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웅이란 2 #
번은 빼곡하고 복잡하게 설명된 글자들을 건너뛰고 도형만 훑어보았지만 이게 뭔지 직감할 수 있었다.
“이거, 누가 올린 거지?”
“접니다!”
순하게 생긴 마법사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는 얇은 입술과 작은 눈.
수석 마법사 아르기안이다.
“자네, 샤덴쟈 마탑이었던가?”
“그렇습니다!”
샤덴쟈는 콩가의 마탑 중에서도 순위를 매기자면 저 아래 밑바닥에 깔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세한 마탑이었다. 생긴 지도 얼마 안 되었고, 소속 마법사조차 오십이 넘지 않는다. 하지만 번은 안다. 어떤 집단에서라도 단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설명해봐.”
번의 입에서 샤덴쟈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부터 아르기안은 이미 감격했다. 마법사들도 무시하기 일쑤인데, 최종결정권을 쥔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대공이 기억하고 있다니!
“속성의 특징을 이용해 충돌하는 성질을 조절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으로 전에 없던 강력한 폭발력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마법이란 적은 것보다는 큰 것이, 하나보단 열이 모였을 때 더 큰 위력을 가진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아르기안의 개념은 달랐다.
“이게 완성되면 하급 정령 둘만으로도 반경 500미터 정도는 흔적도 없이 날려버릴 겁니다.”
아주 작은 것. 분자와 원자 단위의 분열을 그는 기초적 겉핥기지만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말이 되오?”
“허어, 나 원 참. 살다 살다 별소릴 다 듣겠군.”
“아무 말이나 막 내뱉을 자리가 아니지 않소?”
다른 마법사들이 눈총을 주며 한마디씩 했지만, 번은 아르기안을 보며 계속하라는 듯 묵묵히 주시했다. 거기에 힘을 얻은 아르기안이 힘차게 말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상급 중에서도 경험이 많은 노련한 정령사가 필요하며, 그가 정령의 핵을 추출해 안정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야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번이 끄덕이며 물었다.
“여길 보면 불과 물, 빛과 어둠처럼 반대되는 속성의 정령이 필요하다고 쓰여있는데, 이유가 있나?”
“그게 이 기술의 핵심입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중급 이상의 정령은 매우 귀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급 정령은 어느 정도 수련한 정령사라면 어렵잖게 불러낼 수 있기에 대량생산이 가능합니다. 그걸 이용해 반대 속성의 조합이 가장 높은 효율을 보일 수 있다고 판단해 보고서에 올렸습니다.”
“아직 이론뿐이란 거군.”
전혀 다른 방식이긴 했지만, 이건 핵분열과 비슷한 원리가 된다. 물론 거기까지 가는 공정이 쉬울 린 없겠지만, 이것의 장점은 연구에 돈이 별로 안 든다는 점이다. 쓸만한 정령사 하나만 있으면 되는 일이니까.
“······.”
번이 고민하듯 침묵하자, 아르기안의 목이 움직였다.
꿀꺽.
절로 침이 넘어간다.
“해보지.”
“가,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락이 떨어지자, 아르기안은 세상을 다 얻은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번은 피식 웃으며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우리 일은 보안이 생명이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물건 하나, 개념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기에 신중하고 차분하며 생각해야 한다.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지를 말이다.”
마법사들은 똑똑하다. 번이 말을 하면 그리 한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하고, 고민부터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 생각나는 대로 뱉기보단 상관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쓰는 얼굴들이었다.
“머잖아 전쟁이 터질 것이다. 민생도 중요하지만, 나라가 없으면 백성도 없고 백성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는 의미도 없다. 해서 나는 앞으로 2년 안에 모든 것을 힘에 집중시킬 것이다. 그것이 왕실과 콩가를 위하는 길이며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라 생각한다. 당장 의견이 채택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간 본 대공이 모두 살펴볼 것이니 서운해하지 말고 더욱 정진하도록.”
이미 몇 차례 들어왔던 말이기에 마법사들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엔 이상하다 생각하기도 했다. 콩가 사람도 아닌 대공이 ‘애국’을 논하며 열을 올리는 게 이상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는 본래 그런 사람이다. 이제껏 본 어떤 지휘관보다 열정적이었고, 신념에 타협하지 않으며 독선적이라 할 만큼 주관이 확실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멍청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마법사들이 곁에 있는 것이겠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어차피 나흘에 한 번꼴로 보는 사람들이다. 가볍게 눈인사로 끝내고, 회의장을 나섰다.
