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의미 #
-너 설마, 저 껍데기에 연민을 느끼거나 하는 건 아니지?
악마는 이제 번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일반적인 인간들과는 차원이 다른 가치관과 개념을 장착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간 드래곤에게 보인 애착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기에 노파심에 말했다.
‘그럴 리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번은 피식 웃었다.
‘난 단지 어떻게 저걸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지 고민할 뿐이다.’
-그래! 그래야 너답지!
모든 동물은 죽어 다른 동물의 식량이 된다. 그렇게 자연으로 돌아가고, 다시 태어날 동식물의 밑거름이 되는 순환구조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여러 삶을 살아왔던 번이기에 인간 기준의 잣대를 그에게 들이밀기엔 어폐가 있었다.
-예로부터 드래곤의 비늘은 아주 단단해서 무기나 갑옷 따위를 만드는 데 쓰였다. 마법방어력도 훌륭해서 솜씨 좋은 전문가에게 맡기면 명품이 탄생하곤 했지. 뼈도 강철처럼 단단해 가공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상품上品이 나올거고. 물론 마법사들의 연구재료로도 훌륭하니까 아마 그 놈들은 눈이 뒤집히게 탐낼 걸?
옛이야기에서처럼 전설의 무구武具가 두둥!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소재보다는 월등하니 확실히 값지고 귀한 재료임엔 틀림없었다.
‘이 정도면 얼마나 나올까?’
-어림잡아도 100명분은 충분하지 않나? 물론 다루는 자의 솜씨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드래곤은 크다. 그러나 녀석의 몸통이 30미터라 해도 그걸 자로 잰 듯 뚝뚝 끊어 뚝딱뚝딱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위별로 강도나 재질도 다를 것이고, 워낙 늙은 녀석이었기에 쓸모가 없는 곳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니까.
“백이라..”
번이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야, 그거만 해도 엄청난 거라고! 얼마나 만들어 팔려고? 독한 놈.
‘돈은 많아.’
-많아도 더 많으면 좋은 게 돈 아니냐? 인간은 돈 욕심이 끝이 없던데?
드래곤의 보물만으로도 앞가림할 정도는 된다. 물론 악마의 말처럼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지금 번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금전적인 것보다는 다른 종류의 힘이 필요했다.
‘협상을 해봐야겠군.’
-누구랑?
‘누구겠냐?’
이 동네 짱이지.
번은 드래곤에게 손을 뻗어 비늘을 하나 또옥 떼어냈다. 아주 단단하게 붙어있었지만, 번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곤 그걸 입으로 가져간다.
꼬독, 꼬도독.
-캬캬캬! 네놈이 드래곤 비늘을 씹어먹는 최초의 인간일 거다!
형제가 죽으면 그 고기를 가족과 나눠 먹었다. 사마귀로 태어났을 땐, 형제들과 어미의 사체를 먹었고, 파리로 태어났을 때는 유년기를 구더기로 보내며 참으로 많은 것들을 갉아먹었었다.
그런 기억을 가진 그에게 이제 세상을 떠난 친구는 없다. 그저 그가 남긴 잔해만 남았고, 그걸 남은 사람이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것 자체가 먼저 간 녀석을 위하고 추억하는 것이란 것도 안다.
「상처가 났습니다.」
「오색마나가 지혈을 돕습니다.」
「상처를 치유합니다.」
새로운 건 뭐든 입에 넣고 보는 번이었기에 별 거부감은 없었다. 단지 돌도 씹어먹는 그의 입안에 상처가 날 정도로 드래곤의 비늘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까드득, 우드드득!
하지만 번은 그래도 씹어 삼킨다.
「새로운 성분 2종을 흡수했습니다.」
「육체에 좋은 성분을 받아들였습니다.」
「마법 성분을 추출합니다.」
번의 몸을 새롭게 성장시키는데, 드래곤의 비늘은 꽤 좋은 재료인가 보다. 일단 구하기도 무척 어려운 것이니, 이런 경우엔 있을 때 무조건 뽑아야 했다.
‘갑옷과 무기를 만들고 남은 것을 먹으면 되겠어.’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가죽을 남긴다 했던가? 드래곤은 번에게 비늘과 뼈를 남겨주었다.
.
.
.
일주일이 지났다.
아침이면 이제 몸서리칠 만큼 찬 바람이 불어왔다.
콩가의 겨울은 아주 매섭다. 우스갯소리로 이 추위 때문에 제국이 점령하지 않고 놔둔다는 말까지 돌 정도이니 말해 뭐할까.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 잘 적응하고 살아간다.
