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는 기술 2 #
후두두두둑.
피와 고깃덩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번은 칼을 옆으로 눕혀 들고 섰다. 워낙 길어서 이렇게 들지 않으면 바닥에 질질 끌린다. 설명우가 살던 세상의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쓰던 일본도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강도와 예리함, 길이를 지닌 녀석이다.
골격은 드래곤의 뼈로 잡았고, 날은 갈아 만든 게 아니라 날카로운 드래곤의 비늘 테두리 부분을 붙여 만들었다. 왕국 최고의 장인들이 비늘 하나하나 붙여가며 공들인 명검! 소재가 소재인만큼, 마나 감응도 훌륭해서 강기도 거뜬히 받아냈다.
-어때? 죽이지?
악마의 말에 번이 피식 웃었다.
‘뭐, 쓸만하네.’
다크 나이트라 이름 붙인 이 검을 쓰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제작에 워낙 공을 들였기도 했고, 이제까진 이걸 꺼낼 만큼 대단위 전투가 없기도 했다.
-흑강과 검의 궁합이 아주 좋다. 아마 대륙에서 네 검을 받아낼 자는 손에 꼽을 거야.
카시오페이아가 여왕이 된 이후, 번은 수도의 수상한 놈들을 색출해 어둠을 쪽쪽 흡수했다. 이제는 포화상태라 말할 수 있을 만큼 번의 몸속엔 힘이 가득했고, 몸의 다른 기운들이 숨죽일 만큼 강대한 어둠이 폭포처럼 흘렀다.
‘확실히 이것들은 이성을 잃었군.’
번이 몬스터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아무리 몬스터라도 그의 전신에서 흐르는 힘을 감지하지 못했을 리 없건만, 이들은 움츠러들거나 도망치려는 기색이 없었다. 융의 마법이 그만큼 탁월한 효과를 보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알면 움직여! 아직 멀었다!
‘나도..’
번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알아!”
긴 검을 휘두르며 달려가는 그는 돌풍과도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번이 일으키는 바람엔 칼날이 달려있다는 것이다.
사사사사사삭!
숫자는 아무 의미 없었다.
수십이 막아도, 수백이 막아서도 그에겐 장애가 되지 않는다.
쿠어어어어어!
목이 잘리고, 팔이 떨어지고, 다리가 끊어지고, 허리가 동강 난다.
이쯤 되니, 몬스터들도 주춤하기 시작했다.
「주력이 한계치에 다다랐습니다.」
「폐활량이 최고점에 이릅니다.」
육체를 구성하는 모든 능력이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지금 번은 누구보다 빨랐으며 지치지 않았다.
-방심하지 마! 이놈들 아직 포기 안 했다!
악마의 말처럼 여전히 몬스터는 수백이 살아있었다. 그렇다고 두렵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에 온 목적은 따로 있었으니 적당히 치고 빠지는 것도 중요했다.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동체 시력이 월등하게 높아졌습니다.」
모든 감각이 날뛰기 시작하자, 빠른 속도로 달리는 와중에도 놈들의 모든 숨결과 솜털 하나의 움직임까지 포착된다. 후아아악, 날카로운 손톱이 허리를 노리고 날아들어도 슬쩍 근소한 차이로 움직여 피하며 최소한의 체력소모로 주파했다.
그러던 그가, 어느 순간 아래로 몸을 낮췄다. 멀리서 보면 중심을 잃고 넘어졌거나 슬라이딩을 한 것처럼 보였지만, 미끄러지며 몸을 일으키는 그의 손엔 뭔가가 반짝이며 들려 있었다.
땅에 묻어둔 허리케인 아이. 그걸 회수한 거다.
‘됐어.’
-가자!
‘오케이!’
반대로 몸을 돌린 번이 칼을 쥔 팔을 들고 원을 그리자, 뿌우우우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용기병이 멈춘다.
퇴각 신호였다.
두두두두두두-!
나타났을 때처럼 빠르게 물러나는 용기병. 번 역시 후퇴하며 바닥에 떨어진 검집과 뭔가를 낚아챘다.
「으윽! 살살해라! 골이 울린다!」
번의 손아귀에 목이 잡혀 흔들거리는 드래곤이 외쳤지만, 번은 그대로 녀석을 하늘로 던져버렸다.
파닥파닥.
아직 몸을 지탱하기엔 날개가 너무 부실했지만, 이렇게 떨어지는 속도를 늦출 정돈 되었다. 작은 날개를 열심히 놀리며 저쪽으로 날아가는 드래곤을 보며 번은 미소 짓고 입에 손가락 두 개를 넣었다.
