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36화 (136/177)

# 이기는 기술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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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앞에 어때? 뭐 좀 보여?”

애꾸 사내가 말했다.

“아니.”

절벽에 엎드려 있던 여자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더니, 작게 한숨을 쉬며 쪼그려 앉았다.

“여기까진 안 오는 것 같아.”

털썩 주저 앉은 여자는 품에서 고기조각 하나를 꺼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돌 씹는 것 같이 딱딱하고 말라 비틀어졌지만, 이마저도 오늘 입에 넣는 첫 번째 음식이었다.

“소식 온 거 없어?”

여자의 말에 남자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지않아도 수정구를 계속 보고 있는데, 위에선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여자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이미 깨진 건 아니겠지?”

“재수 없는 소리.”

남자가 딱 잘라 말하자, 여자가 투덜댔다.

그녀도 이런 불길한 상상따윈 하기 싫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3개월 전 갑자기 발발한 전쟁은 이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고,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정세는 따라가기도 벅찼다.

“다 먹었으면 이동하자. 오늘 내로 이 지역을 벗어나야 해.”

남자의 말에 아직 삼키지 않은 고기를 우물거리며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로서도 이 끔찍한 곳에 더 체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녀가 막 저쪽에 놓아둔 배낭을 짊어지려 할 때,

“숙여..!”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흡!”

여자는 급히 몸을 낮췄다.

바짝 엎드려서 남자를 돌아보며 미간을 찡그린다. 무슨 일이냐 묻는 거다. 남자는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다른 손으로 저쪽을 가리켰다.

“······!”

여자의 시선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금세 그녀의 눈이 커졌다.

‘저건?’

그녀가 다시 사내를 돌아본다.

‘그래.’

눈빛만으로 의사소통해야 할 만큼 긴박했다. 등줄기로 흐르는 땀이 체온을 가져가 오싹하게 만든다.

‘왜 저걸 못 봤지?’

‘다행이야. 저것들이 먼저 눈치챘으면 우린 이미 죽었어.’

국경으로 파견된 조사단.

이들은 처음엔 12명이었지만, 이젠 둘만 남았다. 왕국 전체를 쑥대밭으로 짓밟고 있는 몬스터 떼의 원인을 찾고자 특별임무를 지닌 채 국경까지 온 이들이었지만, 생과 사를 오가며 수확하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드디어 무언갈 발견한거다.

‘뭔가 있어. 여기 심상치 않아.’

‘그건 오늘 아침부터 알고 있었잖아. 기분 나쁘다고. 이곳은.’

여자는 다시 절벽 아래를 내려보았다.

우글우글.

어떤 것들의 정수리가 보였다. 못해도 수백. 많게는 일천이 넘어가는 숫자였는데, 참으로 생김도 다양했고, 종도 각양각색이다.

‘오크와 오우거가 함께 있어. 저게 말이 돼?’

‘그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우리가 온 거지.’

오크와 오우거 뿐만이 아니었다. 고블린, 늑대인간, 햄스터를 닮은 3m짜리 쥐까지 너무나 다양했다. 몬스터 사이에도 먹이사슬이 분명 존재하고, 저것들은 한 공간에 머물 수 없는 것들이 분명한데, 지금은 마치 한 무리인 양 행동하고 있었다.

‘일단 돌아가자. 우리 둘론 아무것도 못 해.’

남자의 사인에 여자는 입술을 이로 물어뜯으며 고민하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지도 몰라. 우리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생각해.’

보름 사이에 9번의 몬스터를 마주쳤다. 그것도 기억에 남는 위기의 상황만 그랬다는 거다. 자잘한 것들까지 포함하면 50차례가 넘었다. 그 짧은 여행길에 사람보다 몬스터를 만날 확률이 더 높았던 것이다. 이런 기현상은 국경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극심했고, 조사단의 숫자는 점차 줄어만 갔다.

‘그래도 너무 위험하다.’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잖아.’

이미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한계까지 몰렸지만, 앞서 하늘로 간 동료들을 생각하면 뭐라도 성과를 달성해야만 했다.

‘여기 뭔가 있어. 느낌이 와.’

여자는 단호한 눈빛으로 다시 아래를 내려보았다.

“······.”

“······.”

시간이 흐른다.

1시간, 2시간.

숨 막힐듯한 고요 속에서 두 사람은 기다렸다. 저 아래 어떤 변화가 생기길 바라는 거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마치 순한 양처럼 자리를 이탈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놈은 꾸벅꾸벅 졸기까지 한다.

이윽고 6시간이 지나고, 사방이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뭘 거 같아?’

‘모르겠어.’

여자는 머리를 흔들었다.