“자네, 그 소식 들었나?”
사슴 가죽을 무두질하던 사내가 말한다.
“뭐?”
그의 옆에선 오랜 친구이자 동료가 손질된 가죽으로 겨울용 장화를 만들고 있었다.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들면 올 겨울 누군가의 발을 따듯하게 지켜줄 것이다.
“궁에서 솜씨좋은 장인을 모집한다더군. 보수가 제법 괜찮다던데?”
“그래?”
“그것도 무려 반년 작업량이라더구먼. 어때? 이번 겨울은 좀 편하게 지내 볼텨?”
“그럴 수만 있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그런데 뭘 만드는 겐가?”
“그건 나도 모른다네. 일단, 찔러라도 볼 터이니 되면 같이 가시게.”
겨울을 준비하는 풍경은 매해 비슷했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가 좀 달랐다. 사람들은 둘만 모이면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그것들이 퍼져나가며 여간 뒤숭숭한 것이 아니었다.
“뭐어? 공주님이 드래곤의 알을 품었다고?”
“목소리 좀 낮춰!”
“어, 어어! 알았으니까 자세히 말해봐!”
“내 사촌의 사촌이 궁에서 일하는 거 알지? 그 애가 직접 봤다는 데 말이야.”
아무리 단단한 벽도 쉽게 뚫어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소문이다. 에비뉴와 연합해 제국과 전쟁을 할 것이라는 소식은 이미 파다하게 퍼져있었는데, 그것도 조마조마 불안한 판국에 괴소문이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에비뉴 태자님이 부리는 드래곤이 죽었다고?”
“그렇다는데? 요즘 통 보이지도 않고, 고놈 코 골아대는 소리도 없잖아?”
“어? 그러네?”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30m짜리 몸에서 뿜어내는 울림이라 야심한 밤엔 궁을 넘어 수도 곳곳에 드래곤의 코골이가 들리곤 했는데, 그게 어느 순간 뚝 끊긴 것이었다. 아무리 무서운 생물이라지만, 그게 내 편이니 참으로 든든했었는데, 묘하게 서운해졌다.
그런 사람은 비단 궁 밖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국왕도 마찬가지였으니, 드래곤이 죽었다는 보고는 받았지만 믿고 싶진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당사자만 할까?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죽음이 있어야 새 생명도 있는 것이니.”
왕의 말에 번은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 표정에 한점 가식이 없어 왕은 속으로 감탄한다.
‘참으로 강한 녀석이구나.’
부리던 드래곤을 잃었으니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을 진데.
“그래, 공주는 어떠하느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공주는 몸조리 중이었다. 출산을 했으니 당연하겠지만, 속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의심할 순 없다. 왕도, 대신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피벗 공작도, 명망 있는 마법사까지도 모두 공주가 드래곤을 잉태하여 낳았다 믿고 있었으니까. 그 속마음이야 어찌 됐든, 표면적으론 이렇게 전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다행이구나. 대공이 잘 보살펴주어야 한다. 알겠느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 가여운 아이다.”
가슴이 알싸해져 오는 여운을 남긴 왕의 말에 번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전하.”
“할 말이 있느냐?”
“예.”
“말해보라.”
번은 부탁을 하러 왔다.
그러나 그걸 직설적으로 말할 위치는 못 되었다. 공주와 결혼한 부마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에비뉴 사람이었고, 콩가에 정치적 입지도 권한도 없었으니까. 그저 조용히 살아 주는 것이 모두에게 편한 그런 신분이라는 것.
하지만 이 남자가 어디 그럴 사람인가?
“최근 두 가지 보물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드래곤의 사체와 공주의 알을 두고 하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내, 그래서 지키라 일천 병력을 상주시켰다.”
“그 하늘과 같은 은혜 충분히 아오나, 불안한 것도 사실이옵니다. 당장은 무탈하겠지만, 사람 일이.. 아니, 사람 마음이 다 같지 않지 않습니까?”
왕은 기분이 상했는지 미간을 좁혔다. 병사를 일천이나 붙여줬는데, 그걸 못 믿으니 마치 나를 못 믿겠다는 말로 들린 거다. 하지만 번은 그것이 아니라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저는 장기적인 목표를 두어야 한다 생각하여 말씀 올렸습니다. 알려진 대로 드래곤은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 동물입니다. 감히 어느 누가 전하의 일천 병사를 뚫고 몹쓸 짓을 벌이겠느냐마는 훗날이 어찌 될진 짐작할 수 없다 생각했습니다.”
