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40화 (140/177)

# 이런 거지 1 #

“남쪽에 있다던 마녀들은 연락이 닿았나?”

번이 묻는다.

융은 끄덕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면서 한쪽에 준비해둔 도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돌돌 감겨 있는 가죽을 풀자, 얇고 긴 바늘이 수백 개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이걸 바늘이라 할 수 있나? 길이만, 두 뼘이 넘었다. 실을 끼울 수 있는 코도 없고 말이다. 이건 차라리 비수나 흉기로 불러야 맞을 것이다.

그 중 하나를 조심히 쥐고는, 융이 번의 앞에서 말했다.

“시작할게요.”

끄덕이는 번의 가슴에 바늘을 느리게 찔러넣으며 말하는 융.

“녹색 마녀들 엉덩이가 무겁다는 건 소문이 자자하지만, 그들도 구미가 당길 조건이니 무시하진 않을 거예요.”

스으윽.

바늘이 들어갔다.

명치로 들어간 그건, 등을 뚫고 삐죽 튀어나올 정도로 깊이 박혔다. 하지만 번은 눈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바늘 끝이 근육을 가르고 폐를 통과했지만, 쇳소리도 내지 않았다.

사람의 몸은 참으로 놀랍다. 환경과 고통에 금세 적응하니 말이다. 더구나 번의 육체는 일반 사람과 비교할 수 조차 없었다. 이 80개의 바늘이 몸을 난자해도 멀쩡하게 서 있으니 말이다.

번은 이런 과정을 거쳐, 몸은 상처에 더욱 단단해졌고, 장기는 반복되는 훈련 속에 강인해져 갔다. 전엔 이렇게까진 하지 않았는데, 황제에게 뒤통수를 맞은 뒤론 더욱 몸을 혹사키시고 있었다. 겉도 모자라, 솥에서 독기까지 흡수하며 속까지 단련하는 그의 처절함은 오직 융만 알 뿐이었다.

“우리에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어떻게든 성사시켜. 그들이 필요해.”

“노력하고 있어요.”

마녀라도 쓸모가 있으면 거둔다. 번은 도움이 된다면 세상의 편견 따윈 가볍게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남부의 녹색 마녀들은 그런 그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뭐, 그녀들이 따라줘야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실패따윈 애당초 예상범주에 넣지도 않은 번이었다.

“레인보우는 어때? 판로는 확보했나?”

물음에 융이 바늘을 번의 허리에 찔러넣으며 답했다.

“원하는 이들이 많아, 어디에 내놔도 팔리고 있어요.”

“꼬리를 밟혀선 안 돼.”

저번 같은 일을 또 겪을 순 없다.

“의심할 생각도 못 할 거예요. 에비뉴의 그것과 완벽히 같은 제품이니까. 우리가 물건을 넘길 때도 에비뉴의 것이라 말하고 있고요.”

카시오페이아를 통해 콩가 왕실의 돈을 빼돌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드래곤의 부산물을 조금씩 팔아 이 시설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머잖아 바닥을 보일 것이다. 해서 돈이 필요했는데, 국경 넘어 제국으로 마약을 보내고 있던 것이었다.

이미 제국은 에비뉴에서 뿌린 마약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런 혼란 속에 슬쩍 묻어가려 한다.

“그래.”

번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침묵 속에서 융이 바늘을 계속 번의 몸에 꽂았다. 이윽고, 고슴도치처럼 변한 번이 눈을 뜨자 융이 말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저번엔 여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오늘부턴 여기에 더해, 다른 방식을 도전해볼 생각이었다.

“걱정 마.”

“······.”

아무리 번이 튼튼하다는 걸 알고 있어도 이건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시키는데 해야지. 그녀가 하지 말란다고, 안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다른 사람 손에 이루어질 일이라면, 맡기느니 직접 하는 게 낫다 생각한다.

융은 이리저리 다니더니, 여러 물건을 가져왔다. 정령력을 막대에 담아둔 매직 아이템이 색색별로 있었고, 한눈에 보아도 사람에게 치명적일 것 같은 불길한 상자에 담긴 어떤 나뭇가지도 있었다.

“할게요..”

“하라니까.”

"휴..."

융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금색 막대를 집어 들었다. 이것엔 번개 속성의 힘이 담겨 있었다. 이걸 작동시켜 바늘에 대면, 번은 전기로 몸을 지지는 것 같은 고통을 외부뿐 아니라 뼛속까지 느낄 거다.

“······.”

타인에게 고통을 주며 쾌락을 느끼는 부류가 이 일을 하고 있다면 생각만으로도 오르가슴의 절정에 이르겠지만, 융의 손은 떨린다.

