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교술 #
-마침 다 모여계신 것 같소?
유리구슬 속 번의 말에 노인이 대표로 나섰다.
“무례하군. 정식으로 절차도 밟지 않고, 이게 무슨 짓이오?”
-거야 공식적일 때나 하는 일이고, 그대들과 다른 이들 모르게 밀담을 하고자 하는 건데, 의향이 없으시오?
번은 다소 거만한 태도였다. 철저한 그의 성격으로 미뤄볼 때 이유가 있으리라. 물론 이쪽에선 그걸 전혀 몰랐으니, 부아가 치민다.
“밀담은 무슨! 당장 통신을 끊어버리소!”
젊은 부족장의 말에 노인이 머리를 흔들었다. 어디, 들어나 보자는 생각이었다.
“외교장이라던데, 당신 누구요?”
-나는 이번에 새로 부임한 콩가 왕국의 외교장이자, 여왕 폐하의 부군이외다.
“아..”
“이 자가 그..?”
“에비뉴의 태자?”
“드래곤을 부렸다던?”
이미 번은 주변국에도 제법 알려진 인물이었다. 얼굴은 몰랐지만, 그에 대한 소문은 파다했기 때문이다.
부족장들이 술렁이자, 노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뗐다.
“할 말이 있다면 해보시구려.”
평소라면 상대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국제정세가 묘했다. 심지어 여왕의 최측근이니 그의 속내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폴라리스는 예로부터 기마술이 뛰어나고, 초원에선 그 어떤 강병도 상대가 안 된다 들었소. 맞소이까?
번의 말에 젊은 사내가 팔짱을 끼곤, 크게 끄덕였다.
“그럼 당연하지! 알긴 아는군!”
그의 얼굴이 다소 풀어진 것 같다. 칭찬에 약한 것은 어느 나라나 공통이다.
-나흘 거리도 하루 만에 주파하고, 마창도 잘 다루며 심지어 달리는 말 위에서도 백발백중으로 활을 쏜다지요?
“아무렴!”
계속된 칭찬에 젊은 사내가 웃으며 호쾌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노인은 경계한다.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이 뭐요?”
-페르나를 치시오.
“.......?”
“.......!”
“뭐, 뭣이?”
부족장들이 황당한 듯 눈을 크게 뜰 때, 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국만 우리를 도와주면 이번 전쟁을 이길 수 있소.
“전쟁이라 하셨소?”
-왜? 그러려던 거 아니었소?
“.......”
그래, 분명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긴 했었다. 하지만 다섯이 뭉쳐 하나를 치자고 했던 거지, 적국에서 손을 잡자 말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일이 문제일 뿐 전쟁은 벌어지게 되어 있소. 이런 상황에서 챙길 걸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소? 우두머리가 감정에 치우치면 고생하는 건 아랫사람들이오. 냉정하게 돌아보시오.
“왜.. 우리에게 연락한 거요?”
말을 잘 타서? 기동력이 좋아서? 아니면? 오만가지 생각에 노인의 눈매가 좁혀졌는데, 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디든 상관없었소.
“······?”
“상관없다?”
“그게 무슨 소리오?”
부족장들의 말에 번은 씨익 웃었다.
-귀국이 거절하면 나는 페르나에게 연락할 것이고, 그래도 거절당하면 투탄에 할 거요. 누군가는 우리와 손을 잡지 않겠소? 다섯이나 되는데.
“허어..”
노인이 기막혀하자, 번은 추가로 덧붙였다.
-나는 지는 싸움은 하지 않소. 아버지께 그리 배웠거든. 내가 분석한 바론, 다섯 왕국에서 하나만 우리와 손잡으면 승산은 90%까지 올라갈 거요.
“둘이 넷을 이긴다는 거요?”
-하나가 다섯과 싸운다고 해도, 승률은 50% 이상이니 걸어볼 만하지.
“자신감이 지나치군. 보통은 그런 걸 객기라 하는데.”
-오만일지 실력일진 붙어보면 알게 될 거 아니겠소? 물론 그걸 옆에서 볼 건지, 아님 마주 볼건진 귀국의 결정에 달리겠지만.
“에비뉴를 그리 믿는다면 큰코다칠게요.”
-내 코는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 그대들 거취나 따져보시구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연락하겠소.
번이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을 끊으려하자, 젊은 부족장이 급히 자리를 이동했다.
“기다려!”
노인의 옆에 바짝 붙어 다급하게 말하는 사내. 유리구슬 속 번이 그를 마주했다.
-기다렸소만?
번이 웃으며 말하자, 젊은 부족장은 가슴을 쿵쿵 치며 물었다.
