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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143화 (143/177)

# 조약돌로 세상을 깨는 방법 1 #

「아버님! 강녕하신지요? 소자 번입니다! 찾아뵙고 인사 올려야 하나, 먼 거리가 안타까워 오매불망 해질녘 남쪽을 바라보며 속만 태우고 있습니다.」

그 작은 쪽지에 안부를 묻는 말이 절반이 넘었다. 그리고 정작 내용이라곤,

「철의 군대 좀 빌려주십시오.」

이게 전부였다.

“허허허!”

껄껄 웃으며 쪽지를 집정관에게 건네는 황제. 집정관 역시 글을 확인하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니까.’

딱 봐도 알겠다.

철의 군대가 필요한 일은 오직 하나뿐일 테니까.

전쟁.

“이놈이 무슨 생각일까?”

황제는 묘하게 웃으며 집정관에게 물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질 싸움은 하지 않겠지요.”

“그 녀석 성격상 그건 그렇겠지. 근데 밑도 끝도 없이 빌려달라고 하면 뭘 어쩌라고?”

그랬다. 어디에 쓸 건지, 얼마나 필요한지도 적어두지 않고, 그저 빌려달라니.

“이거 나, 간 보는 거잖아?”

황제가 훌훌 웃으며 스캇을 보았다.

“그치? 나 떠보는 거지?”

“저는 아직 무슨 사정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스캇이 농담처럼 말하자, 황제 역시 농으로 받는다.

“우리가 몇 년인데, 대충 눈치껏 통밥으로 때려 맞출 때도 됐잖아?”

“아아, 제가 요즘 나이가 들어선지 눈이 침침해서요. 뵈는 게 없습니다.”

“지금 시비 거냐?”

“그럴 리가요.”

엄살을 떠는 스캇에게서 눈을 돌려 다시 집정관을 보는 황제.

“그 녀석이 콩가에서 얼마나 지냈지?”

“이제 한 1년 반쯤 되었을 겁니다.”

“벌써 그리됐나?”

황제는 자신의 아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제 열일곱쯤 되었을 테니, 더 컸을 게다. 그런데도 황제는 번을 생각하면, 최근의 모습이 아닌, 그때 그 아홉 살짜리 꼬마가 기억이 났다. 쪼그만 녀석이 당차게 대청에서 외치던 그 모습 말이다.

“일을 도모하긴 충분한 시간이지.”

버려둔 거나 마찬가지로 처박아놓고 이런다. 생판 모르는 곳에서 홀몸으로 하루하루 지내는 것도 힘들다 생각하는게 정상이지 않나?

“홀대에 부아가 치밀어 군사를 요청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상황을 지켜보던 대신 하나가 슬쩍 말해 보지만, 황제도, 집정관도, 스캇도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녀석이었으면 거기까지 가지도 못했겠지. 그래도 태자란 이름값은 해야하잖아?”

어쨌든 번은 아직도 공식적인 에비뉴의 태자였다. 최근 좌천됐네! 뭐네 소문이 돌긴 했지만, 황제가 다른 아들들은 눈여겨 보지도 않았고, 인정할 건 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물론 황제의 마음에 드는 녀석도 없거니와, 번이 너무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리라.

-아버님! 소자 왔습니다!

그때, 그 전장에서 녀석이 내지른 목소리가 아직도 가끔 꿈에 나올 지경이니 더 말해 뭐할까.

“요즘 우리 애들 한가하지?”

그의 말에 집정관은 미간을 좁히곤, 황제를 째려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모를 제국의 습격을 대비하는 것 외엔 군사가 따로 쓰일 일은 없지만, 폐하께선 안됩니다. 이 시기에 자릴 비우시면 우린 망해요.”

“에이, 네가 있는데, 망하긴 뭘.”

슬쩍 말을 꺼내 보았지만, 집정관은 입을 꾸욱 다물고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황제를 노려보았다.

그 기세에 목을 움츠리며 어깨를 으쓱하는 황제.

“알았다고, 알았어. 뭔 말을 못 하게 하냐.”

“지금 정세가 어떤지 아시지 않습니까? 행여나 밖으로 나도시는게 알려지면 본진 털리는 건 순식간입니다. 제국 놈들이 병력을 전부 국경에 배치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놈들이 변경백邊境伯, Margrave으로 세운 자도 제국 최고의 무장입니다.”

집정관이 속사포처럼 쏟아내자,

“베르기간트.”

황제는 제국의 무장 이름을 곱씹었다. 그러면서 딘딘을 본다.

