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38화 (138/177)

# 영웅이란 1 #

.

.

.

어릴 적, 꿈을 꾼 적이 있다.

현실이 이토록 가혹하다는 것을 모를 그 시절, 마냥 순수한 마음으로 경찰이 되고 싶다 생각했었다. 나쁜 놈들을 혼내주고, 정의를 수호하는 사명감으로 멋진 제복을 입은..

하지만 대한민국은 돈이 지배했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법칙은 초등학교부터 그대로 적용되었다.

힘 있는 놈이 최고인 세상.

경찰은 술 취한 노인에게 뺨 맞아도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 하는 신세라는 걸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돈 좀 있는 집은 건드리지도 못한다는 걸 알았을 때의 기분이란..

법은 약자에겐 비정하지만, 기득권에겐 너무도 허술했고,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반에서 부잣집으로 소문난 애 엄마가 학교로 찾아와 선생님 멱살을 잡는 것을 보며 어리고 작은 맘에 품었던 꿈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느꼈다. 무력한 선생님들과 학교에 진입조차 못 하고 교문 밖을 서성이던 경찰 아저씨들.

그건 비단 그곳뿐만 아니라 인간이 무리를 이룬 곳에서는 어김없이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저는 상공께서 뭘 하시려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오늘 아침 용기병을 이끌고 콩가로 돌아온 번은 아주 오랜만에 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카시오페이아가 앉았다. 번은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을 마저 정리했다.

권력, 돈, 힘, 배경.

이런 것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치명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이런 제도나 법칙을 누군가 깨주길 바라고, 권역 밖에서 마음껏 활보하는 어떤 이를 기다린다.

영웅.

그래, 그는 그런 이름을 가졌다.

그 초등학교 교실에서 부잣집 아줌마 등쌀에 모두가 쩔쩔맬 때 누군가 한마디 해주길 바라던 그 마음. 어쩌면 그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하련다.

비록 시작은 거짓일지 몰라도 모두가 보고 싶어 하고, 믿고 싶어 하면 그것은 현실이 될 것을 아니까.

“..피곤하시면 다시 올게요.”

번이 대답을 하지 않자, 카시오페이아가 눈치를 보다 말했다.

“아니오.”

번이 가볍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잠깐 정리할 게 있었소.”

끄덕이며 카시오페이아가 한숨을 쉬었다.

“요즘 분위기가 좋지 않아요. 사방에서 몬스터가 출몰하고, 주변국들까지 서로 날카로워져 외교가 끊겼다시피 되었어요. 이 와중에 상업도시 건설을 추진하려니..”

“공사가 중단되었소?”

“그건 아니지만..”

“그럼 되었소.”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좋을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데 밑밥을 왕창 뿌려뒀으니, 이제 고기가 물길 기다리는 거다. 물론 그렇다고 낚싯대를 거둘 순 없다. 언제든 낚아챌 수 있도록 하던 건 계속되어야 했다.

“걱정 말고 전에 얘기했던 것들만 차근차근 추진하면, 머잖아 그 다섯 개의 도시는 상상도 못 할 정도의 혁신도시로 거듭나게 될 거요.”

“공업, 상업 단지 말인가요?”

번은 카시오페이아에게 몇 가지 지식을 전파했다. 이 세계엔 없는 개념이었지만, 이게 먹히기만 하면 콩가는 몇 년 안에 제국과 맞먹는 경제력을 지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여건으론 힘들었다. 적어도 주변 5개국을 찍어누를 정치적, 군사적 파워가 있어야만 했다. 당연히 그걸 뒷받침해줄 재력은 기본이 되어야 하고.

“그렇소.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일단 분업과 양산이 자리만 잡게 되면 그 도시들은 하나하나가 여기 수도보다 훨씬 큰 규모로 성장하게 될 거요. 일단, 돈이 돌면 소문은 금세 퍼지게 되어 있고, 대륙에서 수많은 이들이 찾아올 것이오.”

벨버른에서는 황제와 집정관의 눈치를 봐야 해서 본격적으로 풀어놓지 못했지만, 이곳은 다르다.

설명우가 살던 21세기를 생각해보자. 12시간이면 지구 반대편으로 갈 수 있고, 200층짜리 타워가 하늘을 뚫을 듯이 지어지며 그것도 모자라 우주까지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짚신 신고 다니던 조선 시대가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니지 않았던가?

단지 몇 가지 개념.

이 혁명과도 같은 코드가 세상을 한순간에 발전시키고, 변화하게 만들 것이다. 이건 쉽게 말해, 일종의 치트키나 다름없는 것이니까.

“만약.. 실패로 돌아가면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거예요.”

그녀가 어두운 얼굴로 말하자, 번이 웃었다.

