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32화 (132/177)

# 혼돈의 장 1 #

대청의 한 귀퉁이.

두 명의 공작과 세 명의 후작이 모여 심각한 얼굴로 얘기하고 있었다. 하던 일 다 내팽개치고 와서 잔뜩 상기된 얼굴들이었는데,

“전하께선 좀 어떠십니까?”

이제 막 도착한 클리오 후작이 피벗 공작에게 물었다.

“······.”

피벗 공작은 머리를 흔들었다.

조금 전 수석 사제가 다녀갔는데, 경과가 그리 좋지 못하단 얘기를 하고 갔기 때문이다.

배꼽 왼쪽을 뚫고 들어간 손이 장기를 헤집고 등으로 튀어나왔으니, 즉사하지 않은 것만도 기적이란다. 그렇다고 가망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모두가 지금 피벗 공작과 같은 반응을 보이리라.

“세자께선.. 대체 왜 그리 하셨답니까?”

클리오 후작이 물었지만,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영문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허어..”

평소 말수가 많은 클리오 후작은 입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나 보다.

“큰일이로군요. 만약 전하께서 잘못되시면 후사는 어찌해야 합니까?”

세자가 워낙 오래전부터 후계를 이을 거라 모두가 예상하였기에 자연스럽게 다른 왕자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권력에서 아주 멀찌감치 밀려나 있었다.

둘째 왕자는 오래전 지방 영주의 딸과 혼인하여 개나 기르면서 느긋하게 살아가고 있었고, 셋째 왕자는 한량閑良의 전형이었다. 술, 여자, 도박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섭렵하며 아직도 밤거리를 배회하고 있다나?

“그런 말씀 마시오. 전하께서 잘못되긴 왜 잘못된답니까? 곧 정정하게 일어나실 거외다.”

그리 말하긴 했지만, 피벗 공작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없었다. 그도 아는 거다. 후작의 말처럼 뒤를 준비해야 할 때란 것을.

향후 나라를 누가 이끌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이들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 대청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이 그것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오늘 벌어진 사건을 어떻게 매듭지어야 하는 것이었고, 누군가는 나서야만 했다.

그런데 전혀 의외의 인물이 입을 열었고,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번이었다.

-저 사람은 에비뉴의 그..?

-뭐지?

-저 자도 들어와 있었나?

번이 유명하긴 해도 그가 나설 자리는 아니란 생각이 지배적이다. 공주의 남편. 부마란 직위 자체가 본래 정치권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관례. 심지어 타국의 사람 아니던가? 이건 마치 에비뉴의 대청에서 벨버른 사람이 목청을 높이는 것과 비슷한 경우였다. 한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거다.

그때,

“..흐음.”

번이 빤히 자신을 바라보자, 피벗 공작은 고개를 갸웃하다 끄덕였다.

왕과 세자를 제외하니, 자연스럽게 가장 강한 발언권을 쥔 사람은 피벗 공작이 되었다. 이런 자리에선 말을 할 수 있는 위치가 되면, 타인의 말할 권리도 손에 쥐게 된다. 번은 정확하게 그걸 파악한 것이고.

“제가 여기 콩가 왕국에 온 것이 얼마 되지는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세자께선 어려서부터 총명하기 이를 때 없고, 효심 또한 지극하다 들어왔습니다.”

“그러셨지요.”

피벗 공작이 바로 수긍하자, 그 말이 사실이라는 듯 모두가 동조하며 끄덕거렸다. 번은 그걸 보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리곤 다시 말한다.

“소식을 접했을 때, 저는 누군가의 장난인 줄 알았습니다.”

말을 하며 자연스럽게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나가는 번.

“그만큼 믿기지 않는 일이었으니까요. 저도 이럴진대, 지금 여러분의 심정이 어떤진 감히 상상조차 못 하겠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리를 이루고,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우두머리가 뽑히면 너도나도 따르는 습성이 있다. 또한 쉽게 선동되고,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기 전에 화자의 매력에 빠지기도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말言인데, 이 남자는 그 방면의 스페셜리스트다.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은 작위적이란 것이 되고, 그렇다면 무언가 불순한 것이 개입하여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을 일으켰다는 뜻이 되니, 그 불순한 것이 과연 무엇인 걸까?하고요. 그래서 이것에 대해 고민해보았습니다.”