“좋은 상대가 될 거야. 그놈이 자타공인 대륙 최고의 무장이라지?”

“······.”

황제의 말에도 묵묵히 듣는 딘딘.

하지만 옆에 있던 스캇이 껴들며, 황제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신성국의 형벌의 망치가 더 고평가되고 있긴 합니다.”

“야, 그놈들은 빼야지. 남의 힘으로 빌어먹고 사는 것들이잖아. 인간적으로 따져야지. 인간적으로.”

형벌의 망치로 불리는 팔라딘은 그 망치가 휘둘러지면 산도 쪼갠다고 한다. 누가 세계 최강인지 순위 매기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형벌의 망치와 제국의 베르기간트를 투톱으로 꼽았지만, 여기 에비뉴의 황제는 생각이 달랐다.

“네가 그놈만 잡으면 최고가 되는 거지.”

딘딘 역시 어디 가서 꿀리는 무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륙 전체로 보면 사실 그의 위명보다는 철의 군대가 더 유명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제국이나 신성국에 비하면 에비뉴는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중앙으로 진출하는 풋내기일 뿐이었으니까.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딘딘의 건조한 목소리에 황제는 쓰게 웃었다. 딘딘이 그런 허명엔 관심이 없다는 걸 아니까. 하지만 그가 어떻게 생각한다 할지라도 나라 입장에선 대륙 최고의 무인을 보유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정치적으로 좋은 것도 없었다.

뭐, 어쨌든 그건 까봐야 아는 거고.

“그래서, 뺄 수 있는 게 얼마나 돼?”

황제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아들이 청했으니, 모른 척 있을 순 없다. 뭐, 사실 그래도 되긴 하지만, 황제는 심심했다.

“보내시려고요?”

“요즘 철의 군대의 활약이 없었잖아. 전설이 되려면 지속적으로 이름이 불려야 한다고.”

“정말.. 그 이유 때문입니까?”

“또 뭐가 있겠어? 나는 자나 깨나, 나라 생각뿐인 사람이라고.”

순진한 얼굴을 가장하며 손바닥을 보이는 황제의 말에 집정관은 입맛을 다셨다. 일단 그가 보내기로 했다면 따르는 것이 신하의 도리.

“거리도 제법 되니, 오천 정도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집정관으로서는 최대한 면을 세워준 거다. 오천이라곤 해도 그들을 보급하려면 먹고 마시고, 보살펴주는 인력까지 붙여야 하니 돈이 제법 든다. 그나마 요즘 레인보우 립을 팔아 재정이 넉넉했으니, 이것도 가능한 거다.

‘설마 여기까지 생각한 건 아니겠지?’

집정관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황제는 손가락으로 코를 후볐다.

“······.”

“······.”

사람 다 보는 자리에서 참..

“그걸 누구 코에 붙여?”

황제는 콧구멍에서 꺼낸 그걸 보며 비웃었다.

“요만한 걸. 남들이 비웃는다고.”

심드렁한 그의 말에 집정관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돋았다.

“철의 군대 오천이면, 다른 군대 이만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웬만한 약소국은 그대로 밀어버릴 수 있는 무력 아닙니까?”

“에이, 그건 그런데.. 명색이 군대가 출정하는데, 오천이면 너무 없어 보이잖아. 그 녀석도 홑몸이 아닌데, 콩가에 내가 쪼잔하게 보일 수도 있고.”

언제부터 그리 자식 생각 하셨다고! 집정관이 발끈하려는데, 황제가 선수 쳤다.

“머릿수만 채워. 머릿수만. 뭐하러 정예를 빼. 마침 적당한 애들 있잖아?”

그의 말에 스캇이 쿡쿡 입을 가리고 웃으며 동조했다.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

집정관 역시 움찔하며 손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탁 쳤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확실히 코나 후비고 있어도 이 남자는 타고 났다. 전쟁을 위해서 살고 전쟁을 위해 죽을 거다.

“애초에 그 녀석이 만든 군대잖아. 걔들 보내.”

벨버른의 그 부대는 점점 더 몸집이 불어나서 이젠 3만을 넘어섰다. 철의 군대에 예편했다곤 해도 거친 남자들과 섞긴 뭐해서 아직도 그대로 두고 있었는데, 하는 일이라고 해봐야 점령국들에서 분쟁이 생기면 진압하는 용도 정도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발키리 부대에게 연락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전부 다 보낼까요?”

“이왕 생색내는 거 그편이 좋지 않겠어?”

황제는 장난스럽게 웃다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종이를 가져와. 그 녀석에게 한마디 해야겠어.”

