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속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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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 후.
일천의 병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늘어서 있었다. 이들은 궁 소속의 정식 병사들이긴 했지만, 대부분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안전하게 시간만 보내려고 이곳에 있는. 소위 말해 꿀보직 종사자들이었다.
수도를 지킨다는 명분은 있었지만, 오랜 평화가 이어져 기강은 해이해져 있었고, 다들 있는 집 자식들이다 보니 누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것도 견디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이들에게 재앙이 닥친 거다.
“용기병이 뭐 하는 건데?”
“공주님의 드래곤을 지키는 게 아닐까?”
쉬쉬하곤 있지만, 소문의 근원지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들이라 정보엔 빠르다.
“그건 지금도 하고 있잖아?”
“모르지. 감투라도 하나 필요해서 그런 건지.”
“오! 그건 나쁘지 않은데? 이왕 하는 거 멋지고!”
“쉿, 저기 대공 오신다.”
병사들이 한 곳을 바라보았다.
뚜벅뚜벅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대공은 건장하고 늠름했다. 소문에는 전쟁터에서 대단한 공을 세웠다고 하니, 비슷한 또래에겐 절로 흠모할 수밖에 없는 사내다. 심지어 드래곤도 부리고, 아리따운 공주님과 결혼까지 하지 않았나? 용모까지 단정하니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부러운 남자나 다름없었다.
피식.
병사들의 앞에 선 번은 그런 눈빛들을 보며 쓰게 웃었다.
부럽긴 뭐가 부럽나? 에비뉴와 벨버른에서 지난 15년간 이룬 모든 것을 털리고 여기에 좌천된 거나 마찬가지인데.
하지만 번은 기죽지 않는다. 물론, 후회도 하지 않는다. 그럴 시간 있으면 내일을 향해 1초라도 아껴 달리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에비뉴의 태자이며, 콩가 왕국의 부마이다.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끄덕이는 그들을 보며 번은 가볍게 웃었다.
보통 군대에 끌려오는 이들은 어느 집안의 차남이나 삼남인 경우가 많았다. 대를 이을 맏형 대신, 징집되어 오는 것이었으니까. 또한, 이곳의 군대를 21세기 대한민국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병사들 중엔 13세도 있었으며 평균 17세로 아주 어린 축에 속하니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용기병 군의 대장이다. 태자라는 지위도, 부마라는 신분도 모두 내려놓고, 오직 공주와 앞으로 태어날 왕국의 자랑을 위해 헌신하며 살 것이다.”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번에게서 뿜어나오는 박력과 자신감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나와 함께할 사람을 모집하려 한다.”
그의 특별한 어조에 호기심이 어린다.
번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무엇인가? 흡수능력? 여러 삶을 거치며 남긴 스킬? 태자라는 신분?
아니다.
다채로운 지식과 말言이다. 쉽게 말해 말빨이란 건데, 본디 언어란 아는 만큼 구사하며 머리에 든 게 많을수록 자신감이 붙고 타인을 설득하기 쉬워진다. 결국,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깊고 넓은 경험을 통해 쌓은 지혜가 이 남자에겐 있다는 말이다.
물론,
「스킬, 매혹이 활성화 중입니다.」
써먹을 수 있는 수단은 잊지 않는 그였다.
“우리는 장차 왕국을 넘어 대륙 최강의 무력집단으로 성장할 것이며 저 에비뉴의 철鐵을 능가하는 단단한 정예가 될 것이라 자부한다.”
사내들 마음을 물씬 뒤흔드는 말이었다. 하지만 말이 쉽지, 말뿐이지 않은가?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뭔가 하려나 본데, 괜히 잘못 꼬였다가는 인생 피곤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은 임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 가업家業에 참여할 사내들이었기에 쓸데없는 일로 시간 낭비하긴 싫은 얼굴들이었다.
그들을 보며 번의 말이 이어진다.
“강요하진 않겠다. 나는 어중이떠중이 일천보다 내 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일백이 필요하니까.”
소리를 내는 사람은 번 말곤 없었다. 다들 서로 눈치를 보며 분위기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때,
“질문 해도 되겠습니까?”
누군가 손을 들며 말했다.
“데모진. 말하라.”
흠칫.
번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기에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그.
“무엇이든 물어봐도 좋다. 데모진.”
“아, 예!”
질문조차 잊을 뻔 하다가 간신히 말을 잇는다.
“용기병이 조직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렇다.”