꼼꼼히 지켜보았지만,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누굴 기다리는 건가?’

‘소문이 사실이란 거야?’

3개월 전. 갑작스럽게 시작된 몬스터의 공격은 6개국을 들쑤셨다.

이놈들은 대륙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다가 뒤도 안 돌아보고 모여들었는데, 앞에 성벽이 있든, 군대가 있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달리며 가로막는 게 있으면 부수고 지나갈 뿐이었다.

이렇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는데, 마왕이니, 마계의 군주니, 악독한 흑마법사의 소행이니 하는 것들이 끊이질 않았다.

‘좀 더 지켜보자.’

여자의 말에 다시 밤이 흘러간다.

1시간쯤 지났을까? 2시간쯤 지났을까? 이제는 시간 감각마저 사라지려고 할 때, 저 멀리에서 어떤 기척이 느껴졌다.

-크르르르.

-캬우? 캬우?

죽은 듯 움츠려있던 몬스터들이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뭔가 온다!’

‘이쪽으로?’

‘그래! 저기! 저길 봐!’

다른 왕국에서 파견한 조사단인가? 아니면 토벌대? 모르겠다. 어쩌면 몬스터일지도.

워낙 어두웠기에 좀 더 가까워져야 정체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이익?

-끄룩! 끄루룩!

아래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조급한 몬스터 몇 놈이 참지 못하고 자릴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한패는 아닌 것 같지?’

‘쉿! 머리 숙여!’

행여나 저쪽으로 가던 몬스터가 이쪽을 향하면 골치 아파진다. 그러나 그건 남자의 기우에 불과했다.

-캬오오오오!

-아우우우..!

무서운 속도로 저편을 향해 나아가는 몬스터들은 주변을 신경 쓸 생각이 없었다. 오직 침입자를 격퇴하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엇?”

긴장된 얼굴로 지켜보던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 냈다. 반사적으로 여자가 손을 들어 남자의 등을 때렸다. 조용히 하라는 거다.

하지만.

‘저길 봐!’

남자는 팔을 뻗어 한쪽을 가리켰다.

‘사람이다!’

한 남자가 말 위에 올라있었다. 거리가 멀었지만, 그의 전신에서 번쩍이는 검은빛 광채가 사방으로 번뜩거렸다.

그는 자신에게 일직선으로 다가오는 몬스터를 보면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말을 몰았는데, 그의 손엔 거대한 창이 들려있었다. 한눈에 봐도 4미터가 훌쩍 넘을 것 같은 마창.

‘저게 뭐야?’

여자가 놀라 물었다.

‘사람이잖아?’

‘아니,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아!’

세상 어느 미친놈이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한복판에 홀로 뛰어들겠느냐 이거다. 그런데 그 일이 정말 벌어지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말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이윽고 충돌.

-캬아아아악!

가장 앞서 달리던 늑대인간의 배에 창이 틀어박혔다. 피하려고 몸을 뒤틀었지만, 창끝이 자석처럼 따라붙는다. 빠르게 달리는 말에서 저토록 큰 창을 가볍게 다루는 기술 하나만 보아도 참으로 신묘하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투툭! 투투툭!

창은 뱀처럼 움직였다. 말이 달리는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끝을 피해내지 못했다.

퍼억!

대가리가 작은 몬스터는 굵은 창이 박히자, 그대로 터져버렸고.

-꺼억..

어떤 놈은 아가리에 창이 박혀 그대로 꼬치처럼 꿰어 허공에 뜬 채 끌려갔다.

“굉장해···.”

여자도 이제 소리내 중얼댔다.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말 위의 사내가 어찌나 힘이 센지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한데,

“저기! 또 있다!”

선두의 사내가 거리를 중간쯤 줄였을 때, 아까 그가 나타났던 지점에 수많은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깃발 하나가 펄럭인다.

‘어디서 온 거야? 보여?’

‘아니! 너무 멀어.’

새로 나타난 괴인들 또한 거침없이 질주했다. 그들의 말은 지축을 울렸고, 이젠 모든 몬스터가 성을 내며 날뛰기 시작했다.

검은 갑옷 일색의 괴인들은 투구부터 부츠까지 전부 반짝이는 비늘로 덮여 있는 것 같았는데, 이 위에서 얼핏 보면 커다란 까만 뱀이 대지를 기어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대체 뭐야?’

사내가 여자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아래를 바라보는 수밖에.

‘충돌한다!’

선두에서 홀로 진격하던 가장 앞선 괴인이 몬스터 본진이라 할 수 있는 무리와 닿았다.

