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41화 (141/177)

# 이런 거지 2 #

“대공께서 나설 자리가 아니외다.”

오메가 백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나 번의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마 이리 생각할 것이다. 남작은 젊고 혈기 왕성했으니 주먹다짐을 했지만, 백작처럼 나이 지긋한 노인에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여러 삶을 살아온 번에겐 그런 구분이 무의미하다.

“······.”

번이 눈을 부라리며 성큼 앞으로 다가서자, 오메가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맞는다.’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지만, 어쩌면 그게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 자체가 무서운 거다.

“착각하나 본데.”

번이 주먹을 쥐고 백작과 사람들을 둘러보며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여왕 폐하 아래 모두가 평등한 거요. 아시겠소?”

애의 철없는 행동이나 노인의 꼰대 짓이나 잘못하면 벌을 받아야지? 안 그래? 라는 눈빛에 오메가 백작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이 자가 약을 먹었나?’

요즘 제국에서 마약 때문에 골치를 앓는다더니 그런가?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변한 것을 보면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싶은거다.

그만큼 번의 모습은 파격이었다. 이제까지 여왕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살며 과묵하게 자리만 지키던 그였는데, 오늘은 아주 이상했다. 남작을 때려 패질 않나 오메가 백작에게 막말을 쏘아붙이질 않나 말이다.

“심기가 썩 좋지 않아 보이는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시는 게 어떻소이까? 대공.”

오메가 백작은 최대한 참는 중이다. 여러 사람 보는 앞에서 체통을 잃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이 그의 마지막 이성을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이시오?”

번은 피식 웃으며 코웃음 쳤다. 그리곤 경고하듯 말했다.

“내, 오래전부터 당신들이 여왕 폐하를 무시한다는 얘길 전해 듣고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소이다. 한데, 오늘 보니 아주 가관이 따로 없군. 당신이 원흉인 것 같은데,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왕권을 흔들려는 의도가 뭐요?”

왕이 바로 서야 나라가 곧게 서고, 잘 굴러간다. 그러나 그 뿌리부터 썩으면 망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원흉이라니! 말조심하시오! 대공! 누, 누가 왕권을 흔들고 있다는 겁니까?”

“당신이 지금 그러고 있질 않소?”

번은 거침이 없었다.

“이따위 분위기를 조장하여 감히 여왕 폐하를 위축시키고, 사리사욕을 챙기려는 그 속셈을 내가 모를꺼라 생각하오?”

“그.. 이..!”

기막혀 말도 잇지 못하는 백작.

번은 입술을 비틀며 그에게 바짝 다가섰다.

“흐음.”

숨소리가 백작의 귓가를 간질였다.

“두 번은 없소이다. 국법으로 다스릴 거요. 아시겠소?”

"······!"

속삭이듯 하는 말이었지만, 주변에 퍼질 정도는 되었다.

이 세계는 구체화 된 헌법이란 게 없기에 그저 갖다 붙이면 그게 법이 된다. 꼬투리를 잡고자 하면 얼마든지 백작을 천하의 간악무도한 놈으로 둔갑시켜 목을 잘라버릴 수도 있는 거다. 물론, 그의 위세가 대단하여 그렇게까진 못하겠지만, 수모는 충분히 줄 수 있으리라. 여왕이 그럴 의지만 있다면 말이다.

“······.”

“······.”

두 사람이 고작 한 뼘 정도의 공간만을 두고 노려보자, 대청은 질식할 것 같은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자, 대청에 나긋나긋한 카시오페이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상공.”

번이 뒤를 돌아보자,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요.”

이 정도면 충분히 그녀에겐 도움이 되었다. 번 역시 그제사 끄덕였다. 그런데 굳이 한마디 더 붙이며 물러선다. 아직 백작의 기가 완전히 죽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왜 말리시오? 기강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을. 한두 놈 목만 자르면 다들 알아듣지 않겠소?”

그 말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을 손으로 감쌌다. 번의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시오페이아는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요. 그게 꼭 필요하다면. 하지만 지금은 폭력을 보고 싶진 않네요.”

나중에란다. 나중에.

“허허..”