휘이이이익!
휘파람 소리에 그의 말이 접근했다. 그림처럼 말을 잡아탄 번이 저쪽으로 사라지는 용기병을 따라 질주했다.
“.......”
“.......”
다시 인간이라곤 둘만 남은 이곳.
한차례 폭풍이 몰려왔다 사라진 것 같았다. 몬스터 몇 마리가 용기병을 뒤쫓아 가는 듯 했지만, 소용없었다. 접근한 놈은 금세 죽었고, 속도와 기세도 한참 떨어졌다.
-꾸우우우..
-끄으응..
잠시 뒤, 몬스터들은 다시금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처음 모여있던 장소로 다시 모여든다. 절벽 아래로 말이다. 다친 놈들은 상처를 핥기도 하고, 고통에 괴로워하면서도 이곳을 벗어나질 않았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우우우우우우..
-꾸우우우웅!
왠지 불편해 보인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몬스터들이 점차 늘어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안절부절못하고 이리저리 빙빙 도는 녀석까지 생겨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으나, 이젠 정말 선택을 해야 했다. 더 지켜볼 것인가? 아니면 용기병을 따라갈 것인가.
‘저들은 콩가에서 온 건가?’
‘저 방향에서 왔으니 그렇겠지.’
‘북쪽으로 향하는데?’
‘우리도 움직이는 게 좋겠어.’
여기는 국경이다.
남쪽으론 콩가 왕국이 있고, 위론 페르나 왕국이 있었다.
‘아무래도 저들이 우리나라로 가려는 것 같거든.’
‘좋아. 가자.’
두 사람은 급히 움직였다. 하지만 말과 마차가 없는 그들이 용기병을 따라잡기엔 무리였고, 대신 흔적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
그렇게 일주일.
그들을 쫓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많은 말발굽이 그들을 안내해 주었고, 이따금 처참하게 망가진 몬스터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으니까.
“음.. 거리가 이틀로 벌어졌다.”
파리가 듬뿍 꼬인 커다란 늑대 사체를 보며 남자가 말했다.
“더이상 따라잡긴 힘들겠어.”
그는 일어서서 북쪽을 보았다.
“수도로 향하는 것 같지?”
“의심할 여지가 없지. 그들은 가장 빠른 직선 루트로 이동하고 있으니까.”
“왜지?”
“몰라.”
남자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나도 그게 궁금해.”
용기병은 대체 왜 페르나 수도로 향하는 걸까? 의문은 남았지만, 이제 용기병은 그들의 손을 떠난 후였다.
“그런데..”
그는 일주일간 계속 머릿속에서 맴도는 어떤 궁금증을 꺼내려다가,
“왜?”
“아니야.”
묻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잘못 본 거겠지 여긴 것이다.
‘뭔가를 가져간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며 북쪽을 바라보는 남자.
그는 한동안 노을 지는 땅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번이 이끄는 일백의 용기병은 커다란 성문을 올려보고 있었다.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주변엔 병사들이 가득했고, 성문 또한 굳게 닫혀있었다.
페르나 왕국이 콩가 왕국과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썩 좋은 것만도 아니었다. 인접국의 비애랄까? 역사적으로 몇 번 전쟁이 있었기에 양국은 서로 대면 대면하는 관계였다.
“나는 연락을 받지 못했소. 돌아가시오.”
성벽 위의 지휘관이 하는 말에 번은 쓰게 웃었다.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 야심한 시간에 다시 돌아가라는 것이오? 따듯한 수프를 기대한 것은 아니나, 선의로 찾은 사람들에게 너무 모질지 않소?”
평소였다면 이리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3개월은 전시나 마찬가지였기에 성문을 지키는 지휘관도 신경이 바짝 곤두선 상태였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 또한 곱지 않았다.
“일백이나 되는 무장한 사람들이 대뜸 찾아와서 신분도 제대로 밝히지 않고, 들여보내 달라 하면 어느 누가 이해하겠소?”
“말했지 않소? 콩가 왕국에서 왔다고.”
“그러니까 그게 확인될 때까지 기다리라 하지 않소?”
지휘관의 말에 번은 쓰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투구 속으로 보이는 용기병들의 눈매가 부리부리하다.
-야, 가자. 이쯤 했으면 됐지.
악마의 말에 번은 미미하게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허리케인 아이를 꺼내 슬쩍 흘렸다. 그리곤 그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발로 꾸욱 밟아 땅에 묻었다.
“알겠소이다!”
크게 외치며 발바닥을 비빈다.