번의 그럴 듯한 이야기에 왕의 주름이 조금 누그러졌다.
“흐음, 그래서?”
“보내주신 일천의 병사 중 일백을 선발해 드래곤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종속하라는 말이더냐?”
번은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용기병을 꾸려 공주와 알을 영원히 지킬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전하!”
대신들이 주변에 없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소란이 일었을 타이밍이었다.
명분은 좋다. 공주도 중요했고, 알 역시 이제 콩가 왕국의 상징이나 마찬가지가 될 터이니까. 하지만 이 의견을 에비뉴의 태자가 냈다는 것이 문제였다.
“용기병이라..”
왕은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고민했다.
“고작 일백으로 되겠느냐?”
“너무 많으면 유지비용도 천문학적으로 불어날 것이며, 잉여인력이 될 가능성도 큽니다. 왕실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이기 때문에 그 이상의 무력은 과하다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지.”
오히려 더 달라 했으면 왕은 의심했을 것이다. 궁 한복판에 타국의 태자에게 수백의 무장세력을 쥐여 줄 순 없는 거니까.
그렇다. 결국, 번은 이곳 콩가에서 철저하게 타인인 것이었다.
“대신들과 상의해보겠다. 한데, 그 일백 용기병을 네가 직접 관리할 것이냐? 인원 차출은 어렵지 않겠으나,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하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현 왕실의 재정으론 그런 독립적인 부대를 지원해 줄 여유가 없다.”
네 아비가 시킨 일 때문에 전쟁준비를 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하니까, 라는 말은 생략해도 알아들었다.
“통솔권만 주신다면, 그 부분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대 또한 그 용기병에 참여하겠다는 것이더냐?”
번은 믿음직한 얼굴로 끄덕였다.
“저 또한 공주를 지켜야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누구보다 제가 솔선수범해야 할 일이니까요.”
사위가 장인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아부였다. 그래서일까? 스르륵 표정이 풀어진 왕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솜씨가 좋은 기술자를 모으고 있다 들었다.”
“그러하옵니다.”
“그 일은 왕실에서 도와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각 마탑에서 왕을 졸라대고 있었다. 드래곤의 사체를 어떻게든 만져라도 보려고 안달이 난거다.
하지만 왕으로서도 그것에 대한 권한이 아주 애매했다. 그 드래곤은 에비뉴의 태자 소유였고, 에비뉴가 작은 나라도 아니었기에 마음대로 하기에도 거북했다. 게다가 왕으로서도 드래곤의 부산물이 가지는 금전적 가치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말씀은 성은이 망극하오나, 친구 가는 길.. 직접 배웅하고 싶습니다.”
“······.”
기술자들 모아 성대한 장례라도 치르려는 건가? 당연히 아닐 거다. 그 시체를 어떻게든 써먹을 것이 분명한데, 저리 말하니 숟가락을 얹을 틈이 없었다.
“알겠느니라. 각별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대공은 하루빨리 슬픔을 벗어던지고 현실에 직시할 수 있도록 하라.”
“하해와 같은 너그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전하.”
왕은 나가보라는 듯 손을 털었다.
번이 깊이 머리를 숙여 예를 갖추고 독대를 끝내자, 곧바로 다른 사내가 들어왔다.
피벗 공작이다.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까?”
“아니, 공작의 말 대로였소. 드래곤의 사체를 넘길 생각은 없어 보이더군.”
피벗 공작은 웃으며 끄덕였다.
“그것은 어차피 빛 좋은 개살구이옵니다. 우리가 차지해봐야 목구멍으로 넘길 수도 없지요. 그러나 대공이 이곳에 있는 한, 그것 또한 콩가의 땅 안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전하. 사실 진짜 가치 있는 것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알이 부화하기만 하면 죽은 드래곤의 몸뚱이 따위는 노릴 이유도, 욕심도 없다.
“병사 일백으로 용기병을 만들고 싶다더군.”
“그러라고 하십시오. 고작 일백으로 무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차라리 그들을 화려하게 치장하여 각종 행사에 내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호오. 그건 좋은 생각이오.”
“예, 그들을 그런 식으로 쓴다면 정예병이 따로 시간을 쏟지 않아도 되니 일거양득일 것입니다.”
허울뿐인, 그저 보기 좋은 광대처럼 꾸며 눈요깃거리나 시킬 생각이었던, 용기병.
하지만 둘은 모르고 있었다.
궁에서 나간 번이 악마와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를.
-크크크! 착착 진행되는구나! 가자! 내가 너에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