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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131화 (131/177)

# 덫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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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번이 왕을 알현謁見하기 위해 걸어갈 때, 같은 시각 수도엔 두 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그 대상이 문제였다.

만남.

여기 아버지와 아들이 독대 중이다.

우물가 개구리 두 마리가 마주쳐봐야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마는, 그게 개구리가 아니라 용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산이 무너지고, 땅이 갈리질 것이니까.

“세자,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에비뉴가 신의 이름을 본떠 황족의 이름을 지었다면, 콩가는 밤하늘을 보며 작명했다.

안드로메다는 장남으로 태어나 일찍이 후계자로 책봉되었는데, 카시오페이아의 오빠이자, 3남 1녀 중 맏이였다.

그가 콩가 왕국의 뒤를 이으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다만, 아직 왕이 정정하고 최근 국제정세가 복잡하기에 시기를 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갑자기 느닷없이 찾아와 면담을 요청하더니 이런 말을 지껄였다.

“그 자를 몰아내야 합니다. 그는 장차 왕국에 재앙을 내릴 것이 분명하며, 그것은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구나.”

왕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비뉴에서 온 태자는 이제 남이 아니었다. 공주와 혼인을 하여 부마가 되었고, 최근엔 드래곤까지 얻어 겹경사가 되었다. 이대로만 가면 에비뉴와 더욱 관계가 돈독해질 것을 예상하였는데, 이 무슨 생트집인가?

“제발 소자의 청을 받아주시옵소서. 빠른 시일에 무조건 그를 내치셔야 합니다.”

평소, 과묵하고 상냥하기로 유명한 안드로메다가 이리 나오자, 왕은 이마를 구겼다.

“진정 제정신으로 말하는 것이냐? 혹 음주라도 한 것이냐? 세자답지 않도다!”

이리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이상했으니까.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그러겠사옵니까.”

아니라곤 하는 데, 눈빛이 좋지 않은 게 참으로 묘하다.

“아무튼, 그 자를 가까이 두신다면 우리 콩가가 멸망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심사숙고해주십시오.”

아들의 말에 왕은 분노했다.

녀석이 사용하는 단어가 어이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조건? 아무튼? 이런 막무가내가 어디 있나? 저잣거리 코흘리개 꼬마라면 모를까, 나이 서른이 훌쩍 넘은 왕실의 기둥이 어찌!

“그만하거라!”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외치는 고함에 왕좌 뒤편에 서 있던 호위무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그림자로 살아온지 10년이 넘었지만, 부자父子 간에 이런 고성이 오간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들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대들었다. 그래, 이건 대드는 거였다.

“전-하!”

아비에게 훈계하듯 답답하단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쾅쾅 두드리는 세자의 모습이 낯설다.

“진실을 보셔야 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놈이 흉심을 드러내기 전에 어서 막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 시점에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번은 실제로 거대한 야망을 품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건 안드로메다의 선견지명이 참으로 탁월하거나 보는 눈이 매섭다는 뜻일지도..

한데,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나 이유가 없었다. 타인을 설득하려면 모두가 수긍할만한 타당성을 제시해야 하건만, 무작정 아니라고만 하니 그게 통할 리가.

“정신 차려라! 이놈! 대체 이게 무슨 짓이더냐!”

왕은 참지 못하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아들에게로 다가섰다.

“혹여 질투하는 것이냐?”

얼마 전까지 멀쩡하던 아들이 이리 돌변한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아버지다.

“그런 것이더냐?”

그는 안드로메다의 옷깃을 두 손으로 거머쥐며 재차 물었다.

“무엇이 너를 이리 만든 것이란 말이냐?”

아버지의 간절한 음성에도 아들은 코를 찡긋거리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참으로 불경한 눈초리였는데, 그래서일까? 왕은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리곤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들었다.

“정신 차려라! 세자!”

귀싸대기를 한 대 쳐주고 싶었다. 그것으로 해결된다면 몇 대라도 그리하고 싶었다. 자식을 때리는 부모 마음이 얼마나 찢어질까?

하지만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흐읍?”

-저, 전하..!