“호의라 한들, 받는 쪽이 싫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대신, 당신이 책임져야 할 것이오!”
성벽 위의 지휘관은 번의 말에 흠칫했으나 곧 큰 목소리로 대꾸했다.
“살펴 가시오! 배웅은 하지 않겠소이다!”
번의 볼이 욱신거렸다. 웃는 거다.
“용기병.”
돌아선 번이 말한다.
“가자.”
“충!”
“충!”
번이 용기병을 이끌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자, 성문 앞 긴장이 해소되고 사람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왔다. 지휘관은 아까 번이 서 있던 자리까지 와서 주변을 둘러보며 갸웃했다. 그의 옆에서 부관이 묻는다.
“들어봐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전하의 명을 모르느냐?”
“하지만.. 그 자가 아주 중요한 정보를 쥐고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니겠습니까?”
지휘관은 피식 비웃었다.
“공짜 점심은 없는 것이야.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왔든, 우리에겐 득 될 건 없을 거다.”
다른 곳이면 몰라도 고작 콩가 주제에 말이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의 발바닥 아래에 무엇이 묻혀 있는 지를..
.
.
.
처음엔 콩가 왕국 국경 근처에 전방위로 허리케인 아이를 묻어두었다. 그러면 반경 1,200km까지 뻗어 가는 파장 때문에 몬스터는 거부할 수 없이 모여들게 되어 있다. 이 거리는 서울에서 부산을 왕복하고도 한참이 남는 엄청난 범위다.
이리되면 주변국들은 갑자기 닥친 재앙에 대비하려고 온 신경을 그쪽에 집중하기 되어 있다.
그렇게 3개월.
처음엔 당황할지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몬스터는 점차 줄어들게 되어있고, 애초에 인간이 점령한 땅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몬스터의 개체 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1차.
이런 번거로운 작업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명분을 만들려는 것이다. 용기병이 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건과 주변국이 몬스터의 이상징후를 인식할 수 있도록.
-두 번째는 뭔데?
‘아직 안 끝났어.’
여기는 설명우가 살던 21세기처럼 사회안전망이 촘촘하게 구성된 세계가 아니었다. 뒷산에도 늑대인간이 살고, 무덤엔 좀비가 기생한다. 허리케인 아이는 바로 이런 놈들을 강제로 끌어내 씨를 말리는 역할도 겸한다. 그래야 상업국가로서 발전할 때, 상인들의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고, 겸사겸사 주변국의 병력도 줄일 수 있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계획이다.
-그렇구만. 그럼 다음은?
‘넓혀야지.’
애초에 번은 성벽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주먹만 하던 허리케인 아이의 범위를 쫙 편 손바닥처럼 늘리는 게 목표였다. 그러면서 각국에 눈도장도 좀 찍어두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도 해야 했다.
-난 잘 모르겠는데? 이래서 뭐가 된다는 거야? 결국, 인간들은 몬스터를 다 막아낼 텐데?
‘그렇겠지.’
번도 그건 예상했다. 아무리 몬스터가 모여들어 봤자, 이 주변은 대륙의 중심이다. 제국도 근처에 있고, 강력한 몬스터 집단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이 없었다. 그런 게 있다는 소문이 돌면 진즉 토벌당했으니까.
하지만 늘 그렇듯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그것도 아주 왜곡해서 비틀리게.
드디어,
페르나 왕국과 투탄 왕국의 국경에서 번은 용기병을 보며 입을 열었다.
“1조.”
“넵!”
10명의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환복하고 정해진 동선을 따라 이동하며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라.”
“충!”
번은 1조에서 5조까지 총 50명의 발 빠르고 넉살 좋은 인물을 선발해 사방으로 보냈다. 그리고 남은 50명이 그들의 갑옷과 소지품을 보관한다. 떠난 용기병들은 한 달 후, 콩가에서 다시 합류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임무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할당된 지역을 돌며 말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파급력은 앞으로 벌어질 사건과 맞물려 엄청난 오해를 낳게 될 것이다.
‘세상이 팩트로만 움직이는 건 아니거든.’
-헛소문을 퍼트린다는 거야?
용기병들은 말할 것이다. 오래전 멸망한 마도왕국의 왕이 부활해, 그 원통함을 풀고자 어둠의 대제가 되어 군대를 모으고 있다고. 번이 할 일은 그 말이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과,
‘그래야 영웅이 탄생할 수 있으니까.’
국가를 초월한 대의가 뿌리박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리 헛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둠의 대제.
번과 꽤 잘 어울리는 이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