“정작 중요한 것을 빼먹었지 않소?”
행동이나 생긴 것관 다르게 참으로 머리가 잘 돌아간다.
“이거 여왕도 아는 사실이겠지?”
-물론.
“그리하면 우리가 얻는 게 뭐요?”
-흐음.
번은 의외라는 듯 사내를 바라본다.
-원하는 게 있소?
“적어도 두 개는 먹어야지. 그 고생을 하는데.”
-불가不可.
번의 단호한 대답에 사내는 입술을 혀로 축이더니, 슬쩍 눈치를 본다.
“하나 반은..?”
그 모습에 옆의 노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상의해보겠소. 본래는 동맹국에게 원하는 점령국을 하나 줄 생각이었소.
번 역시 삼키지 못할 것을 억지로 삼키면 탈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후 처리를 다른 국가와 나누려고 하는 것인데, 사실 번의 노림수는 이번 전쟁이 아니라 그 이후였다.
설령 콩가가 주변국을 모조리 복속한다해도 그 경사는 잠시일 뿐, 그때부턴 대륙의 열강들에게 표적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런 배경까진 생각하진 못했는지 젊은 사내는 주변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 덕에 좋은 조건을 따냈지 않소? 라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이다.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이만 하겠소. 이쪽도 준비할 일이 많아서 오래 시간을 낼 수가 없소이다.
번의 말에 젊은 사내가 말했다.
“내 이름은 우라칸이오! 들었소?”
-들었소이다.
“꼭 기억해두시오. 당신과 무기를 맞대든, 손을 잡든 어느 쪽이든 날 잊지 못하게 될 테니까."
그의 자신만만한 말에 번이 웃으며 끄덕였다.
-기억하지.
통신이 끊겼다.
“······.”
“······.”
부족장들은 잠시 침묵속에 서로를 바라보며 이 사태를 어찌 수습할지 고민했다.
분명 콩가에서 내건 조건은 좋아 보였다. 하나든, 하나 반이든 하나하나를 통째로 얻을 수 있단 자체로 폴라리스 역사상 가장 큰 기회가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더 생각할 필요 있소? 까짓거 합시다! 페르나나 투탄만 얻어도 우린 살판 나는 거 아니겠소?”
유목 특성상 넓은 영토가 필요한데, 페르나의 광활하고 비옥한 토지나, 투탄의 입지면 폴라리스 백성들은 만세를 부를 거다.
“아까까진 콩가 계집들 속살이 어쩌고 하더니..”
“거야 그냥 해본 말이고. 내가 보기엔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게임인 것 같은데, 어찌들 생각하시오? 우리가 후방에서 지원만 해줘도 콩가와 우리 사이에 낀 다른 나라들은 꼼짝을 못할 것 같은데?”
참으로 예리했다.
번이 무작위로 아무 곳이나 찍어 통신을 연결한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폴라리스와 편을 먹는 것이 콩가에겐 가장 좋았다. 샌드위치처럼 덮을 수 있기에, 그사이에 낀 국가들은 병력을 분산할 수 없을 테고, 혹시 모를 침공에 대비하려고 예비 병력을 수도에 빼둬야 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폴라리스 기마병의 기동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만큼 치고 빠지기에 특화되어 있어 게릴라 작전을 펴기에도 아주 좋았다. 콩가가 한 마리 호랑이처럼 진군하면, 늑대무리가 되어 사방에서 적을 물어뜯기엔 최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으음..”
분위기가 한쪽으로 쏠려가자, 노인은 말했다.
“저 자를 믿을 수 있을지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랬다. 이런 이간질 계책은 한 사람 말만 믿고 따라가기엔 위험이 너무 크다. 심지어 콩가의 여왕도 아닌, 그 아랫사람 아니던가?
“믿고, 말고 할 게 있소? 여왕의 남편이자, 에비뉴의 태자인데?”
“하긴.. 그것이 가장 확실한 증명이긴 하지요.”
“이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군요.”
부족장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콩가 쪽으로 마음이 기우나 보다.
“4대 2라..”
두 배의 적과 싸워야 하는데, 90%의 승률을 주장하는 저 어린 친구의 말을 어디까지 동조해야 하는진 모르겠지만, 그가 보여준 말투나 표정, 목소리에선 분명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게 부족장들에게도 전해져 이리 호감을 보이는 것일 터. 특히나 우라칸은 저 에비뉴의 태자가 아주 마음에 든 모양이다.
“듣자하니 전쟁 경험도 많다 하던데, 다리 성한 말을 잘 골라 타야 멀리 갈 수 있지 않겠소?”
유목민들 사이의 속담을 빗대며 우라칸이 말하자, 부족장들이 끄덕였다.
