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30화 (130/177)

# 덫 1 #

“무슨 말씀이신지..?”

다코비치는 이마를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그의 주름진 얼굴이 더욱 굴곡졌다. 보통 이런 연배의 사람이 표정을 구기면 상대는 당황하기 마련. 하지만 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사납다.

“왜 공주를 해하려 했느냐는 말이외다.”

“······?”

다코비치의 눈이 한껏 뜨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 무슨..!”

버럭 하려는 다코비치를 보며 번은 두 걸음 떨어지더니 뒷짐을 지고 옆으로 설렁설렁 걷기 시작했다.

이곳은 돌로 쌓아올린 탑이었지만, 내부는 장인들이 섬세하게 그려 넣은 문양이나 그림이 있었는데, 그러한 것들을 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려 다코비치를 눈으로 흘기며 다시 말한다.

“내, 아직 전하께는 보고를 올리지 않았소. 처음엔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했고, 후엔 일단 기다리기로 했소. 그런데 아니더군?”

번의 눈빛엔 분명하게 하나의 목적이 담긴 것 같았다.

추궁이다.

“그 흉악한 것을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공주에게 건넨 의도가 뭐였소? 혹 어떤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면 허심탄회하게 말씀해보시구려. 내, 들어는 들이리다.”

“허..”

다코비치는 입을 떡 벌렸다.

사람이 너무 어처구니없을 땐 머리가 텅 비어버린다. 지금 그가 딱 그러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가 다른 생각을 할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자기 할 말만 계속해대기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나는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소. 권력자들의 사정도 모르고,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지.”

휘적휘적 걷다가, 번이 다시 다코비치에게 다가섰다. 그러더니 팔을 뻗는다.

흠칫.

움찔하는 다코비치의 옷깃을 웃으며 펴주는 번. 그러더니 표정과는 정반대되는 말을 계속 내뱉었다.

“내가 외부인이나 마찬가지고, 언제 떠날지 모르는 사람이라 최대한 나서지 않으려 했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니다 싶더군. 상식적으로 내 여자가 위해를 당했는데, 참고 있으면 그게 등신 아니고 뭐란 말이요? 게다가 이제 자식도 태어난 마당에 떳떳한 아빠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

만약 번이 에비뉴의 태자가 아니었다면, 공주와 혼인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 이 순간, 끌려나가 몰매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드래곤이 태어났고, 왕 또한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이 시점에, 다코비치는 그를 홀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번 역시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번은 안하무인처럼 거침없이 행동했고, 이 늙은 마법사는 번을 내치지도 못하고, 그저 듣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대공께서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대로 참고 있다간 천하의 악적으로 몰릴 것 같았기에 다코비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공주에게 주머니를 건넨 적이 없다는 말이오?”

“그건 사실입니다만···.”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혹, 모르셨소?”

“그것도 알긴 합니다만..”

이미 궁지로 몰아넣은 토끼가 발광한다고 호랑이 앞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심지어 번은 그리 호락호락한 맹수도 아니다.

와락 좁혀진 미간.

불덩이가 튀어나올 것 같은 눈!

그리고 터지는 고함과 살기-!

“아는 사람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하는 거요! 당신은!”

"하..."

번의 몰아침에 기막힌 다코비치였다. 그가 언제 이런 꼴을 당해보았을까. 유명한 마탑의 주인이자, 왕실에서도 그의 조언을 구하고자 자주 청하는 위인인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 그는 삿대질을 받고 있었다. 그 손가락 끝이 심장을 후벼 파는 기분을 맛보면서 말이다.

“공주와 친분도 있었다는 사람이 어찌 그리 악독한 마음을 먹은 거요? 말해보시오! 이유가 뭐요? 몸도 성치 않은 공주에게 당신이 그렇게까지 해야 한 이유가!”

변명이라도 해야하나? 아니다. 이미 번은 다코비치를 죄인으로 단정해버렸다. 이 와중에 ‘나는 그저 공주를 돕고 싶었을 뿐이오.’라고 말해봐야 또 어떤 소리가 날아올지 모르겠다. 그저 황당함에 그의 말문은 더 막힐 뿐.