“그럴 일 없다니까. 가까운 시일에 직접 그대의 눈으로 확인하게 될 거요. 도시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그때가 되면 모두가 피부로 실감할 거다. 고작 도시 몇 개가 아니다. 그게 콩가를 바꾸고, 대륙 전체의 멱을 쥐고 흔들어 댈 테니까.

“알겠어요.”

그녀가 입술을 꾸욱 다물자, 번이 크게 끄덕였다.

“마법사들은 어떻소? 불만은 없는 것 같소?”

“아직까진 다들 열심인 것 같아요.”

컴퓨터를, 스마트폰을, TV를, 인공위성을 알고 있다고 해서 그걸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좀 더 단순한 것은 가능하지 않겠나? 비누, 종이, 휴지,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이나 선진화된 교육, 사회 시스템 같은 것들 말이다.

다행히 이곳에도 지식인은 있었고, 번을 도와줄 그들은 집단을 이루고 있었으니 더 쉬운 길이 열린다. 마법사들 말이다.

“부족함 없이 잘 다독여주길 바라오.”

“노력하고 있어요.”

번이 용기병을 끌고 출정하기 전까지 했던 일. 바로 이것이었다.

우선 번은 콩가 전역의 장인과 마법사를 모아 5개 도시에 분산했다. 손기술 좋은 이들은 공장과 설비를 만들게 했고, 머리가 좋은 마법사들은 연구를 하게 했다. 게다가 여긴 값싼 인력이 무궁무진하지 않은가? 최저임금의 개념조차 없고, 아직도 노예가 버젓이 거래되고 있었으니, 그의 일에 박차를 가할 인력은 충분했다.

“그들에게 우리 콩가 왕국의 미래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오.”

“네..”

여전히 카시오페이아의 대답이 시원찮다.

“아직도 의심하는 거요?”

“아니요.”

그녀는 머리를 흔들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사람을 상하게 하는 무기를 그렇게나 많이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나 걱정이 돼서요.”

그랬다.

사실, 5개 도시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종이, 비누 따위가 아닌 무기였다. 도시별로 부품을 따로 생산하기에 그게 합쳐지면 뭐가 만들어질지 이 시점엔 아무도 몰랐지만, 이 또한 번이 계획한 거다. 그만큼 비밀유지가 핵심인 사업이었다.

“내, 전에도 말하지 않았소? 힘을 가져야 지킬 수 있다고. 전쟁억지력을 보유하는 것만으로도 안보에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라오. 게다가.”

번은 여기 콩가에서 산업화를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마법과 정령, 그리고 몬스터라는 존재 때문에 이 세계는 수천 년 동안 비슷한 상태로 머물러 있었는데, 이건 번이 보기엔 조금만 톡 건드려도 당장 뻐엉! 터져버릴 풍선과도 같았다. 방아쇠만 당겨지면 다음으로 빠르게 나갈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거다.

기술과 과학, 학문이 부족해도 상관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발전을 막던 마법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었다. 가령 엔진이나 동력을 만들지 못해도 마법구동장치를 쓰면 되고, 이것으로 자동차, 기차, 심지어 훗날엔 비행기까지 염두에 둘 수 있으니 중요한 건 누가 먼저 시작하느냐에 있었다.

"······."

번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정리하는 듯 하던 카시오페이아. 문득 떠오른 생각에 어깨를 움츠리며 말한다.

“저.. 혹시 마왕이 나타났다는 소문 들으셨어요?"

“풉-!”

번은 순간,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터졌다.

“들으셨소? 하긴.. 오는 길에 소문이 자자하더군. 그 무슨 대제가 몬스터 군대를 모으고 있다고 말이오.”

“저도 대신들에게 들었어요. 안그래도 요즘 그런 징조들이 보이는 거 아닌가 싶은데.. 그거 때문에 더 그러신 건가해서요. 하지만 그것 때문이시라면..”

콩가는 국경을 맞대고 제국이 있었다. 북쪽으론 신성제국까지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데, 마왕이 나타난들 힘이나 쓰겠나?

“하하, 그것때문만은 아니라오. 물론, 혹시나라도 그런 일이 있다면 미리 준비해서 나쁘진 않을 것이니, 더욱 내 뜻에 따라주면 좋겠소. 나중에 후회해봐야 시간을 돌릴 순 없는 것 아니겠소?”

“알겠어요. 다른 대신들한테도 제가 잘 말해볼게요.”

다행히 소문이 카시오페이아에게까지 꼼꼼히 잘 퍼진 모양이다. 그럴싸하게 말이다. 덕분에 일의 포장이 더 쉬워졌다.

‘아직은 상상도 못 하겠지.’

칼과 창이 지배하던 시대는 총과 대포에 무력하게 끝났다. 또한, 전차와 탱크가 개발되며 보병은 가랑잎처럼 쓸려나갔고, 언제까지나 무적일 줄 알았던 지상의 폭군도 전투기와 헬기가 나타나며 바보처럼 변해버렸다.

