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44화 (144/177)

# 조약돌로 세상을 깨는 방법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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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루 남았나.”

노老장은 밤하늘을 올려보며 중얼거리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사령관님.”

"그래. 준비는 끝났나?"

그가 끄덕이며 묻는다.

“예.”

“수고가 많군. 행정관.”

그의 말에 행정관이라 불린 여인은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당연히 그녀가 해야 할 일 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정은 그리 좋지 못했으니, 보급부대가 따라오지 않은 탓이었다. 무려 3만 명이나 되는 전 부대가 출정했는데, 국가에서 아무런 지원이 없었던 거다.

“한 바퀴 돌까?”

“예.”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두운 밤.

노상에서 밤을 맞다 보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곤 한다. 주로 과거에 대한 추억이 스쳐 간달까? 한때는 왕으로 살았고, 전쟁에서 패배한 뒤에는 볼모처럼 적국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숨죽이며 지냈다. 그런데 지금은 3만의 군대를 이끄는 총사령관이라니. 참으로 인생 한번 기구하지 않은가?

물론, 그건 이 여인도 마찬가지겠지만.

“콩가에 가면 배불리 먹일 수 있을 거네.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의 부대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를 제외한 3만의 모든 이가 여성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대륙 역사상 단 한 번도 출현한 적 없는 기이한 군대. 하지만 그 나름대로 애착이 갔다. 어떨 땐 딸 같기도 하고, 어떨 땐 막냇동생 같기도 했으며, 또 어떨 땐 어머니 같다.

지금도,

“사령관님, 이것 좀 드셔보시겠어요?”

대체 뭘로 쒔는지도 모를 정체불명의 녹색 죽이 담긴 그릇을 내미는 병사를 보며 페트릭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가 많이 들게.”

“저는 이미 먹었는 걸요?”

거짓말이다. 이미 사흘 전부터 먹을 게 떨어졌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저것도 아마 행군 간에 주변에서 구하는 것들로 급히 만들었겠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는 게 전부인 그들이었다.

페트릭은 병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계속 걷기 시작했다.

지나는 길에 보이는 어떤 여인은 가볍게 속옷을 세탁해 나뭇가지에 널어놓기도 하고, 또 어떤 여인은 온종일 고생한 발을 주무르고 있었다. 이 중엔 1년 차 병사도 있었지만, 3년 가까이 군 생활을 한 여인도 있었다.

어찌보면 흔히 보는 아낙네들로 보일 수도 있는 그녀들. 하지만 저 야리야리하고 군살 없는 미끈한 몸만 보고, 우습게 봤다간 큰 코 다칠 것이다. 페트릭은 혹독하다 싶을 정도로 발키리를 훈련해왔으니까.

“저쪽으로 가지.”

하지만 위기도 있었다.

발키리 부대는 한 남자가 창안하고, 조직한 군대였다. 그런데 그 남자가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갑자기 콩가에 발이 묶이자, 발키리는 구심점을 잃어버렸고, 크게 동요하는 부대를 단단하게 틀어쥐는 것은 다른 생각 안 들게 몸을 굴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물론, 그 여파로 많은 부상과 탈영하는 자까지 속출했지만, 지금은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듬직한 병사들로 탈바꿈했다.

-하압!

-차아!

한쪽으로 계속 걷자, 뾰족한 기합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느려! 그게 아니잖아! 다시!

-넵!

야영장 외곽.

한 무리의 여인들이 모여 합을 겨루고 있었다.

발키리에선 흔한 풍경. 하지만 보통 사람이 보면 혀를 내두를 모습이었다. 속옷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몸에 딱 달라붙은 최소한의 의복만 갖춘 채 여인들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 사령관님.”

페트릭이 접근하자, 병사들을 감독하고 있던 여인이 인사했다.

“계속하게, 부대장.”

부대장은 끄덕이며 페트릭의 옆을 살짝 본다.

“언니.”

웃으며 동생에게 답해주는 미루. 그러더니 버럭 외쳤다.

“사령관님께서 보고 계신다! 이번엔 실수하지 마!”

거리를 벌리고 섰던 여인들은 비장한 얼굴로 상대를 노려보다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압!

-이얏!

20대 20의 집단 박투.

무기도 없고, 형식도 없다. 그런데 참으로 묘하지. 그녀들의 동작에서 어떤 규칙이 보인다. 아무렇게나 선 것 같아도 같은 편과 일정 거리를 벌리지 않았고, 옆의 동료가 위험하면 즉각 그쪽을 돕는다.

