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번이 페트릭의 손을 잡아주며 환하게 웃었다.
“강녕하셨습니까?”
“나야, 아프면 이상할 나이 아닌가? 자네가 걱정이지.”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걸음을 맞추며 성으로 향했다. 저 멀리서 대열을 이끄는 미루와 다루에게도 잠깐 눈을 맞춰준 번은 페트릭에게 슬쩍 묻는다.
“그녀는 잘 지내는가?”
“안전한 곳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페트릭의 딸. 전직 에비뉴의 황비 얘기였다. 혹시나 두고 온 그녀가 잘못되진 않을까 내심 걱정했던 번의 얼굴이 펴졌다.
“얼굴들이 말이 아니군. 얘기는 들었네. 폐하께서 지원을 끊어버리셨다고?”
“연유가 있으시겠지요.”
페트릭이 쓰게 웃으며 대답하자, 번은 머리를 흔들었다.
나 하나만 타겟으로 잡으면 될 일을 3만이나 되는 죄 없는 이들을 왜 고생시키나? 이럴 거면 보내지나 말지 알다가도 모를 양반이었다. 어쨌든 일은 벌어졌으니, 이제 수습해야 한다.
발키리 대표로 번과 함께 궁에 들어간 페트릭은 카시오페이아 앞에서 몸을 낮췄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카시오페이아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녀도 들어서 안다. 저 페트릭이라는 장군이 전엔 한 나라를 이끄는 왕이었던 사람이라는 걸. 한데 이렇게 남의 밑에서 군대를 이끌고 있는 모습은 그녀에겐 생소한 것이었다.
“우리의 동맹이자, 멀리서 온 손님들에게 푸짐하게 성찬을 내어주도록 하세요.”
그녀의 말에 대신들이 꾸벅 머리를 숙였다. 이미 일주일 전부터 3만이 머물 공터와 음식을 준비하느라 궁은 야단법석을 떨어야 했다. 간단한 인사치레가 끝나자, 카시오페이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사전에 번과 일정을 조율해 두었기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거다.
자리를 옮겼다.
궁 안쪽 일반 응접실이 아닌, 더 은밀한 방에는 이미 미루와 다루가 불려와 있었는데, 카시오페이아와 번, 페트릭과 자매가 모두 모이자 원형의 탁자에 지도가 펼쳐졌다.
“한 며칠 그대와 술이나 진탕 퍼마셨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상황이 그리 넉넉하지가 않소.”
번은 카시오페이아 앞에선 듬직한 남편이자, 유능한 지략가의 모습을 일관하고 있었는데, 기억 속 번의 모습보다 더 어른스러운 그 분위기에 미루는 가슴이 알싸했다.
저 여왕을 보라. 아름답고 어려보이지만, 그런데도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지 않는가? 저런 여자쯤은 돼야 그의 옆에 있을 수 있는 걸까?
“행정관이라고?”
번의 목소리에 그녀가 화들짝 놀랐다.
“네?”
“하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는가? 내, 사령관에게 들었다. 행정관으로 발령받았다고?”
“예.”
미루의 대답에 번은 웃으며 카시오페이아에게 그녀의 칭찬을 했다.
“행정관은 아주 유능하다오. 며칠 지내보면 알겠지만 다양한 방면으로 뛰어나니 부대에 관해 궁금하거나 상의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녀를 찾으시면 된다오.”
“그리하겠습니다.”
카시오페이아는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이 미루를 보며 묘하게 반짝였다. 여자들만 가지는 직감이 발동하는 거다. 하지만 카시오페이아는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미 콩가의 여자들 사이에서 대공이 화제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자라면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준수한 외모와 박력, 에비뉴의 태자라는 지위를 빼고라도 그와 함께하면 절로 심장이 콩닥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그의 인기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
“다루.”
“넵! 태자님!”
우렁차게 대답하는 다루를 보며 번은 피식 웃었다.
“여기선 대공이라 부르면 된다.”
“알겠습니다!”
“친위대도 함께 왔나?”
“두 명은 황실에..”
다루가 카시오페이아 눈치를 보다가 번이 괜찮다며 눈짓하자 말을 이었다.
“황실에 불려간 뒤로 소식이 끊겼습니다. 아무래도 그쪽에서 쓰려는 것 같았습니다.”
