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47화 (147/177)

# Necromancy 1 #

악마 주제에 신성력을 논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번의 처지에선 뭐든 못할까.

“그게 뭔데?”

번의 물음에 악마가 태연하게 답했다.

-신성제국으로 침투해서 사제들을 잡아먹어. 고위급으로 한 열 명만 흡수해도 얼추 괜찮을걸?

“미친놈.”

번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코웃음 치며 머리를 흔들었다. 설마설마했는데, 확실히 악마는 악마다. 생각하는 회로가 인간과는 너무도 다르지 않은가.

-왜? 좋잖아? 빠르게 강해질 수도 있고.

“제국도 모자라 신성국까지 동시에 상대하라고? 그놈들이 내 흔적을 못 찾을 것 같냐? 신이란 놈이 개입할지도 모르는데?

-아.. 그럴라나?

뭐 이런 자식이 다 있나? 이래서 예로부터 악마의 속삭임은 듣지 말란 거다.

-아니면..

“아니면? 또 뭐?”

또 무슨 헛소릴 하려나 싶다가도 묘한 기대감에 묻는 번. 절박함을 감출 수 없다.

-내가 오래전에 어떤 소문 하나를 들었는데.

“소문?”

-그래, 너 마니렙 산맥 알지?

안다. 콩가의 북쪽, 제국과 경계를 이루는 험준한 산맥 이름이 마니렙이다. 길도 없고, 몬스터 천지에 각종 맹수도 득실득실해서 전쟁이 벌어져도 그곳엔 병사들조차 얼씬거리지 않을 정도로 기피 하는 곳이었다. 번 역시 이번 전쟁을 준비하면서도 하도 그곳은 피하라는 소릴 들은 터라 배제했었다.

“드래곤이라도 살고 있냐?”

-드래곤이 그렇게 흔한 줄 아냐? 저번엔 운이 좋았던 거라니까. 마침 딱 늙어 죽기 직전의 블랙 드래곤이었으니 네가 감당할 수 있었던 거고. 일반적인 화火룡 성체만 만나도 너는 눈 깜짝할 시간에 불타 죽을걸?

“그럼 뭔데?”

답답하게 빙빙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하라고 보채는 듯한 번의 목소리에 악마는 재미있다는 듯 이죽거렸다.

-뻔뻔한 놈.

“뭐?”

-너는 나한테 바라는 것도 많다. 뭐 하나 주는 것도 없으면서.

번의 눈꼬리가 씰룩거렸다.

“피와 영혼을 주잖아.”

-그거야 전쟁이 벌어져야 하는 거고. 평소엔 쥐뿔도 없잖냐. 게다가 이번엔 통제실에 있을 거라며? 전장에 가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영혼을 모아?

“아, 음..”

그건 그렇다.

-이건 우리 계약에 어긋나는 거라고. 넌 싸우고, 나는 피와 영혼을 모으고. 이거 아니었냐?

악마를 부리려면 항상 제물이 필요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가장 철저하게 지키고 확인시켜주는 존재가 바로 악마 아닌가? 그런데 최근 번이 싸움터에 나가지 않으니, 악마가 뿔이 난 거다. 거기에 더해 앞으로 있을 대전쟁에서도 현장에 가지 않는다 하니 조바심도 생겼을 테고.

-하나만 약속해주면 알려주지.

번은 악마의 말에 혀로 입술을 축였다. 이놈과 거래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뭔가 알고 있다는 느낌이 확실히 든다.

“먼저 말해주면.”

-네가 먼저.

“싫은데?”

-이이이익! 먹고 배째라 하면 나는 어쩌라고?

“야, 우리 사이에 그 정도 믿음도 없냐?”

-믿음이란 단어는 그 재수 없는 신들의 전유물이고.

아아, 녀석은 악마였지.

“그럼 신용으로 하던가.”

-..약속 지켜라. 먹튀하면 온종일 욕할 거다. 1초도 쉼 없이!

확실히 한 몸에서 동거하다시피 해서 그런지 악마 녀석의 언어능력이 갈수록 번과 비슷해져 갔다.

“일단 들어보고.”

-들어보고? 야! 계속 말 바꿀래?

“일단 패를 봐야 수준을 맞춰줄 거 아니야? 싫음 관두던가. 네가 미친 수작을 부린다고 하면 내가 그걸 무조건 받아줄 줄 알았냐?”

-그런 건 아니다. 나는 단지 그 마법사에게 부탁해서.

“마법사?”

-그 왜 있잖냐. 여왕에게 수상한 주머니를 건넨 놈.

“아아.”

-그놈에게 그 주머니를 하나 더 만들어 달라고 해서..

악마의 요구는 간단했다. 번이 직접 전장에 가지 않으니, 그걸 대체할 수단을 마련하려는 거다. 그 정도면 어려운 일은 아니라 생각하며 번이 끄덕였다. 그리곤 다그치듯 말한다.