1층으로 내려간다.
수많은 이들이 바삐 오가고 있다. 아마 도시에서 이곳처럼 부산한 곳도 없으리라. 그만큼 모두가 땀 흘리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러나 번이 향하는 곳은 건물 밖이 아니었다. 계단 뒤, 비상구처럼 생긴 문이 하나 있었는데 출입통제구역이라는 글이 쓰여 있었고, 미리 인증된 사람만 문을 열 수 있는 마법적 장치도 되어 있었다.
번이 앞에 서자, 뭔가 투욱 끊어지는 것 같은 작은 소음이 들리더니 스르륵 문이 열렸다.
문 뒤엔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익숙한 듯 거침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그.
아래엔,
“오셨습니까, 대공.”
완전무장한 용기병 둘이 계단 아래에서 번을 맞았다.
“별일 없나?”
“그렇습니다.”
“그래, 계속 수고해주게.”
지하공간으로 통하는 입구는 두 곳. 모두 철저하게 감시·관리되고 있었다.
그렇게 좁은 통로를 돌아서자, 이내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이 건물을 지을 때부터 대외용 설계도에 포함되지 않았던 비밀 시설이 지금 번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다.
“대공.”
오가는 사람들은 아주 다양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위에서 만난 마법사들과는 분위기부터 눈초리까지 전혀 다른 이들이다.
“대공.”
짧게 말하며 인사를 건네는 이들과 눈을 맞추며 끄덕여준 번은 계속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10평, 20평. 넓은 것은 50평이 넘어가는 방들이 무려 40개가 넘었다. 계속해서 걸으며 어떤 방을 지날 때, 그의 콧등이 찡긋했다. 익숙하고 향기롭게 느껴지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 것이다.
‘거의 완성 되었군.’
그 냄새만으로도 번은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방안에선 레인보우 립이 재배되고 있었다. 또한, 그것을 기존보다 더욱 강력하고 흡수율 높게 개량하는 작업이 한창인 것이다.
번은 계속해서 방을 지나친다.
-끄아아아아..!
안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오기도 하고,
-아..! 아흑! 하악..!
여인의 달뜬 신음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각종 약물과 저주, 몬스터 연구와 언데드까지 가리지 않고 연구 중이다.
번이 5분쯤 더 걸어 마지막 방에 도착해 문을 열자, 유황처럼 눈과 코를 후벼 파는 독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벽 쪽에 설치된 마법 화로에서는 푸른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그 위엔 성인 남자 둘이 들어가 목욕을 해도 될 것 같은 거대한 솥이 엉덩이에 불을 맞고 있었다.
그 안에 시커멓고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액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는데, 융이 그 내용물을 물끄러미 보다가 번을 발견했다.
“어머, 일찍 오셨네요?”
토끼 눈을 하고 예쁘장하게 웃는 그녀는 다시 20대 생기 넘치는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녁에 약속이 생겨서 일정을 당겨야겠어.”
“그러세요. 준비해뒀어요.”
웃으며 다가와선 번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그녀. 차츰 손길은 아래로 내려가 번의 옷을 하나하나 벗겨내기 시작했다.
속옷까지 전부 융의 손에 맡긴 번은 익숙한 듯 기다렸다.
그녀가 그의 옷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것을 보며 번이 묻는다.
“그놈은 잡았나?”
흑마법사 하나가 도주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놈이 연구하던 것이 타국에 알려져선 안 되는 것이란 게 번의 신경을 건드렸다.
사실 이 지하 시설의 구성원들은 보통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었다. 흑마법사, 마녀, 흑정령사, 기괴한 취미를 가진 마법사 같은 이들 말이다. 융의 네트워크엔 이런 이들이 많았는데, 번이 그들을 이곳으로 모았고 최근까진 별 트러블 없이 잘 해왔는데, 한 사람이 도주한 것이다.
“추적 중이에요. 멀리 가진 못했을 테니, 곧 소식이 오겠죠?”
용기병 열이 따라붙었다. 거기에 추적술에 도움되는 각종 마법을 알고 있는 마법사도 하나 파견했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번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용기병을 따돌릴 순 없을 것이다.