잘 키워놨더니 낼름 빼앗아가는 건가?
“하지만! 나머지는 함께 왔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처음 그 일이 있고 난 뒤, 다루는 친위대를 해산하다시피 뿔뿔이 흩어놓고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보직을 변경시켰다. 유능한 자들은 어디에서든 탐내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모조리 끌려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리켄스는?”
“집정관 밑에서 상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쯧.”
확실히 황제와 그 측근들은 사람 부릴 줄 안다. 유능하면 과거는 상관없이 부린다. 그러니 람보르가 생겼고, 저 페트릭이 아직도 살아 있을 수 있었겠지만.
“체리티는 아직 숲에 있나?”
“예..”
뭔가 할 말이 더 있다는 듯 말끝을 흘리는 걸 보며 번은 나중에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마무리했다.
어찌 됐든 다들 살아 있다니, 언제고 기회는 올 거다.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그들이 에비뉴에서 더 크고 중요한 일을 맡아 스스로의 가치를 발전시키면 번으로서도 나쁠 건 없었다. 물론 최후의 순간에 그들이 이쪽 손을 들어준다는 가정이 깔려야 하겠지만 말이다.
“보다시피 여기 콩가는 우로 제국이, 나머지엔 5개 나라가 감싸고 있는 형국이지.”
번은 지도를 살피며 페트릭과 자매에게 주변 정세를 알려주었다.
“왕국들의 군사적 수준은 비슷하나 변수라 하면 제국이 너무 가깝다는 것이지. 또한 콩가를 포함한 6개국은 오래전부터 제국의 형제국가나 다름없이 지내왔다네.”
말이 형제지 상국으로 모셔왔다는 얘기다.
번의 말에 페트릭이 묻는다.
“제국만 움직이지 않는다면 승산은 있습니까?”
“그렇네.”
“그래서 저희를 청하셨던 거군요.”
한때 정치했던 사람답게 페트릭은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비록 철의 군대가 아니라 발키리였지만, 만약 이들이 제국의 손에 전멸하게 되면 에비뉴로선 아주 좋은 명분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설명우가 살던 대한민국이 한국전쟁 이후 21세기까지 그토록 눈부신 발전을 하면서도 북한에 침략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건드리는 건 미국 본토에 싸움을 거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바로 이런 상황을 여기 콩가에 조성하려고 했던 것인데, 황제는 손에 쥘 패가 아니라 언제든 던져버릴 패를 보내온 거다. 잃어도 상관없고, 죽어주면 더 좋은.
‘당신 생각대로 되진 않을 거야.’
생각을 끝낸 번이 말했다.
“우리에겐 두 가지 호재가 있네.”
그렇지 않아도 서로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모인 상황에서 하나가 다섯을 이길 수 있는 비법을 알고 싶었던 페트릭은 번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최근 에비뉴와 분쟁이 잦은 제국엔 대륙 각지에서 모여든 용병들이 아주 많다네. 하지만 매일같이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 그들은 지금 제국 곳곳에 흩어져 하릴없이 대기하는 실정이지.”
“아!”
페트릭이 탄성을 질렀지만, 다루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그건 다른 왕국도 같은 조건 아닌가요? 용병들은 돈만 주면 어디든 붙을 거예요.”
번이 웃었다.
“그렇지. 바로 그게 핵심이야.”
돈.
“우리에겐 다른 왕국보다 더 많은 돈이 있고, 제국과도 가까워 용병들의 이동이 자유롭지.”
“아..”
번이 황제와 닮은 점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써먹는다는 것이다. 한때 그가 에비뉴에 있을 때는 어쩌면 적으로 마주쳤을지도 모르는 제국의 용병을 지금은 고용하겠다고 하는 거다.
“게다가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돈이 필요하다네.”
제국은 마약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었는데, 이런 쾌락에 가장 먼저 손을 뻗는 부류가 바로 용병이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수중에 목숨값으로 받은 현금이 있다. 거기에 전쟁이 없어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하니, 그들이 쉽게 중독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약은 이성을 잃게 하고, 판단력을 떨어지게 하지. 적당한 보수만 내걸면 그들을 우리 쪽으로 흡수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야.”