파지지직.

이내 막대 끝에서 금빛 스파크가 튀었다. 그리고 그게 번의 몸으로 접근하자, 바늘이 노란빛을 끌어당겼다.

그 순간,

바르르르.

이제껏 꿈쩍하지 않던 번의 몸이 떨렸다.

「전격을 흡수합니다.」

「타버린 세포를 재생합니다.」

「오색 마나가 반응합니다.」

「전격에 대한 내성을 생성합니다.」

그랬다.

번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각 속성 마나를 몸속에 주입하고 있었다.

“괘, 괜찮아요?”

“계속해.”

"하아.. 네."

이미 자포자기한 그녀가 다시 손을 뻗는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몇 번이고 경악할 만한 일. 하지만, 그의 기행은 이제 막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었다.

.

.

.

사람이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까?

검을 50년간 수련한 어느 유명한 기사는 이런 말을 했다. 무도엔 끝이 없으니, 어느 순간 적당한 지점에서 타협을 때가 올 것이라고.

배움이 그러하듯,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과 욕망 역시 한계가 없어서, 앞서간 자의 조언도 가볍게 무시하기 일쑤였는데, 이런 자들의 특징은 호승심이 남다르다는 것이었다.

“크허허헉..!”

끊임없이 내가 이룬 성취를 확인하며 지금 내가 선 곳이 어디쯤인지, 남들에겐 어떤 시선으로 비치는지 알고 싶어하는 마음. 그런 자 중 하나가 지금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쯧.”

처음엔 가벼운 시비로 시작했다.

대청에서 싸움이 발생한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사건이었지만, 번은 행동했고 결과가 나왔다.

동부 최고의 기사로 소문이 자자한 데런 남작은 지금, 팔을 붙잡고 고통 어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아마도 팔이 부러진 것 같다.

“그대의 날카로운 말솜씨에 비해 몸은 참으로 부실하군.”

번의 싸늘한 말이 그를 부들부들 떨게 했다. 조금 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당했으면서도 모르겠다. ‘무엄하다!’ 외치며 날아오는 손을 분명 막았다 생각했는데?

“이이익!”

그가 벌떡 일어나 다시 번에게 달려들려고 할 때, 왕좌의 카시오페이아가 중재를 나섰다.

“두 분 모두 그만 하세요.”

오늘따라 그녀의 말에 계속 딴지를 걸어대는 남작을 시원하게 밟아준 번은 웃으며 끄덕였다. 무력시위를 했으니 당분간 조용하겠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카시오페이아가 그런 번을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 머리를 흔들다 대신들을 보며 말했다.

“남작은 어서 빨리 치료받도록 하세요. 하아.. 또 한 해가 갔어요.”

번은 이제 열일곱 살이 되었다.

물론, 그를 그 나잇대로 인식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하지만 우린 여전히 작년과 마찬가지로 의견을 모으고 있지 못하고 있군요.”

하루가 지날수록 이제 왕실의 후사를 정해야 한다는 ‘세손파’의 입김이 강해지고 있었다. 저 남작도 아마 그런 이들 중 하나거나, 그들의 꾐에 넘어가 오늘과 같은 일을 벌였을 거다.

“우리가 흔들리면 백성들이 불안해합니다. 제가 못마땅하신 분도 계실 테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녀의 말에 노인 하나가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데런 남작은 그저 걱정되어 충언한 것일 뿐일 겁니다.”

세손파의 중추나 다름없는 저 노인은 웃는 낯이었지만, 목소리는 따가웠다. 꼬장꼬장한 그의 외형에서도 알 수 있듯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성격이 그대로 묻어났는데, 그가 바로 콩가 왕국에서 가장 부자로 알려진 오메가 백작이었다.

후작도 아니고, 공작도 아닌 백작이 그런 부를 거머쥐었다는 것 자체로도 그의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세를 지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는데, 세손을 정해야 한다는 것도 그의 딸과 혼인한 왕의 장남이 아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직계 혈통에 외가의 권력까지 막강하니, 이제 8살이라고 해도 5년만 지나면 왕좌에 충분히 앉을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것이다. 당연히 그전까진 누군가 곁에서 지극 정성으로 보좌해야겠지만 말이다.

섭정攝政. 혹은 대리청정代理聽政.

잠시라도 그 자리에 앉아보고 싶은 꿈. 늙은 육신 땅으로 돌아가기 전 이뤄보고 싶은 마지막 욕심이었다.

“우리가 전쟁에서 이긴다 한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더 곤란해지는 상황에 부닥칠 것입니다.”

