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25화 (125/177)

# 아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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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일엔 정치가 개입한다.

그게 어떤 의도든 간에 잘 포장하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게 돌고 돌면 전설이 되기도 한다.

“뭐라?”

대청이 발칵 뒤집혔다.

“그, 그것이..”

왕은 답답한지 당장이라도 앞으로 뛰쳐나가 사내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꾸욱 참고 다시 물었다.

“다시 말해보라!”

이 자는 공주의 궁을 지키는 경비병이었다. 그가 직접 본 것을 고하라 하였는데, 왕의 앞이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너무 해괴한 사안이라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심하게 더듬거렸다.

“고, 공주마마께서..”

알을 낳았다.

“이런 쳐 죽일 노옴! 그 무슨 망측한..!”

왕이 벌떡 일어섰다.

“사, 사실이옵니다. 저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목격했습니다!”

잠시 후.

목격자로 소환된 궁녀와 경비병들은 두서없긴 했지만, 한결같았다. 공주가 엄청나게 큰 알을 낳았는데, 대공께서 직접 받으셨단다.

“······.”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다.

드래곤을 부리는 사위. 사실 그것도 참 이상한 일이긴 했다. 인간이 어찌 그런 엄청난 짐승을 길들이겠나? 혹시 그 놈, 인간을 가장한 용인龍人인가? 아니면 어떤 수작을 부렸나? 설마 공주가 드래곤과..

아니,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머리가 복잡해지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 말이 가능한 일이오?”

마침 다른 일로 대청에 들어와 있는 명망 있는 마법사에게 왕이 묻는다.

“······.”

모두의 시선을 받자, 마법사는 코를 긁으며 입맛을 다셨다.

“글쎄요.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없긴 해도.. 자세한 사정은 직접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지금 확실한 사실 하나. 드래곤이 죽었단다. 뭐,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언제 그리돼도 이상할 건 없었지만, 공주에게 만령주머니를 건네준 것이 자신이었기에 마법사는 찝찝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대가 직접 가보시겠소?”

“지금 바로 그리하겠습니다.”

“그래주면 정말 고맙겠소!”

왕조차 함부로 대하지 않는 존경받는 마법사는 곧장 대청을 나와 공주가 사는 궁으로 향했다.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기에 마차도 필요 없다.

‘알을 낳았다?’

물론 이런 얘기가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에도 종종 등장하는 래퍼토리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의학적으로 가능하냐 묻는다면, 글쎄.. 엘프 같은 유사인종이라면 몰라도 드래곤은..

심지어 공주에겐 남편이 있질 않은가?

“거, 참..”

공주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자주 드나든 곳이기에 길을 찾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이며 문을 두드리는 마법사.

“파샤.”

안에서 나온 익숙한 얼굴의 시녀를 보며 반갑게 웃었다.

“아! 백작님.”

“공주님께서는?”

“쉬고 계셔요. 들어오세요.”

이내 거실로 안내된 그는 본다.

“······.”

남녀가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는 광경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

한복판에 놓인 커다란 알.

“허어..”

드래곤의 알이었다.

이 크기, 이 생김, 이 분위기. 책으로만 보아오던 그였지만, 드래곤에 대해 오래 연구했기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다코비치 백작님이세요.”

먼저 카시오페이아가 번에게 그를 소개했다. 멍하니 알을 바라보던 다코비치는 급히 번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

“아아, 당신이 그 유명한 마법사군요?”

번의 목소리는 묘하게 냉담하다. 그래도 예의가 없거나 하진 않다. 일어서서 팔을 뻗어 자리로 안내하는 번.

“어찌.. 된 일인지 전하께서 궁금해하십니다.”

차 한 잔 내어주지 않는 푸대접을 느낄 여유도 없다. 솔직한 심정으론 체면이고 뭐고 저 알에 찰싹 달라붙어 연구하고 싶었으니까.

“제가 낳았어요.”

카시오페이아는 아주 확고한 어조로 그리 말했다. 번이 시킨 일을 이제는 그녀 스스로도 세뇌가 되었는지 아주 잘 해내고 있었다.

“······.”

“······.”

그녀는 처녀였다. 하지만 그건 그녀와 번만 알고 있는 사실. 공식적으론 유부녀였으니까.