오메가 백작이 황당해서 웃고 마는데, 번이 머리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에비뉴가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협잡과 모략을 일삼는 간신을 전부 잡아 죽였기에 가능했던 거요. 왕실이 빠른 결정을 내려야 백성이 평안한 법이라오. 이곳의 하루는 밖의 백 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니까.”

번의 말에 오메가 백작은 ‘그러니까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것이지 않소이까!’ 외치고 싶었지만, 아직도 머물고 있는 번의 시선에 입을 꾹 다물었다. 미친 자를 상대해봐야 남는 것은 후회뿐일 거다.

“에비뉴가 에비뉴의 방식이 있듯, 우리 또한 역사와 전통이 있답니다. 콩가는 폭력보다는 대화로 모든 일을 해결해왔어요. 다소 피곤한 방식일지 몰라도 아무도 다치지 않는 유일하고 현명한 처사이기도 합니다.”

카시오페이아가 조곤조곤 말하자, 대신들이 크게 끄덕였다. 번이 채찍이라면 그녀가 당근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무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아주 자연스럽게!

“이제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우린 잘 이겨낼 것이랍니다.”

그녀의 말에 번이 팔짱을 끼며 흐음. 그녀의 옆에 섰다.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거든 말씀만 하시구려. 가끔은 남의 손을 빌려야 편한 때도 있는 거요. 똥통이 가득 찬 것을 그 고운 손으로 직접 치울 순 없지 않소?”

기어코 누구 하나 잡아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얼굴로 아쉬움에 쩝, 입맛을 다시는 그의 모습에 대청이 술렁거렸다. 이런 오만무도한 놈! 삿대질하며 따지고 싶은데, 괜히 나섰다가 본보기가 될 것 같아 그러지도 못했다.

-외조 한번 기막히게 하는구나!

번이 입을 다물자, 악마가 키득댔다. 이 모든 것이 전부 번이 의도한 것이란 사실을 아는 것이다.

말투 하나, 눈빛, 표정, 걸음걸이까지 계산하고 움직인다. 이제 대신들은 카시오페이아에게 어떤 말을 할 때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거다. 번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짝!

경쾌한 박수가 카시오에피아의 손에서 터졌다.

“잠깐 옆길로 얘기가 샜네요. 자! 오늘 안에 끝내봅시다! 우리 어디까지 했죠?”

말을 하는 그녀의 표정이 아까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

.

.

화약고라는 말이 있다. 작은 불똥만 튀어도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리는 위험천만한 곳을 두고 빗댄 말인데, 지금 콩가를 사이에 둔 주변국 분위기가 그러했다.

「우리는 이번 사안에 대해 어떠한 잘못도 없으며, 당연히 책임을 질 이유도 없다. 민심은 하늘도 막을 수 없는 것인데, 마음이 떠난 그들을 돌려보낸다 한들 무엇이 나아지겠는가? 정 원하거든 와서 직접 데려가던가, 떠난 백성들에게 돌아오라 부탁하라. 단, 그들을 잡고자 일정 수 이상의 사람이 국경을 넘을 때는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콩가 왕실이 공식적으로 주변국에 전달한 메시지였다.

“이런 미친년이..?”

7개의 소수민족이 모여 하나의 나라를 이룬 폴라리스 왕국은 왕 대신 7명의 부족장이 나라의 대소사를 회의로 결정하는데, 공식적으로 위아래가 없다 보니 다른 곳보다 언행이 자유롭다.

“끌끌.. 그 어린 것이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나 봅니다.”

“고것이 그렇게 예쁘다지요? 입에서 살살 녹겠네, 아주 그냥..”

콩가 제일 미녀라는 카시오페이아 여왕을 상상으로 그려보며 군침을 흘리는 사내도 있었다. 유목을 하며 거칠게 살아가는 부족답게 여자는 그저 소유물 정도로만 인식한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다 같이 병신 취급당했는데, 이참에 확 밀어버리는 건 어떻수? 콩가 계집들 속살이 그렇게 야들야들하다던데.”

“부인이 아홉이나 있으면서 그 생각밖에 없소?”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수? 하하하!”

호전적인 그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에 나이 지긋한 다른 부족장이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그가 나서야 할 때다.

