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24화 (124/177)

# 엄마 #

-완전.. 눈이 뒤집혔는데?

악마가 말했고,

크르르르르.

평소 그녀와 잘 지내던 드래곤도 경계했다.

“······.”

하지만 번은 아무 대꾸없이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시오페이아. 결혼한 사이라지만, 딱히 그녀에게 이성적 호감을 느낀 것도 아니었고 그녀가 처한 상황에 연민을 가진 것도 아니었지만, 저렇게 바보처럼 뭔가에 휘둘리는 건 못 봐주겠다.

-어이, 온다! 일단 피해!

‘피하긴 뭘 피해?’

그의 저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내 여자다.”

으르렁거리는 짐승처럼 콧등을 씰룩이며 성큼 그녀에게 걸어가는 번.

그는 문득, 사슴 무리를 이끌었을 때가 떠오른다. 무리의 장匠 위치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도전을 이겨내며 버텨냈던 그 때. 젊은 수컷들은 그를 보며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느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았다.

암컷들은 끊임없이 분란을 일으켰고, 원할 때 아무 때나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늘 절벽 꼭대기에 올라 다른 수컷들이 접근하나 속 좁고 편협하게 경계하고 있다 생각했겠지만, 그것만이 진실은 아니었다.

새끼들이 뭘 하고 있나 감시했고, 무리를 위협하는 맹수가 도사리는지 파악해야만 했다. 가끔은 암컷들 등쌀에 내가 경비원 따위가 아닐까? 고민도 했지만,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언제나 그 절벽 꼭대기에서 먼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것이 대장이니까.

가장家長은 그런 거니까.

지금도 마찬가지.

카시오페이아에게 일말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하더라도, 그녀는 그의 아내였다.

내가 지켜야 할 테두리 안의 사람.

“······?”

번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다가오자, 되려 그녀가 주춤 물러난다. 아무리 만령萬靈이 깃들었다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번을 예민하게 감지한 것이었다.

위험한 사내.

수많은 영혼이 모였지만, 그 하나의 어둠을 감당할 순 없다.

부르르.

그녀의 긴 속눈썹이 어떤 갈등에 떨리다가, 움찔! 몸의 근육이 반응할 때, 번의 몸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와락.

도망치지 못하게 그녀를 끌어안는 번.

“케에에엑..!”

그녀의 것이 아닌 기괴한 목소리가 다급하게 터지고, 벗어나려는지 필사적으로 꿈틀댔지만 우람한 번의 팔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구속했다.

스스스스스스.

곧장 번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변의 기운을 감지합니다.」

「대상을 흡수합니다.」

그녀는 빙의憑依였든, 뭐든 육체 자체는 변한 것이 없었다. 워낙 근력도 약했고, 몸집도 작은 여자가 뭘 하겠나?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귀신들린 그녀에게 공포를 느끼겠지만, 번은 아니다.

벅벅벅벅벅!

그녀의 손톱이 그의 등을 미친 듯이 긁어대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여기다! 여기 공주님께서 계신다!

-히이이익?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근처에 있던 경비와 궁녀들이 정원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러자 번은 고개를 옆으로 들어 드래곤을 올려본다. 서로의 눈빛만으로 의도를 파악하는 동료.

크르르르르..

-엄마야!

-이, 이놈이!

드래곤이 위협적인 울음을 내며 날개를 번에게 모았다. 손으로 달걀을 감싸 쥐듯 그렇게 타인의 시선을 차단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번은 다시 카시오페이아를 보았다. 지금도 발악하고 있지만, 그녀의 눈에 깃든 것은 혼란이었다.

그런데, 일순간 그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다.

“······!”

번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은 것이다.

크르르르.

드래곤은 주변 사람이 다가오지 못하게 콧김을 뿜었고, 그렇게 녀석의 품에서 남녀는 입을 맞췄다.

.

.

“허어어억-!”

침대에 누워있던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하아, 하아..”

‘뭐, 뭐지? 뭐야?’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그녀는 온몸이 흠뻑 젖어있었는데, 끔찍한 악몽이 핑크빛 로맨스로 바뀌자, 놀라 잠에서 깬 거다.

-내 여자다.

너무도 생생한 꿈.

아니, 이건 기억인가?

“파샤! 파샤! 있니?”

그녀는 급히 시녀를 불렀다.

늘 주변에 있어야 할 파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

잠깐 기다리던 그녀는 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라락.