“저렇게 큰걸..”

어른 몸통보다 큰 알을 낳았단다. 다른 사람이 이리 말했다면 웃기지 말라며 코웃음을 쳤겠지만, 그녀는 공주다. 아무리 허무맹랑한 말도 어떤 사람이 하느냐에 따라 진실로 둔갑하고 현실이 되기도 한다.

막말로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출산을 했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낳은 게 알이라니 또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본래 조금만 이상하면 의심이 들어도 통째로 허무맹랑할 땐 그러려니 해버리는 게 사람이니까.

“허허..”

카시오페이아의 부릅뜬 눈이 참으로 어색해 다코비치는 번에게 시선을 돌렸다. 공주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에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하지만.

“뭘 원하는 거요?”

번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일의 진위를 전하께서..”

“진위는 무슨 진위? 공주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거요? 지금 겨우 그따위 말을 하고자 예까지 오신 거요? 그렇소?”

쏟아부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지는 마법사다. 하지만,

‘이놈.’

번의 눈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이 마법사가 그 수상한 주머니를 준 놈이란 걸 이미 카시오페이아에게 들었다. 뭐 결과적으론 그게 있었기에 알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왔구나.’

당장 목덜미를 잡고 턱을 몇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부마 체면에 그럴 순 없으니.

“공주와 친분이 있다 들었는데, 참으로 모질구려. 공주를 그리도 모르오?”

안다. 착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카시오페이아. 그래서 더 혼란스럽다.

“계속 이런 말을 꺼낼 거면 돌아가 주시오. 공주는 출산한 몸이오. 안정을 취해야 하오.”

때마침 아랫배를 잡으며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는 카시오페이아를 보며 다코비치는 주먹을 꼭 쥐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왕에게 무슨 욕을 먹을지 모른다.

“불경하다는 것은 알지만, 소신이 잠시 진찰을..”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시오페이아가 벌떡 일어섰다.

“다코비치 백작! 참으로 무례하군요!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있었나 봅니다!”

온순한 그녀가 성을 내자, 다코비치는 진심으로 놀랐다. 그러면서 알싸한 피 냄새를 맡았다. 오랜 연구활동으로 그의 후각은 아주 뛰어났는데,

‘나중에 다시 와야겠군.’

일단 오늘은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좋지 않았으니까. 최근 누군가에게 이리 냉대를 받아본 경험이 없었기에 더 적응이 안 된다.

“커험, 알겠습니다. 쉬셔야 하는데. 늙은이가 주책 맞게 그것도 모르고.”

그는 일어섰다.

“몸조리 잘하셔야 합니다. 공주님.”

아련한 눈으로 카시오페이아를 본 그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알이 보인다.

그 짧은 순간, 그의 눈동자가 빛났다.

‘스캔.’

그의 경지쯤 되면 주변이 눈치채지 못하게 생명탐지 같은 하급마법을 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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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이 확실합니다.”

“허어..”

“그것도 이미 팔다리와 날개가 생성되어 있었습니다.”

“허어어..”

공주의 궁에서 돌아온 마법사는 대청을 뒤집히게 할 이야기를 가지고 왔다.

“생동있게 꿈틀거리고 있었고, 발톱까지 자란 것을 보면 곧 부화할 것입니다.”

마법으로 밝혀낸 것은 여기까지였다. 콩가 왕국 제일의 마법사로 평가받는 그가 직접 보고 와서 이리 말하는데, 어느 누가 딴지를 걸까?

“허어.. 허허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때였다.

왕의 근처에 있던 피벗 공작이 말했다.

“전하.”

“······?”

왕이 그를 보았다.

“이건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번이 계획하고 감독했으며 연출한 무대에 연기자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공작?”

“드래곤이라 하였습니다. 그것도 늙고 병든 드래곤이 아니라 이제 막 태동한!”

공주가 드래곤의 알을 낳았다? 이건 포장할 필요도 없다. 콩가 왕국이 드래곤을 보유하는 것도 모자라, 부모가 되는 거 아닌가?

“백성들은 전율할 것입니다.”

공주마마께서 드래곤을 품었다! 이는 대륙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으며 타국은 감히 흉내조차 못 내는 일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증거가 버젓이 있지 않은가! 명망 있는 마법사가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까지 했고!