그는 드래곤이 그 주머니 속 원혼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 판단했고, 공주가 이번 일을 겪으며 단단한 마음을 다지길 바랐다. 하지만..

“내가 우습소?”

이 남자는 이런 상황을 만들고 이용하는 데 아주 능숙한 사람인 것 같았다. 팩트 따윈 개나 줘버리고, 자기 편한 대로 맞추며 그럴싸하게 말이다.

“······.”

다코비치는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는 번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이건 명백한 시비아닌가? 아주 마음먹고 온 거다.

“대공께서..”

그래도 세월이 그에게 준 선물은 헛되지 않았다. 이제껏 마탑과 왕성을 드나들며 쌓은 정치적 내공도 그대로였고.

“단단히 뿔이 난 모양인데, 시간이 흐르면 오늘 일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며칠 시간을 두고, 마음을 가라앉히시지요.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으신다면 그때 다시 얘기해보지요. 사람이 눈이 뒤집히면, 할 말 안 할 말 분간을 못 하게 됩니다.”

그의 말에 번은 피식 웃었다.

“내가 지금 철없이 무례를 저지르고 있다. 뭐 그런 말이오? 그렇소? 그런 거요?”

주변 공기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조금 전 응접실에 들어온 견습 마법사는 다시 나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대공께선 영민하다, 소문이 자자하시니 머리만 식으면 충분히 알아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 그런가?”

번이 입술을 모아 쫍- 입맛을 다셨다. 이건 웃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웃는 것도 아니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허나 어느 남자가 자기 여자가 모진 일을 당했는데, 냉정함을 유지하겠소? 그리고 세상은 언제나 그렇게 이성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오.”

고작 열다섯살인 번이 늙은 마법사에게 세상을 논하고 있었다. 이 기막힌 상황에 다코비치는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는데,

“나는 여길 나가면 바로 전하를 찾아뵐 것이오.”

번이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에비뉴에 파발을 보내 폐하께 이 일을 소상히 알릴 거고.”

“..그리 키우실 일이 아닙니다.”

왜곡된 이야기가 높은 곳으로 퍼져나가면 어찌 되겠나? 다코비치가 아무리 아니라고 우기고 결백을 증명한다 해도, 양국의 관계 때문에 정치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왕 말이다.

“그건 당신이 판단할 일이 아니지.”

“끄응..”

다코비치가 불편한 얼굴로 번을 노려보았다.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번은 고개를 돌렸다.

“거기.”

그의 시선이 닿자, 견습 마법사가 벼락을 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의자 좀 주겠나?”

“아, 예..!”

너무도 자연스러운 하대와 명령에 당연한 것처럼 주변의 의자를 들고 오는 견습 마법사를 보며 가볍게 미소 띤 얼굴로 끄덕인다.

“고맙군.”

번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더니 다코비치를 올려보았다.

“······.”

“······.”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새 번의 시선은 주변 벽화를 향했다. 하지만 그는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이 탑이.”

긴장한 견습 마법사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넘길 때,

“그대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단하진 않을 거요.”

마탑의 물리적인 방어력 따윌 말하는 게 아니었다. 네깟놈 하나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부숴버릴 수 있다는 협박이었다.

눈앞에서 탑주가 당하는 꼴을 본 견습 마법사는 뱀을 본 소처럼 절로 뒷걸음질 치다 책상 모서리에 엉덩이가 걸렸다. 우르르 쌓아둔 양피지가 떨어지고,

“······.”

다코비치는 그런 그를 보며 턱짓했다.

“죄, 죄송합니다!”

나가라는 뜻이다.

콰앙-!

문이 닫히자, 다코비치는 꾸욱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뛰지도 않았는데 단내가 후욱 풍기는 느낌이다.

“제게..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드디어 원하던 대답을 들은 번. 하지만 짐짓 모른 척 어깨를 으쓱하며 양손을 위로 보여 들었다.

“내가 그런 게 있겠소? 그저 서로 잘 지낼 수 있을 것인데, 꼬인 것이 있으니 한번 풀어보자 했던 것이지.”