잠옷을 벗었다. 끈적한 땀이 아직 다 가시질 않아 번들거리는 몸은 묘하게 아름답다. 그녀는 옷장에서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을 꺼내 입었다. 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후다닥 밖으로 향한다.

가야 했다.

이 꿈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헐레벌떡 도착한 정원.

“..아?”

그녀가 우뚝 섰다.

그러고 보니 신발도 없다. 뭔가가 엄지발가락을 따끔하게 찔렀지만, 그걸 내려볼 정신도 없었다.

“아아아..?”

사람은 1초에 수억을 연산한다. 시각으로 받아들인 정보뿐 아니라 오감으로 느낀 모든 것을 종합하여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그녀 역시 지금 직감했다.

“아..아...”

그녀의 몸이 허물어졌다.

정원.

한 남자가 서 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거대한 드래곤의 머리가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드래곤이 숨을 쉬지 않는다.

드르렁, 드르렁. 늘 듣던 그 특유의 숨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건 꿈이 아닌 거다.

마법사의 주머니, 혼령들, 그리고..

“나, 나..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사이 무엇이 바뀌었는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드래곤이 죽었다.

“아아아... 흐윽..!”

그녀가 얼굴을 땅에 묻고 서럽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뭔가 다 나 때문인 것 같았다. 괜히 쓸데없는 일을 벌여, 더 살 수 있는 드래곤을 죽인 것 같다.

엄마도..

“아아아아!”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크게 울렸다.

최근 몇 년, 그녀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그녀의 몸이 움찔한다. 누군가 그녀의 등을 감싼 것이다.

“······.”

번이었다.

“미, 미안해요. 나 때문에 네이가.. 네이가..”

번은 온화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에 가슴이 와르르 무너진 카시오페이아는 번의 품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미안하고, 괴롭고, 서럽고.. 견딜 수가 없었다.

무려 30분 이상을 그렇게 카시오페이아는 몸속의 수분을 전부 눈물로 내보내는 듯 했다.

“이제 좀 진정이 되오?”

“..끄윽, 끅..”

번의 다정한 목소리에 또다시 울음이 터지려는 그녀의 몸을 번이 가볍게 일으켰다.

“왜 벌써 일어났소? 푹 쉬어야 하는 것을.”

그녀를 침실로 옮긴 것이 몇 시간 되지 않았다.

“정말.. 미안해요. 저는..”

번은 눈물 콧물 범벅된 그녀의 얼굴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준 뒤 가볍게 두 팔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앗?”

순식간에 누운 자세로 번의 품에 안기자, 눈을 크게 뜨는 그녀에게 번이 말했다.

“피가 나고 있소.”

번의 시선을 쫓자, 자신의 엄지발가락에서 빨간 핏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괜찮아요.”

그녀가 말했다.

드래곤이 죽었는데, 이깟 상처가 대수인가.

하지만 번은 그녀를 내려주지 않았다. 대신 정원 한쪽을 향해 걸어갔다. 드래곤 뒷다리가 있는 방향이었는데, 볼록하고 동그란 바위에 그녀의 엉덩이를 내려준 번은 카시오페이아의 앞에 쪼그려 앉아 상처를 봐주었다.

그가 발을 만지고 있어 괜히 부끄러워진 그녀의 얼굴이 더 빨갛게 변했다. 문득 본 그의 입술. 아까 꿈에서 본 그게 떠올라버린 거다.

첫 키스.

이젠 그게 꿈이 아니란 걸 아니까.

“따끔할 거요.”

“앗, 아파...요.”

가시를 뽑아낸 번이 옷자락을 부욱 찢어 그녀의 발가락을 싸맸다. 상처가 깊지 않아 이 정도만 조치해도 금방 아물 거다.

훌쩍.

그녀가 코를 들이마시자, 번의 손이 그녀의 얼굴로 다가와 눈꼬리를 훔쳐주었다.

“세상 모든 동물은 언젠간 죽는다오.”

번의 담담한 말에 카시오페이아는 다시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울어도 마르질 않는다.

“그렇지만.. 네이는..”

“당신이 잘못한 것은 없소. 물론 며칠 더 살 수 있었을진 모르지. 그러나 오랜 버티지 못했을 거요. 녀석도 그걸 알고 있었고.”

5천 년이나 산 영물靈物이다.

번 또한 녀석을 보내긴 싫었지만,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

“엉엉..!”