“이제 말해. 뭐야? 그 산맥이 뭐?”

-약속 꼭 지켜! 마니렙엔 말이지..

악마가 기막힌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

.

.

꼭 가셔야 해요? 라고 말하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카시오페이아를 뒤로하고 번은 수도를 떠났다. 간단한 가방만 챙겨 길을 나서는 그의 모습은 어디 일박이일로 낚시라도 다녀오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가 향한 곳은 그 악명높은 마니렙이었다.

유물遺物.

애초에 말이 나왔던 신성력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지만, 선대의 인류가 후대에 남긴 물건이라는 그 뜻처럼 유물엔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 왜, 타이타닉호가 침몰했던 게 배에 실려 있던 어떤 관 때문이라는 루머도 돌지 않았던가?

설명우가 살던 21세기라면 그저 흘려 들어도 됐을 가설이었지만, 이곳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여긴 정령이 있고 마법이 존재하며, 드래곤이란 괴생물이 버젓이 살아가는 세상이니 말이다. 그래서 악마의 말이 힘을 얻었다.

-꾸물거릴 시간 없다. 빨리빨리 가자고.

하지만 이 교활한 악마는 마계에서 들은 반쪽짜리 소문만 알려주었다. 마니렙에 뭐가 있다더라. 그런데 그게 심상치 않다더라. 같은 찌라시 정보 말이다. 의심쩍긴 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그런 소문이 발생할 리 없었으니 속는 셈 치고 가보려 한다. 당장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기에.

문제는 그곳이 마니렙이란 것만 알지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것이었고, 결국 그 넓은 산맥을 맨땅에 헤딩하듯 가서 뒤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촉박하다. 아무리 늦어도 두 달 안엔 돌아와야 전쟁 준비를 마칠 수 있을 테니까. 급한 대로 일단 페트릭에게 일을 위임하고 오긴 했는데, 역시나 직접 하지 않게 되니 초조해졌다.

-뛰어!

재촉하지 않아도 알아서 간다. 번은 쉬지 않고 뛰다 지치면 걷고, 다시 뜀을 반복하며 북쪽으로 향했다. 말을 타면 좀 더 편했겠지만, 마니렙은 말처럼 온순한 동물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 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왜 여기에만 맹수가 득실대는 거지?”

저 멀리 보이는 산의 능선을 보며 번이 물었다. 드디어 초입에 도착한 것이다.

“여긴 허리케인 아이의 영향도 받지 않았지?”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몬스터나 언데드라면 융이 만든 그것의 유혹을 피할 수 없었을 텐데 말이다.

-더 강력한 무언가가 놈들을 붙잡고 있다는 거겠지. 어때? 이제 호기심이 무럭무럭 생기냐?

사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번은 몇 번이나 악마에게 확인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시간 낭비하긴 싫었던 거다.

어느덧 산의 안쪽으로 더 들어서자,

“후우. 나쁘진 않군.”

번은 심호흡을 크게 했다.

몬스터나 맹수는 주로 음蔭의 성질을 가진다. 그렇다고 한다면 번과 궁합이 아주 잘 맞는다는 뜻이었고, 녀석들을 구속한 힘도 그쪽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뜬금없이 화火속이나 수水속 개체가 나타나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보다야 백번 낫다는 것이다.

-어디부터 뒤져볼래?

“일단은.”

발길 닿는 대로.

그렇게 번은 마니렙 산맥을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과연 여기에 뭐가 있는진 몰라도 화전민이나 토착민으로 보이는 인적이 단 하나도 없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 적응 하나는 기막혀서 추운 북극에도 얼음집 짓고 살아가는 인간이 여기만 없다는 건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섯 번의 밤이 지나고, 다시 이틀 밤이 더 지났을 때,

“흐음?”

번은 절벽 위에 서서 가득 차오른 보름달을 올려보고 있었다.

“수상하지?”

-만월滿月이다.

매달 볼 수 있는 달이 뭐 그리 신기하겠느냐마는 저걸 본다면 누구라도 몸이 쭈뼛할 것이다.

-그것도 핏빛 만월. 저런 건 마계에서도 구경하기 힘든데, 대단하군.

“왜 저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지?”

-한과 증오, 분노와 설움이 이 주변 대기에 퍼져 있어 저렇게 투영되는 거다.

“그 뜻은?”

-그래, 이 근처라는 거야. 가까워졌다. 찾아봐!

달은 예로부터 마음을 비치는 창으로 불렸다. 어떤 기분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을씨년스럽거나 스산하게 다가올 수도 있고, 사랑에 빠진 사람에겐 연인의 그리운 얼굴로 애틋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누가 보든 오직 한 모습으로 나타날 거다. 바라만 봐도 온몸의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운 형체. 마치 눈알 같았다. 한 맺혀 죽은 여인에게서 막 뽑아낸 그런.