“드래곤은 오천 년을 산다 하였습니다. 이건 대 콩가 왕국이 앞으로 무한히 번창할 길조吉兆이며 하늘이 내리신 복福이옵니다!”

-과연.

-그도 그렇습니다.

-허어! 우리도 이럴 진데, 백성들은 어찌 생각하겠소이까?

대청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과연 그렇다. 나쁘게만 볼 일이 아니지 않은가?

왕은 수염을 손으로 쓸며 등을 기댔다.

'이거 잘하면?'

불쑥 치켜든 생각 하나. 그 역시 평생을 정치판에서 살아온 사내다. 내색은 안 했지만, 에비뉴의 태자가 드래곤을 타고 왔을 때 어찌나 부럽던지. 과연 에비뉴인가?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을 정도였다.

“그 어린 드래곤이 장성할 수 있도록 잘 돌보아 왕실의 수호자이자, 심벌로 하여 대대적으로 홍보해야 하옵니다!”

국격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위상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값진 것 아니던가. 왕실의 문장이나 군대의 휘장, 상징 같은 것들도 전부 드래곤으로 바꿔, 콩가 자체가 드래곤이라는 이미지를 심으면 이제 대륙의 모든 이들은 콩가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드래곤과 동일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피벗 공작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코비치는 우려를 표했다.

“보물은 도적을 부릅니다.”

“..으음.”

흥분해 날뛰던 피벗 공작이 차분해졌다.

“다른 왕국은 몰라도 제국은 어떤 흑심을 품을지 모르니, 당분간은 소문이 흘러나가는 것을 막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왕이 끄덕였다. 확실히 그 말도 맞았다.

“좋다.”

왕명이 내려졌다.

“공주의 궁에 일천의 무장병력을 상주시키고, 허가 없인 그 어떤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

딸애가 드래곤을 낳았다는 게 아직 믿기진 않지만, 그게 보물이라는 건 바보도 안다.

드래곤의 알.

감히 그걸 누가 훔치겠느냐마는 지금의 경우엔 분노해 찾아올 어미 드래곤도 없는 상황이다.

‘카시오페이아.’

왕은 딸애를 떠올리며 우렁차게 외쳤다.

“공주가 안정되는 대로 내 직접 찾아갈 터이니 매시간 보고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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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기대 새근새근 잠든 카시오페이아의 얼굴을 보며 번은 씨익 웃었다.

-악마 같은 놈. 아주 완벽하게 세뇌했구나. 이게 먹힐까? 인간들이 그리 멍청하다곤 생각하지 않는데?

‘악마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 참 묘하네.’

“크크크..”

그녀가 깨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웃은 번은 의자에서 일어나 걸어갔다.

알. 드래곤이 남긴 것.

녀석은 죽었지만, 새로운 생명이 대체할 것이다. 생을 거듭해서 살아본 번이었기에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거나 하진 않다. 녀석 또한 지금 이 순간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니까.

‘지렁이로 태어날지도 모르지.’

자신이 전생에 드래곤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새 같은 거한테 잡아먹힐지도.

번은 알에 손을 올렸다.

여러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 그였기에 이 단단한 껍질 안에 생명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네이..”

이미 녀석의 이름은 정했다.

늙어 골골대던 그 육신 대신 새로 태어나 마음껏 저 하늘을 활개 쳐라.

세상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 아니겠는가? 녀석은 떠났지만, 같은 이름을 쓰는 그 녀석의 후예를 키우다 보면 잊힐 거다. 그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이자, 이치 아니겠는가.

번은 알을 바라보며 잠시 미소 짓다가 밖으로 나갔다. 카시오페이아가 깨는 바람에 멈춰둔 것이 있다.

천천히 걸어 정원으로 나간다.

누구에게도 손대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기에 아직 녀석의 시체는 그대로 정원에 남아있다.

“······.”

원래도 그리 따듯한 피부는 아니었지만, 이제는 차다 못해 돌덩이 같다.

“흐음.”

번은 드래곤의 거대한 몸을 보며 팔짱을 꼈다. 하트에 축적한 어둠은 이미 알에 다 넘겨버려 흡수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고이 묻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걸 어쩌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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