“우리 전부가 합쳐도 콩가를 당해내진 못할 거요. 소식 듣지 않았소? 그들은 저 에비뉴와 동맹을 맺었소. 여차하면 철의 군대가 우리 쪽으로 기수를 돌릴 수도 있소. 그 전쟁광 황제는 그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고.”

“으음, 에비뉴라.”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

“그 작자라면 그러고도 충분하지.”

확실히 노인은 살아온 세월답게 사리에 밟았다. 흉흉하던 분위기를 단박에 차분하게 만드는 방법도 알고 있었고.

하지만 젊은 혈기 역시 만만치 않았다.

“에비뉴가 뭐라고 이리 겁내는 거요? 그들이 쉽게 움직일 수나 있겠수? 제국과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돌던데? 병력을 빼고 움직이는 순간, 놈들은 제국 군대를 수도에 들이게 될 거요. 그 철의 뭐시기가 아무리 대단하다곤 한들, 양쪽을 다 상대할 순 없을 테니까.”

“호오.”

“그것도 맞는 말이구려.”

외형이나 성질머리답지 않게 머리는 제법 잘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리고 우린 다섯 아니우?”

억양이 강해서 그런지 그의 말투는 더욱 천박해 보였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진실한 느낌을 주었다.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고 마음에 담은 말 그대로 뱉어내는 순박한 모습이랄까?

“그들도 아마 우리와 같은 기분 아니겠냔 말이우. 그 계집 말을 듣고 참으면 그게 등신이지, 사내요? 불알을 때버리라지!”

다섯 나라가 뭉치면 콩가 하나 찜쪄먹는 건 문제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게 쉬웠다면 지금까지 이러고 있었겠나? 당장 폴라리스만 해도 주변국과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나마 우린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노인이 고민하듯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다른 왕국들은 분명 짜증이 한껏 올라있는 상태겠지.”

소나 말, 염소 같은 가축을 키워 살아가는 폴라리스 백성들은 이번 사태에도 큰 인력손실은 없었다. 가축들이 몬스터에게 당하긴 했어도 워낙 떠돌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다수라 신도시에 정착할 엄두도 내지 못한 거다.

“그걸 잘 이용할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순 있을 듯 보이오만.”

노인의 말에 의견은 반으로 갈렸다.

“쉽진 않을 겁니다. 다섯이 모인들 그 안에서도 누군가 정권을 잡으려 할 텐데 벌써부터 그 꼴이 선해 치가 떨립니다.”

“하지만 콩가를 나눠 먹을 수만 있으면 제국과 직통으로 길이 열리는 셈이 되니, 우리에겐 참으로 좋은 기회가 될 것은 확실하오. 콩가의 비옥한 목초지도 손에 넣을 수 있고.”

동물 가죽이나 젖이 제국에서 좀 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생각해볼 문제요.”

이들이 각자의 의견을 계속해서 내고 있을 때, 20여 분쯤 지났을까? 문이 벌컥 열렸다.

노인이 눈매를 찌푸렸다. 뻔히 부족장 회의를 하는 것을 말면서도 어느 놈이 겁도 없이?

돌아보았는데 젊은 사내의 표정이 심상찮다.

“무슨 일이냐?”

일단 연유를 물어본다.

“마법 통신이 왔습니다!”

뭐? 어디서? 라는 시선들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회의 중이란 걸 모르더냐?”

“아, 알지만 그쪽에서 오래 기다릴 수 없다 하여 급히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노인은 쯧, 혀를 차며 물었다.

“신성제국에서라도 온 것이냐?”

당연히 일절 제국관 교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이리 호들갑을 떠느냐는 핀잔이었다. 그런데 사내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가볍게 굳었다.

“콩가의 외교장이란 사람입니다!”

외교장? 콩가?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에 부족장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노인이 사내에게 말했다.

“가져오라.”

“예!”

이미 준비했는지 사내의 뒤에서 다른 사내가 어른 머리통만 한 구슬을 천에 감싸 들고 왔다. 그걸 부족장들이 앉은 테이블 중앙에 놓고 꾸벅 인사한 뒤 물러난다.

구슬이 푸른 빛을 발광하기 시작하자, 그 안에 어떤 이의 상이 맺혔다.

아주 젊은 사내.

-안녕하시오.

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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