또 울음이 터졌다. 번의 목을 끌어안고 서럽게 흐느끼는 그녀는 시야에 드래곤이 들어오자 더욱 목청을 높였다. 싸늘하고 딱딱하게 굳은 드래곤의 모습이 믿기질 않았다.

번은 차분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등도 토닥였다. 아내가 아니라 어린 여동생을 돌보는 기분이었지만, 그는 알고 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유아기를 기억하는 그에게 이건 억지로 쥐어짜 낸 자상함이 아닌, 내 식구에게 해야 할 당연한 마음이라는걸.

그래, 내 식구.

번은 그녀의 등을 쓸며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말한다.

“당신이 정신을 잃었을 때..”

「그것들을 내게 줄 수 있겠나?」

카시오페이아에게서 뽑아낸 만령을 드래곤이 원했다.

이 쓰레기를 어디에 쓰려고?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지만, 드래곤은 마치 웃는 것 같았다. 표정을 지을 수 없는 파충류 같은 놈이지만, 분명 번은 그걸 느꼈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그것들을 이용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영혼은 때때로 그 무엇보다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하니까. 그렇게 많은 수라면 하나쯤은 잉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뭐가? 되물어도 녀석은 설명해주지 않았다. 흡수해도 힘이 되지 않는 쓰레기 영혼 따위 딱히 필요도 없었던 번은 카시오페이아를 내려놓고, 드래곤에게 다가가 모은 령을 어둠과 함께 불어넣어 주자,

끄으으으응.

드래곤이 앓는 소리를 낸다. 멈칫, 걱정되어 괜찮냐며 물었지만,

「계속해. 효과가 있다.」

녀석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대면서도 번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고, 1시간쯤 지났을까?

포옹, 뭔가가 녀석의 꽁무니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

진짜 놀랬다. 단 한 번도 이 녀석이 암컷일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 알을 낳았어! 드래곤이 알을 낳았다고!

악마도 놀랐다.

「오래전 사산한 아이다. 인간의 령을 담고 내 모든 마력을 쏟아 다시 깨우긴 했지만, 부화하는 것은 네게 달렸다. 아마.. 저급하고 하찮은 인간의 영혼일 테지.. 아니 어쩌면 태어나는 순간, 드래곤의 방대하고 광활한 정신을 버텨내질 못하고 미쳐버릴 거다. 그걸 막고, 가능케 하려면 사랑과 정성이 필요해. 타락한 영혼이 맑고, 온전하게 바뀌길···.」

포기하지 마. 널 이대로 보내진 않을 거다. 번이 말했지만, 드래곤은 머리를 흔들었다.

「모든 것은 돌고, 도는 것이다. 너와 함께 한 시간, 짧지만 즐거웠다. 저 아이에게도 같은 것을 느끼게 해줘.」

붙잡고 싶었지만, 드래곤의 마지막 말이 번의 가슴을 쳤다.

「나는 저 아이의 몸속에서 계속 살아갈 테니.. 내 모든 마력을 담았으니, 나의 일부이기도 하다.」

어떤 마법적 메커니즘으로 이게 가능한진 모른다. 하지만 녀석은 오래전 유산한 알을 다시 세상 밖으로 꺼냈고, 자신의 드래곤 하트에 모인 모든 힘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부탁했다. 엄마로서.

「너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아, 알이요?”

온몸에 소름이 돋아 묻는 카시오페이아.

“그렇소.”

오싹함이 등골을 타는 느낌에 부르르 떤 그녀가 급히 외쳤다.

“그, 그 알은 지금 어디에 있죠?”

번이 그녀의 하반신 쪽을 바라보며 웃는다. 그러고 보니 아래가 서늘했다. 아차! 속옷도 없이 얇은 원피스 차림이란 것을 이제 알아챈 카시오페이아가 다리를 모으며 얼굴을 푹 숙이는데,

“어어어?”

보인다.

자신이 아까부터 앉아 있던..

“허업..!”

알을...

“꺄아아악!”

벌러덩 뒤로 넘어지는 그녀를 보며 번이 빙긋 웃으며 말한다.

“잘해봅시다.”

드래곤은 말했다.

이 알이 정상적으로 부화하려면 사랑과 정성이 필요하다고. 애석하게도 모든 방면에 다재다능한 번이었지만, 이쪽으론 안타깝게도 재능이 없다. 하지만..

“내, 내가요?”

여기 적임자가 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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