“그 말인즉, 이 사고의 이면에 어떤 흉계가 있다 그 말씀이십니까?”

피벗 공작은 ‘사고’라 말했다. 그 뉘앙스를 번이 모를 리 없었고, 조금 물러나기로 한다. 한 번에 얻어지는 건 없다. 조금씩 허무는 거다. 야금야금.

“그럴 리가요. 청명하기로 이름 높은 이곳 콩가의 왕실에서 흉악한 세勢가 있었겠습니까?”

번은 일단 그들의 자긍심과 비위를 맞춰주었다. 번과 적敵까지는 아니겠지만, 이들은 이들만의 동질감으로 묶여있다. 여기서 외톨이나 마찬가지인 번의 말이 무게를 가지려면 다양한 접근이 필요했다.

번은 빙긋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미리 찍어둔 이에게 눈을 맞추며 다시 이야기를 끌어갔다.

“제가 아주 오래전, 기묘한 사건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특히 지금처럼 현실이 골치 아프고 끔찍할 땐 자연스럽게 도피할 곳을 찾는데, 누군가의 사연만큼 좋은 것도 없다.

“저는 악마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피벗 공작이 아는 얘기인 듯 옆 사람에게 말했다.

“전에 에비뉴의 황제께서 오셨을 때, 들려주더군요.”

사흘간 이어진 술자리의 안주가 무엇이었을까?

“대공이 악마에 씌었던 적이 있었다고요.”

“허어..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용케도 저리 멀쩡하군요?”

보통은 악마와 접촉하면 폐인이 되거나, 제물이 되어 죽는다고 알려져 있다.

“들어보시죠. 꽤 흥미로운 얘기일 겁니다.”

후작이 끄덕이며 번을 바라보았다. 그처럼 많은 이들이 번의 입을 주시했다.

“악마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도 어디에나 있고, 찾아보려 해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번은 모두가 관심을 둘 만한 표정과 목소리로 분위기를 유도하며 한 사람에게 물었다. 아까 찍어두었던 여자. 아이리스 여사다.

수백 년 전부터 콩가 왕실을 위해 헌신했던 충신 아이리스 백작 가의 부인인 그녀는 본래 여자가 드나들 수 없는 이곳에도 당당하게 한자리했는데, 7년 전 그녀의 남편과 아들이 전염병으로 죽은 뒤, 그녀가 가문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전면에 나서 최선을 다했다.

여자지만 그 누구보다 왕실에 충성하고, 아이리스 백작 가의 이름답게 굳건한 기둥이 되어 콩가의 중심을 잡은 그녀.

“여사님께선 악마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뭐, 이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번에겐 다른 이유로 그녀가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번의 의도야 어떻든 아이리스 여사는 불쾌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경험을 한 것이 보통은 정상이 아니겠지요. 할 이유도 없고요.”

그녀의 말에 번이 웃었다.

“맞습니다. 피할 수 있으면 접촉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 사악하고 간교한 악마들은 어떻게든 틈이 보이면 비집고 들어오죠.”

번이 그녀의 바로 앞에 섰다.

중년의 꼬장꼬장한 귀부인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외형을 지닌 아이리스 여사는 여장부답게 번의 기세에도 움찔하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모르겠군요. 설마 대공께선 지금.”

그녀의 눈빛이 저쪽 세자의 등을 향했다.

“악마의 수작에 우리 콩가의 왕실이 놀아났다 말하고 싶은 건가요?”

그녀의 말이 끝맺자마자, 한순간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번을 노려보는 눈빛들마저 흉흉해졌고.

“허어.. 어처구니가 없군.”

“우릴 모독할 셈인가?”

“고작 악마 따위에게 세자께서 현혹되셨다고?”

이게 말이 지닌 힘이다.

그러나 번은 주눅 들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확신에 찬 그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일순 입을 헙, 다물 정도로 말이다.

“..그 말씀에 책임을 지셔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대공이라도 가려야 할 것이 있는 법이랍니다.”

“그렇소이다. 여기는 에비뉴가 아니외다.”

“불쾌하군.”

사람들이 한마디씩 할 때, 이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던 어떤 마법사는 미간을 좁혔다.

‘어쩌려고 그러는가?’

소식을 듣자마자 입궁해있던 다코비치다.

그는 아까부터 번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아이리스 여사와 날을 세우는 번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영특한 자로 알았는데, 아니었던 건가?’