“으으음..”

-그런 거였나?

번과 악마가 동시에 깨달았다.

번은 지금 작은 폭포 앞에 서 있었는데, 물이 말라 비틀어져 쩍쩍 갈라진 바닥이 훤히 보이는 상태의 이 기괴한 물길뒤로 졸졸졸 물이 떨어졌지만, 뒷공간을 완전히 가려주지 못했고, 그 안쪽 늑대의 아가리처럼 떡 벌어진 불길한 구멍은 가슴깊이 자극했다.

도망쳐! 라고 말이다.

물론, 번은 그런 본능을 따르는 남자가 아니었다.

“지하였나? 어쩐지 그렇게 많다던 맹수가 하나도 보이지 않더라니.”

마니렙에 온 것도 일주일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는데, 마주치는 것들이라곤 쥐나 뱀 같은 소동물 뿐이었다. 고작 이 정도라면 인적이 없을 리 없었다. 하다못해 사냥꾼이나 약초꾼이라도 다녀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조심해. 주변으로 마력이 느껴진다. 아마도 기운을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는 의도로 보여.

음기에 민감한 번조차 여기 가까이 와서야 잡아낼 수 있었을 정도로 실낱같은 기운이 저 폭포 뒤편 구멍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다.

-마녀 하나라도 데려왔어야 했나? 아니, 둘을 데려왔으면 하나 먼저 보내서 정탐하기 쉬웠을 건데. 그것들은 어디서든 소통할 수 있다며? 한 열 데려왔으면 편했겠다. 위험할 때마다 하나씩 보내서 확인하면 되는 거 아냐? 캬! 이걸 왜 지금에서야 생각했지?

호오, 그런 방식으로도 써먹을 수 있군? 번은 악마의 잔머리에 크게 끄덕였다. 물론 마녀가 있었다 해도 그렇겐 쓰지 않았을 번이었지만.

“좀 닥쳐. 집중하게.”

-그놈 참! 말 한번 이쁘게도 한다!

“알면 다물어.”

안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간다.

대 에비뉴의 태자이며 콩가 왕국의 부마 신분인 그가 이런 외딴 오지에서 홀로 탐험하고 있다는 것이 누가 봐도 황당하겠지만, 번은 진지했고 절박했다. 이왕 하는 전쟁. 무조건 이기고 싶었고, 더 강해져서 압도적으로 밟고 싶었다.

‘탁해.’

어둠과 음기에 익숙한 그였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눈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먼지 따위가 달라붙어 그런 게 아니다. 이건..

‘독기.’

-..그래.

아까 한 말 때문에 삐쳤는지 말이 한 박자 늦게 나왔지만, 악마는 입이 근질거리는지 설명했다.

-네가 품은 독관 전혀 다른 성질의 독기다.

‘다르다고?’

-그래, 독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뱀의 독처럼 동물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금처럼 일종의 기운처럼 퍼지는 것이지. 주로 네크로맨서들이 이런 시독屍毒을 이용해 힘을 기른다.

동양에선 강령술降靈術사, 서양에서는 네크로맨서Necromancy로 통하는 이자들은 망자의 영혼을 불러오는 마술이나 주술을 쓰며 주로 흑마법이나 부두술에서 유래한 마법사나 주술사, 소환술사가 행하며, 사람의 시체나 동물을 제물로 삼아 힘을 쓴다 전해진다.

-어떤 놈인진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기운을 뿜어낸다면 보통은 아니야. 제대로 찾아왔다!

악마의 말처럼 이 안쪽의 괴물은 피부가 찌릿찌릿 전기가 오른 것처럼 당길 정도로 대단한 놈임이 틀림없었다.

-괜찮겠냐?

악마가 물었지만,

“당연.”

번은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랫만에 그의 이마에서 세 번째 눈이 번쩍 뜨였다. 그와 동시에,

차르륵.

꼬리뼈가 자라났다.

고양이의 그것처럼 살랑거리며 인간과는 전혀 다른 무게중심을 배분했다.

「위협을 느껴, 호신기가 작동합니다.」

「육체가 전투에 최적화됩니다.」

각종 전투준비가 차례로 완료되고,

「머리가 단단해집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끌어올렸다.

위험천만한 함정이 가득한 고대 유적을 탐사하는 인디아나 존스처럼 번 역시 짜릿하고도 중독성 있는 긴장감을 맛보면서 천천히 안으로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실 그간 너무 안주했을지도 모른다. 언제부턴가 목숨 걸고 뭔가를 하기보다는 머리를 써서 고난을 헤쳐가거나 주변을 이용해 위기를 넘겼다. 아마 이번에 마니렙 일정을 잡은 것도 이런 물러진 스스로를 다잡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렇게 15분쯤 안으로 깊이 들어갔을까?

-왔다!

“알아!”

번과 악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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