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35화 (135/177)

# 용기 #

어느 새 부글부글 끓던 솥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융은 눈을 번쩍 뜨며 뒤로 급히 물러나며 외쳤다.

“거의 다 됐어요!”

번이 끄덕이자, 융은 미리 준비해둔 선반 위의 회색 가루를 솥에 뿌렸다.

그러자 퍼엉-!

화산지대 유황 가스 같은 연기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왔다.

방금 그녀가 넣은 것은 일종의 응고제였다. 하지만 단순히 액체를 굳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압축하고 농축하는 역할도 한다.

꾸득, 꾸드득.

불쾌한 소리가 솥에서 들려왔지만, 번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성공한 건가?”

액체의 표면이 가뭄난 지반처럼 단단해지다가 쩍쩍 갈라지는 것을 보며 번이 묻는다.

“오차가 살짝 있긴 했지만, 충분히 효과는 발휘할 수 있을 거예요! 여기 이곳을 보시면 윤기가 하나도 없죠? 전부 결정이 흡수해서 그런 거랍니다.”

“그렇군.”

번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묻는다.

“사용법은?”

번이 묻자, 융은 잠시 기다리라는 눈짓을 한 뒤 주걱을 솥 안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뭔가를 찾는 것 같았는데, 안쪽에서 자글자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가 새까만 보석처럼 빛나는 엄지손톱만 한 덩어리를 꺼냈다.

“본래 이 주문은 440년 전 마도왕국에서 처음 개발됐어요.”

번은 끄덕이며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필요하니까 하는 거겠지 생각한 거다.

마도왕국.

오래 전, 마법사들의 천국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마법사가 지금처럼 소규모가 아니었고, 마도왕국의 전신인 쿤드리아 왕국의 왕이 마탑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며 파격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아 대륙엔 마법사들의 전성시대가 도래했었다.

기사보다도, 신전보다도 마법사를 더욱 대우했던 왕은 타국 사람들이 쿤드리아를 마도왕국이라 부르는 것에도 유쾌하게 웃어넘길 정도였는데, 파격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일반 마법사만이 아니라, 흑마법사나 마녀의 활동도 용인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 개발된 신마법이 이전의 수천 년 대륙에서 만들어진 마법의 개수보다 많았다고 전해지니, 바야흐로 그때야말로 마법사들의 세상이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도왕국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마법사들의 위세가 날이 갈수록 대단해지자, 경계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을 동원해 고생해서 지은 성벽도 마법사의 마법 한방에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수만의 정예병도 대규모 범위 마법에 녹아내릴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갖게 된 거다.

“당시 대륙에서 가장 강했던 파린 제국은 신성제국을 끌어들였죠. 간악한 흑마법사를 내버려둔 마도왕국에 철퇴를 내려야 한다는 명분이었죠. 하지만 사실 그들 역시 마도왕국이 눈엣가시였으니 손잡긴 쉬웠을 거예요.”

두 제국이 파병한 22만의 군대와 동맹국의 8만 지원병이 마도왕국을 향해 출정했다.

“아무리 마법사가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들을 벌인다고 해도 한 손으로 태양을 가릴 수는 없었죠. 그 당시 총 30만의 군대는 마도왕국의 전체인구와 맞먹는 숫자였으니까요.”

“둘 중 하나겠군.”

번이 말하자, 융이 끄덕였다.

“도망치거나 싸워야 했죠.”

결국, 마도왕국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철鐵의 시대가 왔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그냥 당한 것만은 아니에요. 자신들의 터전을 부수려는 침략자들에게 비장의 한 수를 보이고 싶었죠.”

“그게 이건가?”

“맞아요.”

본래의 이름은 파동집중장치다.

“이 허리케인 아이는 영양분을 흡수해요. 인간에겐 효과가 없지만, 다른 파장을 가진 특히, 음陰기를 가진 생물에겐 치명적이죠.”

씨앗이라고 보면 간단하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영양분을 흡수한 허리케인 아이는 더 많은 영양분을 원해요. 그래서 먹이를 부르는 특정한 음파를 쏘아내는데, 그 범위가 어마어마해요.”

설명은 들은 번은 묘하게 웃으며 끄덕이다가 묻는다.

“그 왕은 어떻게 됐지?”