번은 빙긋 웃으며 의자의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렸다.

“내, 들어준다 하지 않았소? 마음껏 해보시구려. 마침 오늘은 따로 볼일도 없으니.”

조금 전 그리 몰아붙이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푸근하게 웃으며 말하는 번을 보며 다코비치는 손바닥에 땀이 고이는 걸 느꼈다. 이런 미친 인간이 다 있나? 도무지 종잡을 수 없지 않은가?

“내가 다소 감정이 폭주했다면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어쩌겠소? 집안일인 것을. 그대가 이해해줘야지.”

번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자, 다코비치는 속으로 생각했다.

‘보통이 아니야. 아니, 그 정도는 아득히 넘었다. 대체 어떻게 살아왔기에 저 나이에 이런..’

완벽히 당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에비뉴라는 나라에 가본 적은 없지만, 대충 지옥 같은 잔상이 그려질 정도로 번은 강렬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고작 스물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런 인물은 그의 긴 인생에서도 본 적이 없다.

‘태자라더니..’

황비의 수가 스물도 넘는 나라에서 당당하게 태자의 자리를 꿰찼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허허..”

그래서 웃음만 나온다.

내 집 안방을 차지해버린 구렁이를 어찌 내쫓을꼬?

.

.

-저 늙은이가 약속을 지킬까?

마탑에서 나오는 길. 악마가 물었다.

“그건 상관없어.”

번이 잠시 발길을 멈추고 탑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상관없다고?

“그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트집을 잡긴 했지만, 마법사가 악령의 원혼이 담긴 주머니를 건네준 것은 빼도 박도 못한 사실이었다. 이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고, 조금만 포장하면 충분히 이슈를 만들 수 있는 사건이기도 했다. 특히, 드래곤이 태어난 지금처럼 정치적으로 복잡한 상황일 때는 더더욱 번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었고.

“그는 그저 내 패를 완성할 수 있게 도와주는 조커일 뿐이야.”

-뭘 하려는 건데?

“진출해야지.”

수도에 잠입한 괴상한 것들을 잡아먹으며 힘을 키우는 건 충분히 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차분히 해 나가면 본연의 힘을 더 키울 수 있을 것이고. 하지만 번이 되려는 것은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지존至尊. 천상천하유아독존! 그것이 그가 그리는 목표였다. 이제껏 미물微物로 살아오며 받은 설움, 이제야 풀 수 있게 되었는데, 이대로 주저 앉을 수 없진 않은가? 이왕 사는 인생 폼나게 살아봐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 넌 매번 뭐가 그리 복잡하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그냥 좀 더 힘을 길러서 찍어 누르면 되지. 어차피 3년 후면, 그도 오잖아?

그래, 3년.

황제가 그리 단언했으니 어찌되든, 때가 되면 제국과 담판을 짓고 이곳으로 황제가 올 것이다. 그런데 그게 뭐? 공주 치마폭에서 거드름이나 피우며 허벅지나 쓰다듬고 있을까?

번은 그리 나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모습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연출할 순 있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욱 치열하게! 누구도 의식하지 않을수록 더 과감하게 ‘나’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편을 모아야 했다. 에비뉴에서 실패한 것이 바로 그것 아니던가. 황제의 측근을 내 것으로 하지 못했다는 것 말이다. 다시는 그런 뼈아픈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독한 놈.

악마는 질렸다는 듯 말했다.

-그래, 이제 어디로 갈 거냐?

“궁.”

번의 말에 악마가 놀랐다.

-마법사와 약속했잖아?

그랬다. 아직 협상을 완전하게 마무리 짓진 못했지만, 왕에게 고하는 것은 미루기로 일단락했었다. 그런데 곧장 궁으로 가겠다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마법사와는 별개로 왕에게 받아낼 것이 있었다.

드래곤이 태어났지 않은가?

네이를 콩가의 상징이자, 모델로 쓰려는 분위기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걸 번이 자연스레 부추긴 것도 있었고.

그렇다 해도.

“크크크..”

맨입으로?

웃는 번의 입꼬리가 악마의 꼬리처럼 살랑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