‘세상이 변했다는 걸 느낄 때쯤엔 이미..’

늦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번은 모든 것을 발아래 둘 것이다. 저 에비뉴의 황제까지도.

“당분간 내가 도시들을 직접 감독하겠소.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는구려.”

“이제 막 오셨는데, 쉬지도 않으시고요?”

“이게 쉬는 거라오.”

번은 카시오페이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며 웃었다.

“..알았어요.”

그 손길에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아무래도 당분간 계속 독수공방해야 할 팔자인듯싶다.

.

.

8개월이 빠르게 흘러갔다.

아직도 콩가 주변국들은 모여드는 몬스터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에비뉴와 제국은 끊임없는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제국을 시작으로 번진 마약이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급속도로 변화를 맞이한 것은 아마 이곳이 아닐까?

세븐 스타.

미니 멜리안 영지의 작은 도시였던 이곳은 이제 인구 20만의 대규모 상업지대가 되었다.

세븐 스타에 가면 부자가 될 수 있다!

아무런 기술이나 재능 없이도 일자리를 마음껏 구할 수 있다!

영주에게 막대한 세금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

콩가를 넘어 다른 나라에까지 소식이 퍼지자, 사방에서 난민처럼 밀려드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이건 보류하지.”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연구실에서 번이 마법사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 도시에만 19개의 마탑에서 나온 320여 명의 마법사가 있었고, 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은 그중에서도 수석 마법사 일곱뿐이었다.

천재 중의 천재. 브레인 중의 브레인만 모인 자리. 세븐 스타에서도 중심 구역에 있는 8층짜리 건물은 갤럭시 the Galaxy라 불렸는데, 별 이름 따는 것을 좋아하는 건 콩가 사람들 전통인가보다.

“개발비를 감당할 수 없을 거야. 지금은 때가 아니다.”

번의 말에 뚱뚱한 마법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보통 마법사라 하면 비쩍 마른 사람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 사내는 120kg이 넘어가는 거구였다. 그가 콧바람을 씩씩 뿜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제안이 통과되지 못한 것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나 보다.

“이게 완성되면 그 파괴력은 무지막지할 것입니다. 무려 4서클 광역 마법에 필적할 폭발력을 지닐 것이 분명하다고요! 이걸 대량으로 찍어낸다 생각해보세요! 그 어떤 전쟁이든 다 이길 겁니다!”

그래. 안다. 이 자가 지금 폭탄을 만들려고 한다는 걸 말이다. 그것도 다이너마이트 단계는 훌쩍 건너뛴 진보적인 것을. 하지만 그래서 안 된다.

“보류한다고 했다.”

번이 그를 노려보자,

“끄응..”

뚱뚱한 마법사는 입을 다물었다.

대공이 얼마나 차갑고 가차없는 사람인지 익히 알기에 더는 대들 수 없었다. 이미 그랬다가 잘려나간 수석 마법사가 한 손에 꼽을 수도 없지 않은가? 이 회의에 참석한다는 것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일종의 명예와도 같은 것이기에 어떻게든 의자에 한번 궁둥이 붙이면 눌러앉아 있어야만 했다. 대체할 인력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왜 안돼? 엄청 좋아 보이는데?

악마도 이상한지 번에게 물었다.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무기를 만들겠다는데, 왜 말리는 걸까?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면 다른 놈들도 금방 카피할 거다. 그러면 곤란하지.’

똑똑한 놈들은 대륙에 널렸고, 여기서 할 수 있으면 다른 곳에서도 한다. 아직 화학적 방식의 대량살상무기는 양날의 검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컨트롤 할 수 없다면 이쪽도 가지지 않는 게 낫다. 이쪽이 압도적으로 빠르게 치고 나갈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면 모를까, 제국은커녕 에비뉴에게도 밀리는 국력으론 어림도 없다.

‘그 괴물들만 생각해도 알 수 있잖아?’

은사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침투해 기밀 따윈 쉽게 빼낼 수 있을 것이고, 그걸 집정관과 스캇의 머리에 거치면 모방은 일도 아니다. 심지어 그뿐이 아니지 않나?

거기엔 그 남자가 있다.

원하는 게 있으면 힘으로 찍어 눌러서라도 손에 넣고야 마는 괴수가. 더 무서운 건 그가 그럴 힘과 세력, 진취적이고 더러운 성질머리까지도 겸비했다는 거다.

‘저번과 같은 전철을 밟을 순 없어. 그건 머저리나 하는 짓이야.’

두 번 다신 빼앗기지 않으리라.

번은 섬뜩한 눈동자로 테이블 위를 훑더니, 파일을 하나 집어 들었다.

“이건 괜찮군.”

굳었던 번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