“마도왕국이요?”

“그래.”

“그의 소식은 알려진 게 없어요. 제국의 기사들이 궁에 도착했을 땐, 이미 잿더미로 변해있었다고 해요.”

“그렇군.”

번은 융이 챙겨주는 8개의 허리케인 아이를 주머니에 넣고는 볼일 다 봤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러자,

“······.”

등허리 옷깃을 쥐는 손.

“저.. 이제..”

약속을 지켜달라는 뜻이다.

쭈글쭈글한 융의 얼굴을 보며 번이 피식 웃었다. 그리곤 와락, 그녀의 목을 손으로 잡고 끌어당기는 번.

“하나 더 해줘야겠어.”

번의 몸에서 어둠이 물씬 풍겨 나왔다.

“하악! 뭐든..! 무엇이든지!”

거부할 수 없는 약점을 쥐고 부려 먹는 참으로 나쁜 남자였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흐윽..!”

이 쾌락. 지금 죽어도 좋다 느낄 정도였으니까.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레인보우 립을 만들어.”

황제는 번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여기겠지만, 아니다. 이 남자. 고삐가 풀렸다.

“..원하신다면, 뭐든.. 할게요!”

밀실에선 그 이후로도 융의 달뜬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

.

여왕의 남자는 참으로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노인의 그것처럼 사리에 밝았고, 웬만해선 놀라거나 동요하는 일도 없었다. 권력을 쥔 남자들은 보통 그 힘을 이용해 어리고 예쁜 여자를 탐하거나 타인을 휘두르길 즐기는데, 대공은 그조차 없다.

쪼르르륵.

주전자를 들고 찻잔에 차를 따르는 시비는 그래서 오늘도 조심스럽다. 대공이 딱히 아랫것들에게 막 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래서 더 무서웠으니까.

“흐음. 그게 고민이오?”

오늘도 어김없이 대공은 여왕의 고민을 쉽게 해결해주려나 보다. 찻잔을 잡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번을 보며 여왕은 미간을 좁혔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이에요. 어느 쪽이든 서운해하는 사람이 생겨날 거고요.”

처음엔 그저 꼭두각시처럼 번이 시키는 일만 하던 카시오페이아였지만, 일을 계속하다 보니 점차 변해갔다. 사명감도 느끼는 것 같고.

“그럴 때는 국가와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선택하면 된다오.”

“그렇지만 돈은 귀족이 쥐고 있는데요? 그들이 반대하면 이 법안은 아무도 호응하지 않을 거예요.”

번은 주변 5개국과 인접한 도시에 상업특구를 만들어 그곳의 세율은 2%로 낮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보통 10~20%에 육박하는 높은 세를 걷는 다른 도시와 다르게 아주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정책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이전부터 그 도시를 소유하고 있던 귀족들은 부아가 치밀 수밖에 없다.

물론, 이건 바로 앞만 보는 아주 근시안적인 생각이다. 박리다매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기에 하는 머저리들. 번은 카시오페이아에게 조곤조곤 설명했다.

“머잖아 그 상업특구들로 많은 인파가 모이게 될 거요. 그때가 되면 절로 알게 되겠지. 한 사람에게 20을 걷는 것보다는 열 사람에게 2씩 걷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다는 것을.”

“특구로 지정한다고 해서 그렇게 모일까요?”

“그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요.”

번은 최근 한 달간 콩가의 국경 근처에 허리케인 아이를 심었다. 그것들이 영양분을 듬뿍 먹고 발아하기 시작하면 본격적인 혼란이 시작될 것이다.

“알겠어요. 그건 더 생각하지 않을게요.”

카시오페이아는 여왕으로서 역할을 아주 잘 수행하고 있었다. 번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모습으로 말이다. 새끼 드래곤을 지키기 위한 괴상한 모정으로 시작한 일이라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진리나 다름없었고, 그녀의 머리 위에 올라간 왕관은 무시하기엔 너무도 무거웠다.

“잠시 걷겠소?”

그런 그녀를 위해 번이 손을 내밀었다.

“좋아요.”

이제 그녀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과거 침묵하던 여자는 이제 없었다.

정원으로 나간 두 사람은 계속 걷는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렇게 그와 함께 걷는 것도 좋았으니까.

힐끔.