뒤에서 호위무사가 급히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는 왕의 뒤에 바짝 붙어서도 뭘 어찌해야 할지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라.

“······?”

왕의 복부를 뚫고, 등으로 삐죽 튀어나온 손을. 당장 잘라버리고 싶었지만, 그것이 세자의 손이니 그럴 수도 없었다.

“너.. 이..?”

왕은 몸이 허물어지는 것을 막고자, 악착같이 아들의 몸을 움켜잡았다. 고통보다는 놀람과 황당함이 더 크다. 이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귓가에 말이 들려왔다.

“쓸모없는 놈.”

아들이 아비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끼끼끼끼..”

기괴한 웃음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왕은 더이상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쇼크로 정신을 잃은 거다.

이때,

“전하!”

호위무사가 판단을 내렸다. 이건 시해다.

“큽..!”

세자의 몸을 거칠게 밀치며 왕의 몸을 안는 호위무사는 외친다.

“밖에 누구 없느냐! 전하께서 다치셨다! 어서..! 어서..”

그는 말끝을 흐렸다.

세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

.

한편, 아버지가 아들의 손에 쓰러지고 있을 그 시간. 공주의 별궁에 손님이 하나 찾아왔다.

평소라면 이런 추레한 노파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곳이었겠지만, 그녀가 가진 신분과 패가 경비병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어갔다.

“대공을 모셨다고요?”

이렇게 공주까지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습니다. 공주님. 저는 그분의 종입니다.”

사실 카시오페이아가 번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에비뉴라는 나라의 태자이며 몇 번의 전쟁에 참여했고, 여러 방면으로 박식하다는 것 정도? 그런 그가 누구와 어울렸고, 과거에 어떤 동료가 있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의 종을 자처하는 노파가 찾아왔다.

“아주.. 먼 길을 혼자 오셨네요?”

공주가 갸웃하자, 노파는 콜록콜록 기침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노파는 한눈에 보아도 병색이 완연했다. 나이가 많아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낯빛이 심하게 어두웠고, 바람이라도 불면 훌훌 날아갈 것 같이 삐쩍 말랐다.

“치치.”

공주가 옆을 보며 하녀를 불렀다.

“예, 공주님.”

“빵과 우유를 내오너라.”

얼굴만 봐도 뭐든 먹이고 싶을 정도였다. 실제로 노파는 그렇게 빌어먹으며 여기까지 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상하다. 대공께서 이런 노파를 가까이 두셨다고? 어째서? 전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지 않나?

“고맙습니다. 듣던 대로 성품이 훌륭하십니다.”

“아닙니다.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얘기에요.”

공주가 싱긋 웃자, 노파는 묻는다.

“오는 길에 들었는데, 드래곤을 출산하셨다고요?”

비밀이라곤 해도 이미 수도엔 쉬쉬하며 퍼져나가는 소문이었다.

“맞아요.”

“아..”

노파가 탄성을 터뜨리자, 공주가 물었다.

“그대는 대공의 곁에서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가요?”

노파는 바로 답했다.

“미천하지만, 점을 치는 재주가 있습니다.”

“오..!”

공주의 입이 동그랗게 모였다.

“점이라고요?”

“조잡한 기술일 뿐입니다.”

노파의 말에 공주는 절로 끄덕였다.

노파야 조잡하다지만, 어떤식으로든 뛰어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대공께서 곁에 두었을테고. 자연스럽게 이 점쟁이 노파도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을 거란 추론이 섰다.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그녀는 호기심이 생겼다.

“별자리를 보나요? 신께 목소리를 듣나요?”

점을 치는 자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풍문으로 들은 것들을 묻는다.

“저는 관상을 보지요.”

“얼굴을 보고 점을 친다고요?”

처음 듣는 얘기에 공주의 호기심은 더욱 높아졌다.

“그렇습니다. 오래 살아왔더니 이젠 사람 얼굴만 봐도 그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지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거기에 주변으로 어떤 기운이 모여있는지를 판별해 액운이 닥칠지 행운이 깃들지를 예상해보는 것이지요.”

“오오오오..!”

여자들은 이런 것엔 국적과 나이를 불문하고 사족을 못 쓴다.