과연 그럴듯한 발상이다. 카시오페이아 역시 얼굴을 끄덕였다. 거친 용병들이 약에 찌든 상태로 콩가에 들어온다는 것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확실히 군사를 단기간에 늘릴 수 있는 대안이긴 했다. 5개 신도시에서 폭발적으로 걷히는 세금으로 왕실 재정은 그 어느 때보다 넉넉한 편이었으니까.
“다른 하나는 무엇입니까?”
페트릭의 말에 번은 카시오페이아를 잠깐 보더니, 지도의 한 곳을 손으로 짚었다.
“이곳은 세븐 스타네. 인구 50만을 넘기려 하고 있는 초대형 도시라 할 수 있지.”
“50만..”
페트릭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숫자는 웬만한 왕국의 수도에 필적할만한 인구 아닌가?
“이러한 규모의 신도시가 사방에 국경 인근에 조성되었네.”
“그건 위험한 것 아닙니까? 자칫 함락되면 큰 손해를 볼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하지만 그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야.”
번은 한가지 얘기를 들려주었다.
“옛날 어느 왕국이 침략을 받았었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 곳곳이 함락되었을 만큼 전력 차가 심했지만, 침략한 군대는 한 성 앞에서 발이 묶였는데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거야.”
성 안의 아낙들까지 치마폭에 돌을 싸들고 나르며 수성을 도왔다. 누군가에겐 행주 대첩으로 기억될 그 날의 사건은 싸움에 임하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참으로 훌륭한 여인들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페트릭이 감탄했다.
“마치 우리의 용맹한 발키리 같군요.”
칭찬에 미루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저희도 본받아야 할 정신이네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들처럼 되려면 더 열심히 훈련해야겠어요.”
번은 웃으며 말을 붙였다.
“지휘관의 역할도 중요하겠지만, 그곳을 터전으로 삼은 이들의 마음, 지키고자 하는 그 마음이 어떤 무기보다 강하게 벼려지는 것이지. 그게 한 곳으로 뭉쳐 기적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는데, 우리 또한 다르지 않다네.”
“······?”
모두가 바라보자, 번은 지도의 다섯 신도시를 일일이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난민과도 같네. 그들은 나라를 버리고 온 자도 있고, 꿈을 좇아 정착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저 주린 배를 채우려고 흘려들었을지도 모르고. 그렇기에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네.”
“배수진背水陣..”
페트릭의 말에 번이 미소지었다.
“맞네. 이들은 더이상 갈 곳이 없다네. 쉽게 왔으니 훌쩍 떠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건 우리가 분위기를 어떻게 조성하느냐에 달린 것이지.”
번은 황제가 내린 숙제를 오늘 하루 만에 풀어버릴 생각이었다.
“해서 자네들을 불렀네. 쉴 시간도 없이 바로 일을 맡긴다고 야박하다 생각 말게. 그만큼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까.”
“하명하시면 따를 것입니다.”
번이 비장한 눈빛으로 페트릭을 바라보며 말했다.
“발키리를 여섯으로 나눠 각 도시와 수도에 주둔시키게. 발키리가 해야 할 일은 조금 전에 말했던 바로 그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이네.”
“아..”
페트릭이 뭔가 알겠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자, 번은 미루를 보았다.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오면 사람들을 이끌고 적을 격멸하고, 평소엔 도시의 여인들에 스며들어 우리가 이 도시를 왜 지켜야 하는지 설득해.”
여인들이니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보통 남자들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정작 중요한 일을 앞둔 사내는 가장 가까운 여자에게 상의한다. 아내거나 어머니거나 애인에게 말이다.
민심이 움직이면 하늘도 움직인다? 여심이 움직이면, 전쟁의 승패가 갈릴 수도 있다. 다만, 이건 강제해서 될 것이 아니기에 작업이 필요했고, 발키리라면 그 일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벨버른에서 그녀들이 보통 여자들에게 어떻게 비쳤는지 잘 아니까. 선망의 대상인 발키리라면 단시일 안에 여심을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리 하면 보급 문제도 해결되지 않겠소?”
번은 환하게 웃으며 카시오페이아를 보았다.
“그녀들의 처우處遇를 영주들에게 맡기려고요?”
“당연하지 않소? 저 에비뉴에서 온 정예 병사가 도시를 지켜준다는데, 그 정돈 해야지.”
번의 꾀주머니에서 본격적으로 묘수妙手가 탁탁 튀어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