이라면 3초 만에 모든 수분이 증발하고 말라 비틀어지는 것도 모자라, 진즉에 뼈만 덩그러니 남겨졌을 거다. 그조차 토옥 건드리면 건조한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졌을 것이고. 열이 40도만 올라도 죽는 게 사람 아닌가?

"하아.."

번이니까 버티고 있었다. 그였으니까 영혼까지 태워버릴 이 빛 속에서도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이다.

-호신기를 써!

망할. 당연히 진작부터 쓰고 있었다.

마나를, 어둠을, 신성력까지 모든 걸 이용해 겉에 둘러봤지만, 빛은 그대로 투과되었다. 빛 속성이 가진 특징이 바로 빠르고 넓다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리 촘촘하게 가려도 빛을 막을 순 없었다.

“으음..”

번은 신음하며 억지로 앉았다.

어정쩡하게 선 것보다는 자세를 바로잡아야 진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좌한 채 생각한다.

"······."

길어선 안 된다.

몸이 고목으로 변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을 것 같으니까.

‘생각하자. 생각해.’

그가 가진 어둠으론, 이 빛을 막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태양 앞에 조그마한 그림자 정도다. 그러하면 신성력은? 그 또한 무기력했다. 강물도 바다에 휩쓸리면 떠밀려 나가듯 같은 속성이라고 봐주진 않는다.

‘방법이 있을 거야!’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그 말은, 반대로 말하면 정신을 잃으면 죽는다는 것과 같다. 이 상황에 기절이라도 하면 그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을 번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비쩍비쩍 말라간다. 얼굴은 수분과 지방이 빠져 아까 만난 그 해골처럼 변해갔고, 손은 관절이 훤히 도드라진다. 울컥 맥을 따라 뛰던 혈관은 가늘고 얇은 실지렁이처럼 변해 꿈틀댔고, 오장육부는 이미 기능을 상실했다.

그렇다. 번은 지금 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번은 이제 작은 불씨에도 화르륵 발화해버릴 것처럼 쪼그라들고 건조해졌다.

우리 몸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게 물이다. 다시 말해 그게 다 빠져나가면 체중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낼 수 있는 힘도 그만큼 사라질 것이다. 아, 물론 이런 상태에서도 살아 있다면 말이다. 살아 있다면.

투욱.

-야! 정신 차려! 번! 버어어어어언..!

여러 삶을 거치며 모아온 능력들을 생각해봤다. 몸의 신진대사를 느리게 해 죽은 것과 비슷한 상태로 만드는 기술도 있었지만, 이 상황에선 의미가 없었다. 박치기로도 저 벽을 부술 순 없었고, 악마의 꼬리는 오징어 다리처럼 말라 비틀어졌다.

무력하다.

그래도 꽤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토록 부질없다니..

툭.

바닥에 널브러지는 손, 어깨, 이마.

옆으로 고꾸라진 번은 뭔가 말하려 듯 입을 벌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대신 아까보다 더 뜨거워진 공기가 깊이 침투했다.

“커.. 헉..”

-버어어어어어어언!

악마의 비명이 절규처럼 번의 정신을 공허하게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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