그래, 이건 아주 작은 전쟁이었다. 비록 서로를 죽여야 하는 실전관 달랐지만, 이런 훈련을 꾸준히 하다 보면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크게 올라가는데,

「훈련은 실전처럼! 하루하루가 전쟁같이!」

그 분께서 입버릇처럼 하셨던 말씀이, 이제는 부대를 지탱하는 뿌리가 되었다.

“저들은 2년 차 병사들인가?”

집단 박투를 보던 페트릭이 묻는다.

“1년차 신입 중에 가장 뒤떨어지는 자들을 모아 따로 훈련 중입니다.”

“멋지군. 충분히 칭찬할 만해.”

헐벗은 거나 다름없어서 외형만으론 그녀들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신입이 저 정도라면, 노련한 2, 3년 차 병사들은 보지 않아도 수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멀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코를 찡긋해 보인 그녀에게 페트릭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좀 걷겠나?”

언니를 힐끔 보며, ‘왜 이러셔?’라고 물어보지만, 미루 역시 머리를 저을 뿐.

“잠시만요.”

다루는 다른 장수에게 훈련을 일임하고, 다시 돌아와 페트릭의 곁에 섰다.

“가지.”

페트릭은 두 사람을 이끌고, 한참을 걸어 야영지 전체를 돌아보았다. 3만이나 주둔하고 있는 평야라 한 바퀴 돌아보는 것만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왜 이러시지?’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자매는 그의 뒤를 따르며 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의아했지만, 답을 구할 순 없었다.

이윽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집단 박투의 기합성이 저 멀리서 들려올 때,

“지금까지 해온 자네들의 노고는 내가 그 누구보다 잘 안다네.”

“저희가 뭘요. 사령관님께서 고생하셨죠.”

보는 사람이 없으니, 말투가 좀 더 편해졌다. 이미 페트릭과 미루, 다루 자매는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끈끈한 정이 들어 있었다. 갑자기 태자께서 떠나시고, 쭉정이나 다름없는 취급과 눈칫밥을 먹어야 했던 여인들의 군대를 필사적으로 지켜온 일등공신 세 사람이 바로 이들이었으니, 서로의 감정은 남다르다.

에비뉴 철의 군대 휘하로 예편되고, 언제 부대가 와해할지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도 계속 돌았었다. 벨버른에선 그나마 좀 나았지만, 다른 곳으로 파병이라도 가면 그곳에서 만난 모든 남자들은 그녀들을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며 더러운 농담이나 지껄여댈 뿐 정식 군대로 인정해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활약할 곳도, 배운 것을 써먹을 무대도 없었다. 집구석에서 밥이나 하고 빨래나 하다가 밤이 오면 충실하게 제 역할이나 하라며 비웃는 사내들의 구박에서 이제껏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내일이면 그분을 뵐 수 있네.”

그 분을 믿기 때문이었다.

술렁.

페트릭의 말에 미루의 가슴이 요동쳤다. 두 손을 모아 가려보지만, 그 속 두근거림을 감출 수가 없었다.

태자께서 혼인하신다 하셨을 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지만, 그것도 잠시. 못 본다고 생각하니, 그게 더 힘들었다. 멀리서나마 그 목소리 한번, 뒷모습 한번 먼 발치에서 눈에 담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태자께선 언제 오실지 기약이 없었다.

그렇게 1년이 훌쩍 지나갔다.

잊으려고 더 독하게 일에 매달려왔던 시간. 덕분에 발키리는 철의 군대와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군기와 무력, 시스템과 기강을 보유했다. 물론 그 사내들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지만..

‘언니..’

미루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다루가 가볍게 그녀의 등을 손바닥으로 쓸어주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그럴 수 없는 게 사랑 아니던가.

“내가 자네들을 따로 청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네.”

페트릭은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내가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느냐마는. 그래서 나는 선택하는데 어렵지 않았지만, 그대들은 다르지.”

그의 눈빛에서 아주 무겁고, 묵직한 어떤 것을 읽은 자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는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하진 않을 것이네.”

페트릭은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나는 그분을 혼자 두었어. 따듯한 방에서 호의호식하며 지냈네. 그분께선 이역만리 타지에서 홀로 서 계시는데, 나는 그 곁을 지키지 못했다네.”