“그래야 할 거야. 놈이 에비뉴나 제국으로 가면 아주 골치 아파지거든.”
하필 그 자식이 다루던 게 신新종 마약이었다. 에비뉴 황제가 쓰는 전술에 대비해 준비하고 있던 건데, 이게 적의 귀에 흘러가면 좋을 게 하나도 없다. 비수라는 건, 상대가 모를 때 써먹을 방법이니까.
놈은 이게 돈 되는 정보란 것을 알았든지, 아니면 모종의 계획이 있었는지 갑자기 자취를 감췄고, 오늘로 도주 이틀째였다.
“다 됐어요.”
그녀의 말에 번은 끄덕이며 천천히 걸어 솥으로 걸어갔다. 솥 옆엔 사람이 밟을 수 있는 나무 계단이 있었는데, 주로 융이 그 위에 올라서서 주걱이나 국자로 솥 안의 내용물을 다룰 때 썼다. 그런데 지금은 번이 올라섰다.
그러더니.
풍덩!
끓고 있는 솥에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비명을 지르며 기겁할 일이었겠지만, 융은 아까 번이 올랐던 계단으로 가서 번을 내려보며 말했다.
“어젯밤에 조사 1팀이 생태연구를 떠났어요.”
“그 트롤이란 것 때문에?”
번은 목 아래까지 잠겨 있었다.
살이 순식간에 푹 익어버릴 온도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건조했다. 물론 뇌에선 경고 메시지가 끊임없이 울려댔다.
「주의, 열기 내성이 활성화 중입니다.」
「피부가 재생됩니다.」
「몸속에 침투한 독기에 저항합니다.」
「8종의 성분을 흡수합니다.」
일반인은 손톱만큼만 먹어도 바로 즉사하는 맹독. 그걸 한 솥이나 끓여 그 안에 몸을 담근다. 그러면서 독기를 흡수하고, 화기 내성을 올리며 재생력 또한 높이는 이 훈련을 번은 매주 한 차례씩 하고 있었는데, 올 때마다 융은 새로운 독이나 저주, 중금속 따위를 추가해 번에게 선물하고 있었다.
“예.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양으론 연구가 더 진행되지 않아요. 매우 비싸기도 하고요.”
“위험하지 않나?”
트롤이라는 몬스터는 불사신으로 알려진 괴물이었다. 아무리 상처 입고, 죽을 위기에 처해도 금세 재생해버린다는 전설의..
“어디 사는지만 파악하는 정도로 접근할 거에요. 그 후엔 용기병이나 사냥전문 인력을 파견하면 되니까요.”
“그래, 소식 오면 바로 알려줘.”
“예, 그럴게요.”
생긋 웃는 그녀를 보며 번은 흡사 온천탕에라도 들어간 사람처럼 등을 솥에 기댔다.
치이이이이익.
달궈진 쇠에 피부가 닿아 고기 타는 소리가 들렸지만, 번은 개의치 않았다.
「세포가 재생됩니다.」
「오색 마나가 요동칩니다.」
여러 사업을 진행하면서도 번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더 강해져야 한다. 뼛속까지 독기를 잔뜩 품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맹수가 되어야 했다. 아마 그 트롤이란 몬스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아지리라.
녹아내린 뒤통수에서 머리칼이 자라나고, 다시 타버린다. 뒷목도 까져 쓰리고 화끈거렸지만, 고통을 차단할 수 있는 번에겐 별일이 아니었다.
‘멋져..!’
살가죽은 벗겨지고 머리칼은 녹아내리는 번의 어떤 부분에서 매력을 느끼는 건진 모르겠지만, 융은 미소를 머금고 아래로 내려가 다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코를 틀어막고 입엔 특수 장비를 착용했다. 그러더니 흡사 수술을 앞둔 의사처럼 하얀 장갑을 손에 끼고 기다린다. 번이 솥에서 나오면 바로 진행해야 할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것인데, 그게 어찌나 지독하고 강한지 그녀로서도 단단히 대비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 있었다.
쑤아아아아-
불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번이 솥에서 나왔다. 흉하게 일그러진 피부들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움직이고, 열에 노출된 피부는 온통 새빨갛다. 하지만 융은 그런 번을 보면서 입술을 혀로 축였다. 이제 시작될 어떤 작업을 앞두고 그녀의 꼬리뼈가 찌르르 전율했다.
“······.”
번이 그녀의 앞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