“저는요? 제 얼굴에선 뭐가 보이나요?”

“공주님. 모든 것은 제물이 필요하듯 조금이라도 복채가 있어야 합니다. 동전 한 닢이라도요.”

마녀들은 이것을 두고 등가교환等價交換 exchange of equivalents이라 부르는데, 공주는 그걸 알 길이 없으니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신이 차고 있던 팔찌를 풀러 노파에게 건네주었다.

“이거면 되나요?”

“아닙니다. 이건 너무 귀합니다. 빵과 우유로 대신하겠습니다.”

마침 하녀가 쟁반을 들고 오는 것이 보였기에 노파가 손사래를 쳤다.

“어디 보자..”

순간, 노파의 주름진 눈두덩이 속에서 까만 보석처럼 번뜩이는 빛이 뿜어나오는 것 같았다.

흠칫.

공주가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이해하고 넘어갔다. 과연 신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노파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아직 처녀구나.’

그 사실이 왜 노파의 기분을 좋게 하는진 모르겠으나 코, 눈, 입술, 목선, 가슴까지 샅샅이 뜯어보며 노파는 웃었다.

“흑黑 뭉치가 두 개 붙어 있으니, 열여덟 살이 되기 전에 두 번의 시련이 닥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 잘 이겨내신다면 오색 기운이 잘 어우러져 탄탄대로가 공주님 앞에 놓일 것이니, 근심 걱정 모두 사라지고 하시는 일 전부 번창하실 아주 좋은 상입니다.”

사람은 본래 좋은 말과 안 좋은 말이 섞여 있으면 나쁜 것만 기억에 남는다.

“두..번이요?”

공주가 불안한 안색을 하자, 노파가 안심하라는 듯 푸근하게 웃어주었다.

“신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는 시련만 준다 하였습니다. 공주님 또한 잘 이겨내실 것입니다.”

공주는 고맙다고 말하며 두리번거렸다. 혹여, 자기 주변에 뭐가 붙어있다는 건지 확인하는 모습이 귀엽다.

마냥 어린 철부지 아가씨의 모습. 하지만 그래서 남자들은 이런 여자에게 푹 빠진다. 지켜주고 싶은 본능을 자극하니까. 거기에 공주라는 신분과 어여쁜 얼굴까지. 빠지는 게 하나도 없는 그녀였다.

“예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을 텐데, 제가 눈치 없이 너무 붙들고 있었네요. 대공께선 금세 오실 겁니다. 쉴 곳을 마련해 줄 터이니, 편히 있으세요. 치치!”

공주가 다시 하녀를 불렀다.

“예, 공주님.”

“이 쟁반을 손님방으로 옮겨드리렴.”

노파가 배려에 고마운 표정으로 머리를 꾸벅 숙이며 일어나는데, 공주가 불쑥 묻는다.

“아,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막 몸을 돌리려던 노파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백발도 모자라 머리숱도 별로 없어 숭숭한 이마가 왠지 보는 사람도 허전하게 만들었지만, 쉬어진 목소리는 따스하다.

“융입니다. 공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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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각 수도에서 벌어진 두 개의 만남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정확히 2시간 후. 궁이 발칵 뒤집혔다. 소문은 빠르게 달려 수도 전체에 퍼져나갔고,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마차를 기다릴 시간도 아끼려고 직접 말을 타고 입궁했다.

왕이 쓰러지셨다!

이 어마어마한 사건에 미리 도착한 대신들은 함부로 입을 열지도 못한 채 다른 사람이 모이길 기다렸는데, 대청 중앙엔 한 남자가 온몸에 줄이 묶인 채 잡혀 있었다.

세자였다.

‘환장하겠네.’

그런 세자를 바라보던 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악마가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 상상도 못 하던 일에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것이다.

‘더럽게 꼬이는데?’

번이 인상을 찌푸리며 저 쪽 세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악마가 말했다.

-저 놈. 그거 아니냐? 맞지?

왕을 시해한 세자가 현장에서 호위무사에게 잡혔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일단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이리 사람을 모으긴 했는데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 단 한 사람만은 느끼고 있었다.

‘그래.’

세자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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