자신을 찾아와 안하무인처럼 행동하던 그 모습과는 또 달랐다. 지금은 마치 관심받길 좋아하여 나설 자리 구분 못 하고 설치는 어느 남작 가의 애송이 같지 않나?

하지만 그때,

흠칫.

다코비치는 스치듯 잠시 머문 번의 눈길에 심장이 철렁했다. 아이리스 여사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던 번과 눈이 마주쳤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눈동자 안에서 무언갈 본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찰나였고, 그게 뭐였는지 파악하기엔 여유가 없었다.

“다시 제 이야기로 돌아와서.”

사람들을 훑어본 번은 아이리스 여사에게 말했다.

“악마를 본 그 날 이후, 저는 한 가지 묘한 능력이 생겼습니다.”

번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 속에서 번뜩이는 눈빛은 이전보다 몇 배는 강렬했다.

“······?”

말도 못할 짧은 순간, 아이리스 여사가 본능적으로 한발 물러설 때, 번의 몸은 이미 그녀의 왼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저, 저..!”

“무슨 짓이냐!”

“헛?”

사람들이 경악했지만, 번은 손에 잡은 목을 놓지 않았다.

“커억..”

번에 손아귀에 잡힌 30대 초반의 난다 자작. 그는 평소 아이리스 백작 가와 두터운 친분으로 여러 사업을 함께했는데, 오늘도 역시 아이리스 여사의 곁에 있었다. 그런 그를 번이 공격한 것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장 멈추세요!”

“대공!”

말은 그리하지만, 근처의 사람들은 번에게서 순식간에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번과 그의 손에 목줄을 잡힌 난다 자작. 그리고 아이리스 여사를 중심으로 둥근 원이 만들어진다.

“끄으으으..”

질식해 눈이 하얗게 뒤집힌 난다 자작. 벌어진 입에선 거품과 함께 침이 흘렀고,

“여봐라! 호위!”

“뭣들 하느냐!”

“대공을 말려라!”

난다 자작을 구하기 위해 소란이 벌어질 때, 번이 말했다.

“다코비치 백작.”

번의 목소리에 그가 응했다.

“예, 대공.”

대청을 지키던 호위들이 우르르 몰려왔지만, 번은 동요하지 않고 할 말을 이어갔다.

“그대는 최근 수도에서 일어난 살인, 실종 사건에 대해 알고 있소?”

“그렇습니다.”

“흉수를 특정할 수 있었소?”

“아직은 단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도 그 사건에 대해선 알고 있었기에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번에게 모여들던 호위도 피벗 공작이 손을 들자 멈추었다.

“내, 외부인이라 간섭하지 않으려 했지만, 더 놔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까 염려되어 나설 수밖에 없었소.”

번의 음성엔 걱정이 한가득 묻어있었다.

“아내의 친정이 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지 않겠소?”

번의 옆에서 아이리스 여사가 정신을 차렸는지 뾰족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를 놔주세요! 대공! 이러다 죽겠습니다!”

팔이라도 잡고 뜯어말릴 기세다. 그러나 번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이야기하다 말았군요. 마저 들어주시지요. 저는 어린 시절 악마를 보았고.”

우둑.

난다 자작의 목이 거짓말처럼 옆으로 꺾였다. 번이 손아귀에 힘을 준 거다.

“이제는 악마를 볼 수 있습니다.”

혀를 길게 빼물고 죽은 자작을 보며 아이리스 여사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꺄아아아악-!”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살인을 저지른 사내는 너무도 담담하고, 평온한 모습이었다.

“다코비치 백작.”

“예, 대공.”

번이 자작의 시체를 그를 향해서 내밀었다. 한데, 이것이 희안한게 실 끊어진 인형처럼 팔다리가 힘없이 흔들린다.

“이게 그 흉수요.”

말을 하며 번이 어둠의 마력을 손에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에 반응한 자작은 통증을 느끼듯이 꿈틀대더니, 이내 눈을 번쩍 떴다. 죽은 척 있으려 했는데, 견딜 수 없었던 거다.

“키에에에에에엑!”

죽었던 사람이 짐승처럼 소리치며 번에게서 벗어나려고 허공에 손과 발을 놀리자,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그러나 이때,

“······!”

“······!”

수많은 눈이 동시에 어떤 명령이라도 받은 듯 번을 향해 번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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