그의 옆얼굴을 훔쳐보며 그녀는 괜히 가슴이 콩닥였다.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가기도 했고.

20분쯤 걸었을까?

“아.. 여기는?”

“맞소. 훈련소라오.”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직접 와본 것은 처음이었다.

“들어갑시다.”

입구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에게 가볍게 눈을 맞춰주며 안쪽으로 들어가자, 넓은 공터와 건물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 건물 앞에는 멋지게 휘갈겨 쓴 글씨체로 만든 깃발이 있었는데,

「용기병」

바로 이곳이 네이와 100명의 남자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저기 있군.”

번이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멀리서 보이면 모른다. 공터 중앙에 깊은 구덩이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가까이 접근하면 그 아래에서 계속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머..? 네이..!”

구덩이에 접근한 카시오페이아가 빼꼼히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헙..”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아래는 성인남자 50명이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넓었고,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통로가 연결되어 있어, 어디로든 뻗어 갈 수 있게 되어있었는데, 그 깊이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저, 저들이 지금 뭘 하는 거죠?”

“훈련 중이오.”

“훈련이라고요?”

용기병이 되겠다며 지원한 최초 391명 중에 거르고 걸러 엄선한 일백이 반년 넘게 합을 맞추고 있었다. 이 지옥같은 훈련장은 들어오긴 쉬웠어도 나가는 것은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처절한 음성이 계속해서 주기적으로 터진다.

-아아아악!

-야! 오른쪽으로 피했어야지!

-했다고! 근데 누가 내 발을 밟았어!

네이를 중심으로 25명이 원을 그리고 움직이고 있었다.

용기병은 단순히 드래곤을 지키는 호위가 아니었다. 한팀이 되어 호흡을 맞추고, 공수전환을 유기적으로 하며 빈자리가 생겼을 땐 누구라도 뛰어들어 메꿔야 한다. 이 전술은 마계의 어떤 군주가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인간에게 맞게 번이 변형해서 용기병에게 적용한 거였다.

-갸앗! 갸르릇!

그때, 인간의 것이 아닌 포효가 들려왔다. 하지만 드래곤의 쩌렁쩌렁한 그것은 아니다. 이제 고작 생후 7개월 차에 접어들었을 뿐인 어린 드래곤이 내지르는 목소리였으니까. 그런데 이 소리만으로도 주변 용기병들은 용케도 알아듣고 말했다.

“거리를 넓혀. 네이가 답답해한다!”

“야! 한슨! 너 말이야! 너! 꼬리에 닿잖아!”

사람들의 중앙에서 뒤뚱거리며 작은 날개를 파르르 떠는 네이를 보며,

“푸웃-!”

카시오페이아는 왠지 귀엽고 웃겼다. 그런 그녀의 등을 번이 손바닥으로 가볍게 쓸어주었다.

“기분이 좀 나아졌소?”

“예..”

번은 시원한 미소로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오늘 그대를 이곳에 데려온 것은.”

자신의 필사적인 모습도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이리 보인다는 걸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저 아래 용기병과 어린 드래곤이 반년이나 훈련하고 있었지만, 타인이 보면 그저 우스꽝스럽거나 대체 저들이 뭘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할 것이다.

그런 거다. 세상 모든 일들이.

“고민하고 노력하며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것은 알겠으나, 가끔은 여유가 필요한 법이라오.”

카시오페이아가 촉촉한 눈으로 번을 바라보았다.

번이 계속 말했다.

“그대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질 필요는 없지 않소? 나도 있고, 대신들도 있으며 수많은 백성 역시 있으니 말이오. 저들을 보시오. 혼자가 아니지 않소.”

-갸앗!

-야! 한슨! 한스으으으은! 또 밟았잖아!

-미, 미안해!

한슨에게 꼬리 끝을 밟힌 네이가 펄쩍 뛰며 양손의 손톱을 세웠다. 딴엔 위협적인 동작이었지만, 카시오페이아의 눈엔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이거 하느라 지난 반 년간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구나.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괜히 서운한 카시오페이아였다.

그러나,

-그만! 합동훈련은 여기까지!

아래에서 외침이 들려오자, 그녀의 옆에 있던 번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제부터 재미있어질 거요.”

용기병의 전설은 아직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