“아..”

이제야 페트릭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자매는 알게 되었다.

“그건 사령관님 잘못이 아니었어요.”

“맞아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그녀들이 위로했지만, 노장의 구멍 숭숭 뚫린 가슴은 시리기만 하다. 함께하자 약속했는데, 기어 올라올 수 없는 나락 밑바닥에서 무기력하게 흐느끼고 있을 때 손잡아 건져 올려주신 분을 내버려 뒀다.

이유?

다 핑계다.

그때, 태자께서 콩가에 계셔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목숨을 걸고 움직여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마음을 좀먹고 기생하던 악마의 속삭임에 굴복한 것이다.

“아니네. 이 비굴하고 늙은 몸뚱이 하나 건사하겠다고 타협한 거지. 나는 몹쓸 사람이야. 신의信義를 충忠으로 보답하지 못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다루는 페트릭을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만 바라보았다. 그가 이제껏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젠 아니할 거네.”

그는 말했다.

“그분 옆에서 죽고, 그분 옆에서 살겠네.”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설령 그분께서 폐하께 칼을 겨눈다 할지라도 나는 따를 것이네.”

“······!”

“······?”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이다. 당장 목이 잘려도 할 말 없는 불충한 말이었지만, 그의 목소리엔 부끄러움이 없다. 아니, 오히려 후련해 보였다.

“내가 자네들에게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네. 그때가 오면 자네들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될 게야. 홀몸이 아니지 않은가? 자네들이 발키리에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다는 걸 아니까.”

그렇다. 발키리 3만 병사는 그녀들에게 친자매나 다름없었다. 모진 시간을 함께 견뎠고, 부족하면 등을 밀어주며 배를 곯으면 함께 버텼다.

“강요하진 않겠네.”

페트릭은 이제 할 말 다 했다는 듯 걸음을 옮기며 웃었다. 그의 자글자글한 눈주름이 밤이슬을 담아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인다.

“······.”

“······.”

자매는 말없이 저편으로 걸어가는 그를 본다.

그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한마디를 더 했다.

“늙은이의 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네.”

그는 후우,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이 밤.

페트릭이 한 말의 여운이 떨어지지 않아, 자매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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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소리.”

번이 가차 없이 말했다.

-왜? 차라리 독립하는 게 낫지 않겠냐? 3만의 군대도 있고, 여기 콩가에도 너를 따르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잖아? 차라리 이 기회에 에비뉴고 뭐고, 네 왕국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지. 언제까지 그놈 그림자에 파묻혀 살 건데?

홀로 걷고 있는 번에게 악마가 계속 말했다.

-답답하지도 않냐?

악마의 말도 일리는 있다. 설명우가 학창시절에 배웠던 역사를 들춰 보면, 어디서 뛰쳐나온 왕자가 나라를 건국해 잘 먹고 잘살았다는 얘기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옛날 얘기일 뿐이다. 저 에비뉴는 고구려와는 차원이 다르다. 여긴 마법이 있고, 정령이 있으며,

‘은사가 있지.’

반기를 드는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잘릴 수도 있다. 어쩌면 철의 군대가 아니라 제국군이 이쪽을 향할 수도 있고 말이다. 황제와 그 측근들이라면 충분히 그런 상황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호오, 아직은? 그럼 언젠간 생각이 있다는 거네?

번은 성큼성큼 왕궁을 빠져나가며 씩 웃었다.

객기로 일을 도모하기엔 위험이 너무 크다. 지난 17년을 악착같이 노력해왔는데, 한 방에 날리면 억울하지 않나? 달걀로 바위를 치는 건 멍청한 짓이다. 태풍이 불고 지진이 나서 세상이 박살 날 때, 누구도 유심히 보지 않았던 작은 조약돌 하나가 자리에 남아 있으려면 경거망동해선 안 된다.

“그래. 언젠간.”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이제 곧 커다란 바위도, 드높은 산도 쪼개지고 산산이 조각날 거대한 폭풍이 몰려올 것이니까.

‘그때까지..’

갈고 닦는다.

-태자 전하!

저 앞에서 노장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뒤로 3만의 발키리가 긴 대열을 이루며 입성하고 있다.

-저어어어언하!

번은 페트릭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늙고 주름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참으로 반짝반짝하지 않은가?

저 까맣고 뜨거운 눈.

그가 품어야 할 조약돌의 정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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