일천에 가까운 놈들이었기에 꽤 넓게 퍼져 달려가고 있었는데, 그렇다곤 해도 수십이 벽을 만든 거나 마찬가지라 무시무시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순간, 두 사람은 입을 떡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쩌엉-!

사내의 창에서 어떤 충격파가 발생하더니,

화악!

일직선으로 뻗어 가는 기운.

그건 너무도 어둡기에 오히려 이런 밤에도 눈에 띌 정도였다. 흡사 두껍고 기다란 통나무가 앞으로 쭉 뻗어 가는 모습이었는데, 그 영역에 들어간 몬스터들은 그야말로,

“세..상에..”

곤죽으로 변했다.

-갸아아악!

-케엥!

-워어어어억..

어떤 놈은 사지의 일부만 잘리고 구사일생으로 피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전한 건 아니었다. 자빠지는 순간, 뒤나 옆에 따르던 다른 놈들에게 밟히기 일쑤였으니까.

“마, 마법?”

“아니야. 저건..”

둘은 이제 목소리뿐 아니라 머리까지 위로 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아는 거다. 누구도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을.

-쿼어어어어어!

쿵쿵쿵!

키가 6미터에 이르는 육중한 오우거가 훌쩍 뛰었다. 두 손을 깍지 낀 걸 보면 그대로 찍어 누를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콰곽!

녀석은 공중에서 그대로 뭔가에 맞아, 뒤로 처박혔다.

-워어어억?

까만 박쥐 같은 게 놈의 얼굴에 달라붙어 시야를 가린 거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 알수 없는 생명체의 콰악, 벌린 아가리엔 톱날 같은 이빨들이 자라있었고, 그게 오우거의 얼굴을 물어뜯었다.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며 오우거는 필사적으로 떼어내려 해봤지만, 검은 것은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저, 저거..”

“드..래곤?”

어이없는 광경이었지만, 그제야 남자는 떠오르는 게 있는지 고개를 들어 저편을 보았다. 아까는 멀어서 보이지 않던 깃발. 그게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었다.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서 펄럭이고 있어 집중해야 알아볼 수 있었지만, 3글자는 선명하게 그의 눈동자에 들어왔다.

「용기병」

부르르.

남자는 소름이 돋아 몸을 떨었다. 어떤 소문에 관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사단이 꾸려졌을 때, 떠나기 전날 밤 술집에서 어떤 용병에게 들었던 이야기.

콩가 왕국에 용이 산단다.

그것도 아주 새까맣고 어린 용이.

여왕이 낳았다는 어처구니없는 얘기는 믿지도 않았지만, 확실히 관심을 끄는 얘기임엔 확실했다.

“맙소사.. 드래곤이 갑옷을 입은 거야?”

여자의 중얼거림에 남자도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본다.

자세히 보니, 마치 마갑처럼 드래곤의 몸을 덮은 까만 갑옷은 얼핏 보면 제 것 같았지만, 확실히 녀석이 움직일 때마다 들뜬 느낌의 유격이 보였다.

“허허..”

남자는 기막힌 얼굴로 그저 웃었다. 대체 저놈들은 뭐란 말인가? 용기병? 그게 뭘 뜻하는 거지?

남자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하압!

선두에 있던 남자가 말에서 훌쩍 뛰어올라 드래곤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아직도 오우거와 씨름하고 있는 드래곤의 등을 밟아 디디더니, 다시 힘껏 날아올라 몬스터가 우글대는 중심으로 떨어지며 기이한 동작을 취했다.

그러자,

스르르르르르르릉.

순간이지만, 마치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달빛조차 없는 밤인데, 창에서 뽑혀 나온 반질반질한 검은 빛을 머금었다.

검신만 3m 70cm.

창이라 생각했던 그것은 사실 검집이었고, 그는 두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쥔 채 아래로 하강하며 원을 그려 휘둘렀다.

“오러..”

절벽 위의 남자는 저 아래 무식하게 긴 검에서 사방으로 쫙쫙 뻗어 나가는 검광을 보며 침을 꿀꺽 넘겼다.

스아아아앗!

그 신비한 검은 빛이 지나가면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무엇이든 잘리고, 무엇이든 파괴되었으니까.

“저게 오러라고?”

남자도 기사들의 오러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 시리도록 푸른 빛은 평생 잊지 못할 만큼 강렬했으니까. 하지만 저건..

“그래. 아니면 설명할 수 없어.”

한번 휘둘러 질 때마다 좌악-.

적게는 몇에서, 많게는 수십이 영향권에 들었다. 그의 반경 10미터 이상이 사정권이었고, 그 안의 몬스터는 처절한 정도의 비명만 남겼다.

어둠보다 까맣고, 밤보다 어두워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검은 오러. 흑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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