“복무조건이나 급여, 어느 곳에 소속되는지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문제였기에 모두의 눈이 번에게 집중되었다.
“그렇지않아도 그것에 관해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겨우 그따위 것이 중요한가?”
“..네?”
“용기병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다.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하는 신의!”
번이 앞으로 한발 나섰다.
“묻겠다. 데모진. 너에겐 그러한 것들이 너의 인생에 가장 큰 가치를 지니는가?”
“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하지?”
그래도 꽤 배운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인지 당황은 했어도 또박또박 말은 잘한다.
“국가에 충성하고, 가족을 잘 돌보며 불의를 보고 참지 않는 것입니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모여 그런지 끄덕이며 동조하는 모습들이 많다. 하지만 일천이 있으면 뭘 하나. 이 남자 하나의 기세에 밀리는 것을.
번은 데모진의 말에 끄덕이며 뒷짐을 지었다. 그러면서 다른 병사에게 걸어갔다.
“너도 그리 생각하나? 유한?”
역시 이번 병사도 놀랐다.
자신의 이름이 불렸다. 그것도 이 많은 사람 앞에서, 고귀한 부마께!
“저, 저는 사랑과 우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답에 번이 유쾌하게 웃었다.
“애인이 있는가? 유한?”
“이, 있습니다!”
“그 레이디의 이름이 무엇이지?”
“실비아입니다!”
“그녀를위해 죽을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번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 그 마음 평생 변치 말도록.”
“넵!”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는 그를 보며 다른 병사들이 킥킥 웃는다.
번은 다시 걷는다.
그러면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병사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찰리.”
“네!”
이름이 불리자, 깍듯한 차렷 자세로 대답하는 병사. 하지만 무얼 묻기 위해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었다.
번은 계속 걷는다.
“샤이가.”
“네!”
“헤이오.”
“······.”
반복된 호명에 병사들은 대답 대신, 크게 끄덕이며 입을 꾸욱 다물었다.
이윽고 앞줄의 30여 명이 모두 이름이 불리자, 대열의 끝에 도달한 번이 돌아섰다.
그리곤 외친다.
“너희는 왜 여기에 있는가!”
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병사들의 피부에 소름이 돋는다.
“그저 무의미한 시간만 보내려고, 어떻게든 하루하루 허송세월로 청춘을 버리려고 입대했나? 하루 두 끼 꾸역꾸역 처먹으며 늘어진 뱃살이나 문지르러 왔냐는 말이다!”
“아, 아닙니다!”
울컥했는지 아까 이름이 불렸던 병사가 대답했다. 번은 빙긋 웃으며 그의 앞으로 갔다.
“샤이가.”
“네! 대공!”
“너는 천을 물들이는 일이 그리 좋은가?”
움찔!
그의 집안은 대대로 수도에서 왕실에 납품하는 옷감을 염색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솜씨도 좋고, 거의 독점이나 마찬가지여서 부유한 집안이었다. 번은 이름뿐 아니라, 그런 가정사까지 파악하고 있는 거였다.
“미천하단 뜻이 아니다. 하지만 사내라면 좀 더 큰 포부를 가져도 좋지 않겠는가 말이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것이다. 늘 행운이 찾아오는 건 아니니까. 바람처럼 저편으로 흘러가 버리면, 다시는 잡지 못하는 것 또한 기회인 것이다.”
꿀꺽.
그가 침을 삼키자, 번은 병사들과 거리를 벌렸다. 그리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로 가서 섰다.
“우리는 오늘 우연과 필연이 겹쳐 이 자리에 서 있다.”
번은 이제 슬슬 쐐기를 준비했다.
“말했다시피 나는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번의 목소리는 절절 끓었고,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움찔움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사람 마음을 자극했다.
“누군가는 염색을 하고, 누군가는 무두질을 하며 어느 누군가 찻잔을 만들 때.”
찰나, 번의 눈에서 빛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나는 전설이 될 수도 있다.”
“아..”
부르르.
절로 몸을 떠는 병사.
“전설..”
번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사내.
“······.”
꿈을 꾸듯 입을 벌리고 흠뻑 취해 있는 자까지.
번은 찬찬히 주위를 살폈다.
절반 이상 분위기에 취했다는 것을 느끼며 아주 깨끗한 미소로 웃곤,
“나를 따르라.”
팔을 뻗어 그들에게 내밀었다.
“그리하면 너희의 이름도 이 땅에 영원토록 남을 것이다.”