수발을 드는 사내 하나가 빠르게 대령하자, 황제는 얇은 황토색 종이를 보며 끄덕였다.

“참 잘 만들었단 말이지.”

이 종이가 요즘 에비뉴에선 없어서 못 구하는 그거라지? 뉘 집 자식인진 몰라도 참으로 머리 하난 기똥차게 돌아간다. 어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다 했누.

슥슥 몇 마디 적어, 집정관에게 넘기는 황제. 접지 않았기에 집정관은 자기도 모르게 그 내용을 보았는데, 이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왜?”

황제가 묻자, 집정관은 말없이 종이를 잘 접어 보관하며 생각했다.

‘둘 다 못 말린다니까.’

뜬금없이 돈 몇 푼도 아닌 군대를 빌려달라는 아들이나, 그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따위로 쓰는 아버지나.

하지만 그래서 재미있지 않은가?

몇 년만 지나면 이 둘이 대륙이라는 산의 호랑이가 되어 서로 주인이 되겠다며 포효하고 있을 테니까. 물론 그러기 위해선 저 콩가의 새끼 호랑이가 좀 더 씩씩하게 자라야겠지만 말이다.

.

.

.

「보급은 없다.」

편지에 단 한 줄.

“······.”

번은 어이가 없다. 어이가.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게 새의 다리에 묶여 온 것이 아니라, 에비뉴에서 사람이 직접 들고 왔다는 거였다. 이자에게 물어볼 수라도 있으니 말이다.

“폐하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느냐?”

번이 편지를 손에 쥐며 묻자, 사내는 슬쩍 눈치를 보았다. 에비뉴의 일을 말해도 되겠냐는 뜻이다.

“괜찮다. 이들은 내 사람이다.”

이곳엔 카시오페이아와 피벗 공작이 앉아 있었는데, 에비뉴에서 온 사내는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벨버른에 주둔하고 있는 발키리 3만을 파병하신다 하셨습니다. 이미 지금쯤 그 군대가 벨버른을 떠나 국경을 넘고 있을 것입니다.”

“······.”

그 말에 번이 입을 다물자, 피벗 공작이 벌떡 일어났다.

“3만!”

주변국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 에비뉴에 도움을 청한다고 했을 땐, 큰 기대를 하진 않았었다. 물론, 많진 않아도 에비뉴의 병사들이 어느 정도만 들어와 있으면 설마 공격해오겠나 싶긴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침략자들이 생기더라도 후에 그들이 상대해야 할 것은 에비뉴 철의 군대가 될 테니 일종의 인질이랄까? 얼굴 방패랄까? 딱 그 정도만 예상했었다. 그런데 3만이라니. 이건 전쟁의 판도를 바꿀만한 숫자가 아니던가!

“미치겠군..”

하지만 중얼거리는 번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 모습에 카시오페이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따로 전하신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

번의 예상관 전혀 다르게 일이 흘러가고 있었다.

‘확실히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철의 군대로 5천 명쯤 오면 그들을 이용해 주변국과 정치질 좀 해보려고 했는데, 발키리 3만을 보냈다. 그것도,

「보급은 없다.」

이 편지와 함께 말이다. 이게 무슨 뜻이겠나?

무력이 필요할 때는 가뭄의 단비처럼 고마운 게 군대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군대이기도 하다. 심지어 3만 명이나 되는 거지나 다름없는 여자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싸우라고 등 떠미는 거군.’

번은 황제의 의도를 읽었다.

그는 보낸 3만의 발키리가 전부 죽어도 별 신경을 쓰지 않을 거다. 애초에 그의 군대가 아니었으니까.

번은 이제 안다. 그가 이런 것을 확실히 구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무슨.. 문제 있으세요? 얼굴이 좋지 않으세요.”

카시오페이아가 다가와 번의 등에 손바닥을 대고 묻자,

“아니오.”

번은 에비뉴의 사내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하며 손짓했다. 나가보라는 거다.

“폐하께서 이리도 신경 써 주실 줄 예상 못 해서 그랬소.”

번은 환하게 웃으며 카시오페이아의 손을 잡았다.

-야, 이거 괜찮은 거냐?

‘당연.’

입은 웃고 있지만, 그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까짓거, 싸우라면 싸우지. 어디 한두 번 해보나? 알맹이는 바뀌었지만, 어쨌든 에비뉴에서 3만의 군대가 오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 않겠나?

‘괜찮고말고.’

작은 돌도 커다란 바위로 만드는 기술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솜씨를 발휘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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