오메가 백작이 회의적으로 말했다.

“어째서 그렇죠?”

그녀의 말에 오메가 백작은 주변 사람들을 보았다. 사람들의 동의를 얻으려는 거다.

“지금이야 여섯으로 쪼개져 있으니 안중에 두지 않고 있지만, 이것이 하나로 합쳐지면 제국도 무시하진 않을 것이니까요.”

“그건 우리 콩가의 위상이 올라간다는 뜻이며, 그간 당했던 설움을 갚아 줄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게 왜 잘못되었단 것입니까?”

오메가 백작은 답답하다는 듯 카시오페이아를 보며 대답했다.

“그건 우리 처지에서 하는 생각이지요. 저들은 사냥하려 할 것입니다. 뒷산에 늑대 몇 마리가 있을 땐 귀찮기도 하고 언젠간 처리해야지 생각하며 미루기도 하지만, 호랑이가 나타나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대도 우리가 호랑이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군요?”

“비유일 뿐입니다. 그렇다 한들 짐승 아니겠습니까? 언제든 잡아 죽일 수 있는 무지한 동물이지요.”

“······.”

얄밉게 돌려 말하는 오메가 백작을 카시오페이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 아랫사람이 기어오르는 적당한 상한선을 늘 염두에 둬야 하고, 필요에 따라선 단호하게 내쳐서 다시 올라오지 못하도록 떨어뜨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지금은 참 애매했다.  특히, 그녀가 여인인 탓에 그 경계가 모호할 때가 많았다. 지금처럼 늙은 대신이 충언을 가장하여 훈계하듯 말하면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여왕을 깎아내린다고 할지라도 대놓고 나무랄 수 없는 것이다.

‘짐승이라니..’

지금도 보라.

대신들 또한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그들로선 나설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여왕이든, 백작이든 한쪽이 이기면 거기에 편승하는 것이 가장 쉬울 테니 말이다. 괜히 어느 쪽에 붙었다가 망하면 같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모험을 할 필요도 없었고.

그만큼 지금 상황은 서로의 반대편이 뚜렷하게 보이는 형세였다. 대부분이 중립을 유지하는 상태였는데, 안타깝게도 여왕의 곁에 선 사람은 그리 많은 수가 아니었다. 최초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은 값졌지만, 무엇이든 처음은 어려웠으니 그녀의 고충이 알만하다.

“저들이 다소 오만방자하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다곤 해도, 그것을 전쟁으로 풀어선 안 되는 것입니다.”

최근 국경의 분쟁이 잦아지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도 몬스터가 간간이 출몰하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날카로워져 갔다. 안정감이 사라지기 때문이리라.

또한 그 때문인지 범죄 발생률도 높아져 갔고, 서민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져만 갔는데, 문제는 국경 인근의 사람들이 콩가의 5개 신도시에 모여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세븐 스타는 이제 인구 40만을 넘어 포화상태까지 이르렀고, 도시를 둘러싼 성벽 밖으로 수만 명이 모인 난민촌이 형성될 정도로 와글와글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모여들었다. 돈이 모이니 사람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번이 노력한 것도 있었지만, 카시오페이아의 강한 의지도 한몫했다. 번의 예상이 점차 현실이 되어가자, 5개 신도시 사업을 왕실의 가장 큰 축으로 정해 지원하기 시작한 거다.

“어느 것이 백성을 위한 길인지 차분히 생각해 보셔야 할 때입니다.”

난민은 감당할 수만 있다면 재산이 된다. 특히 인구수가 절대적인 힘과 비례하는 이 세계에선 몇 년 사이 두 배 가까이 불어난 인구에 콩가 왕국은 무섭게 커가고 있었다. 반대로 백성을 빼앗겼다 생각하는 다른 주변국은 몬스터의 침략을 막을 병사를 징집하기에도 모자란 데, 날이 갈수록 국경을 넘는 사람이 늘어가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단합했다. 그리고 요구했다. 콩가 왕국으로 넘어간 이들을 범죄자로 간주해 잡아들여 돌려보내던가 그에 따른 손실 비용을 내라고 말이다. 여기까진 번이 예상했던 시나리오대로 아주 잘 흘러갔다.

그리고 지금,

“그대도 한 대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소?”

번이 으르렁거리며 한발 나와 오메가 백작에게 말했다.

“······?”

이 황당한 말에 백작이 입을 떡 벌릴 때, 카시오페이아는 왠지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하며 번을 저지하지 않았다. 몇 안 되지만, 막강한 지원군이 나선 것 아닌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번은 어슬렁 오메가 백작의 앞으로 걸어간다.

“미친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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