“······.”
“······!”
그 말을 끝으로 번은 돌아섰다.
뚜벅. 뚜벅.
볼일 다 봤다는 듯 미련없는 모습으로 그가 멀어져가자, 망부석처럼 서 있던 병사들 틈에서 뭔가가 비집고 튀어나왔다.
“우..와아아아아!”
그건 처음엔 날씬하고 뾰족했지만, 곧이어.
“우어어어..!”
“합시다! 해요!”
“나도 할 수 있다!”
“가자! 전설로..!”
우람하고 육중해졌고, 저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함성이었다.
사내들의 뜨겁고도 묵직한! 모르고 봤다면 유치하다 코웃음 칠 사람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곳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게 청춘 아니던가?
의리에 목숨 걸고, 한마디 말에 내 모든 것을 올인하는!
-참, 말 하나는 찰지게 잘 한다. 넌 그걸로 먹고 살아도 으리으리한 성 한 채는 차릴 거다.
악마의 말에 번은 웃으며 걸었다. 뒤에선 병사들이 감동의 도가니에 허우적거리는 아우성이 들렸지만, 동요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그가 의도하고 계획한 일이니까. 이 정도도 못 하면 황좌를 어찌 노릴까?
-근데, 진짜 저 많은 사람들 이름을 다 외운 거냐?
‘당연.’
이름뿐인가? 간단한 신상명세도 모조리 외웠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
“크크크..”
병사들과 거리가 멀어지자, 번이 소리내어 웃었다.
‘네가 말하지 않았나?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나는 네 마약과 드래곤의 사체로 만든 무구를 잘 이용해 특별한 훈련장에서 한 1년 바짝 구르면 된다고 했는데?
‘고작 그거론, 제국은 커녕 에비뉴도 상대 못 해.’
아무리 좋은 무기를 들어도 결국 그걸 쓰는 것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 몸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세계 최강이 되겠어.’
-그럼?
‘미쳐야지.’
답은 간단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어려운 것도 없다.
-미쳐?
‘곧 보게 될 거다.’
네놈은 상상도 못 하는 진정한 최강의 군대를.
번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걸음을 옮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로 가니 카시오페이아가 다소곳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바로 앞엔 드래곤의 알이 푹신한 천 위에 놓여 있었다.
“오셨어요? 상공相公.”
번은 그녀에게 가볍게 웃어주었다. 그러면서 가까이 다가섰다. 대공이라 부르다가 이제는 상공이라 칭하는 그녀. 어느새 그녀는 스스로가 번을 높이 세워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움직임이 있었소?”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팔을 두르며 앉는 번.
“예. 조금 전에 두 번이나 흔들렸었어요.”
드래곤의 생태에 대해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이었지만, 며칠 전부터 알이 심하게 요동치거나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손을 가만히 대고 있으면 안에서 툭툭 치는 게 와닿기도 하고, 귀를 가까이 대보면 무슨 꾸륵꾸륵 소리도 나는 것 같았다.
아마, 부화할 때가 되었나보다.
‘가만, 드래곤도 부리가 있었나?’
새로 산 경험이 많은 번이다. 그래서 안다. 안쪽에서 알을 깨려면 어찌해야 하는지를.
-드래곤이 무슨 부리가 있냐?
‘그럼 어떻게 나와?’
-그건 나도 모르지.
역시 이 악마 놈은 별 도움이 안 된다.
“으음..”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의외로 동물은 세상의 빛도 못 보고 죽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천적이 암컷을 노리기 가장 좋을 때가 바로 출산할 때이기도 했고, 그런 경우가 아니라도 고양잇과의 경우 어미가 태막을 벗겨주지 않으면 질식해 죽는 때도 있었다.
동물의 왕국 같은 다큐멘터리로 사슴이나 얼룩말이 태어나자마자 걸어 다니는 것만 보고 대충 넘겨짚는다면 그건 일부분만 본 거다. 요지는 여차하면 도와줘야 한다는 건데, 그 타이밍이 아주 중요했다. 육체가 완전히 구성되지 않았다면 그 도움 자체가 어린 것에겐 치명적으로 될 수 있으니까.
‘마법사라도 하나 잡아 와야 하나..?’
고민하는데,
벌떡-!
카시오페이아가 일어섰다.
“저, 저..! 상공!”
번도 몸을 숙이며 급히앞으로 튀어나갔다.
본 것이다.
쩌저적-!
알이 갈라지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