결국 노인은,
“하아..”
한숨을 쉬더니 말한다.
“일단 하루 시간이 있으니, 더 고민해봅시다.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니까.”
“그럽시다!”
“여봐라! 여기 냉수 좀 내오거라!”
아무래도 오늘은 집에 가기 힘들 것 같다.
.
.
.
“정말.. 전쟁을 하시려는 거에요?”
번이 유리구슬에서 물러나자, 뒤에서 보고 있던 카시오페이아가 물었다. 걱정 가득한 그녀의 표정에서 뭘 우려하는지 엿볼 수 있었다.
번은 그녀에게 다가가서 가볍게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대비는 해야 하지 않겠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코 베이는 것보단 나을 테니 말이오.”
“하지만.. 폴라리스와 우리는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함께 한 적이 없어요.”
“그게 무슨 상관이오? 이제부터 알아가면 되는 것을. 어제의 적도 오늘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소?”
번은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그리고 동물 좋아하는 사람 치고, 악한 사람 없다잖소?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 한다면 그들이 나을 거요.”
그녀를 이끌며 방을 나서는 번.
“당신이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하게 되는 최초의 여왕이 되는 거라오.”
자긍심을 심어주려 했지만, 그녀는 번의 힘에 이끌리면서도 얼굴을 흔들었다.
“저는 나라가 작아도 백성들이 행복했으면 하는 걸요.”
번이 웃었다. 카시오페이아의 따듯한 마음씨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맞소만, 그래도 거거巨巨익선이라 하지 않소?”
“그런 말은 처음 듣는 걸요?”
“하하! 그럴 수밖에. 방금 내가 만들었으니까.”
“피..”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오. 감자 하나, 옥수수 하나 더 심을 땅이 있다면 백성들도 풍요롭지 않겠소? 앞으로 시행할 토지개혁도 많은 국토가 보장되면 좁은 땅에서 아웅다웅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현 농민들은 대부분 영주의 땅에서 소작농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그들은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 때부터 한 곳에서 나고 자라 평생을 노예처럼 일하다 그 땅에 묻혔다.
이 과정에서 중산층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고, 부자는커녕 내일 먹을 밥 한 끼를 걱정하고 살아가야 했다. 모든 부는 오직 귀족에게만 집중되는 현 시스템을 번은 바꾸려 한다.
마치 미 서부개척시대의 그것처럼.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것을 위해 그리 큰 모험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될 거요. 내가 언제 틀린 말 한 적 있소?”
“그건 그렇지만..”
“갑시다.”
번은 웃으며 그녀를 이끌었다.
그런 그에게 악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폴라리스 하나 얻는다고 정말 이 전쟁이 그렇게 높은 승산이 있는 거냐?
‘그럴 리가 있겠냐?’
번은 카시오페이아가 눈치채지 못하게 웃었다.
-뭐야? 또 거짓말 한 거냐?
‘거짓말은 아니지. 우리가 이길 거니까.’
-어떻게?
‘한 가지만 더 있으면 돼.’
폴라리스는 아마 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틀어진다고 해도 다른 나라들과 교섭을 해볼 생각이었고. 전쟁 후 반반씩 나누는 조건이라도 걸면, 어느 하나는 덥석 물지 않겠나?
-그게 뭔데?
‘곧 알게 될 거야.’
번은 저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 한 마리가 창공을 비행하고 있다. 저 녀석처럼 지금 이 순간, 콩가를 떠난 매 한 마리가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를 무적으로 만들어줄 만능열쇠.’
어차피 그의 눈을 피할 수 없다면, 더 뻔뻔하게 나가는 편이 좋을 테니까.
매는 날았다.
녀석의 가느다란 다리엔 쪽지가 묶여 있었는데, 그건 국경을 넘어 에비뉴 수도로 향했다. 관리자는 매를 확인하자마자 쪽지를 들고 뛰었다.
황궁.
대청에서 무료한 얼굴로 황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사내는,
“..그 녀석이 보냈다고?”
몸을 일으키며 쪽지를 받아든다.
“예, 폐하. 조금 전 도착한 서신이옵니다.”
거칠게 펴서 스윽 눈으로 한번 훑은 황제.
“호오라?”
쿠웅!
그의 두 발이 거칠게 바닥을 쳤다.
자세를 바로 한 그가 눈을 크게 뜨고 쪽지를 다시 훑자, 대청에 있던 대신들은 불안한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는데,
“우하하하-!”
광소를 터뜨리는 황제.
“이놈 보게!”
대신들은 그 황제의 웃음이 폭풍이 오기 전, 우르르르르릉! 하늘에서 요동치는 천둥과 비슷하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