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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123화 (123/177)

# 잉태 2 #

찰칵, 찰칵 톱니가 맞물리듯 번의 육체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몸의 중간 즈음 위치하던 어둠은 활화산처럼 폭발하며 전신으로 퍼져 갔고, 오색마나와 신성력은 찬란한 어둠이 잠잠해지길 기다리듯 숨죽였다.

「모든 세포가 어둠에 반응합니다.」

「골수에서 어둠을 품기 시작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바뀌었는지는 몸을 움직여보며 확인해야겠지만, 일단 큰 변화가 예상되었다.

「이제부터 중단전의 초고밀도 정수를 이용해 ‘오러’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중단전의 초고밀도 정수를 이용해 ‘호신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메시지가 어떤 시스템으로 작동하는진 모르나 번의 능력과 살아오며 쌓인 스킬, 행동패턴과 잠재력까지 분석해 직관적으로 출력했다.

“어둠의 오러라..”

몸속의 어둠이 자리 잡자, 눈을 뜬 번이 손을 보며 집중한다.

우우우우우우-

귀곡성 같은 가느다란 소음이 터지며 그의 손이 검게 물든다. 어둠이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육체를 보호하는 호신기가 둘린 것이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반짝, 반짝.

새까만 조약돌이 반짝이듯 빛이 나는 손톱을 보라. 오러다. 강철도 찢을 수 있는 무기武氣의 결정체가 이렇게 맺혀있는 것이었다.

-오오오오! 흑黑강을 완성했구나!

“흑강?”

-그래! 마계에서도 군주나 대괴수급은 돼야 쓸 수 있는 기술이다! 신성력만 아니라면 그걸 부술 수 있는 수단은 얼마 없을 거야! 반대로 너는 무엇이든 찢어발길 수 있게 된 거지!

“흐음.”

번은 손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기운을 풀었다. 이게 그리 대단한 것인지 아직 실감이 나진 않는다. 신성력에 취약하다는 것도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고. 어쨌든,

“사냥에 좀 더 수월해지려나?”

-당연하지! 그놈들은 이제 네 기운을 느끼는 것만으로 다리가 굳을 거다! 하지만 조심해야 해. 기운이 강한 만큼 널 느끼는 존재들도 있을 거다. 사제 나부랭이나 팔라딘 같은 놈들 말이야. 마법사의 어둠 속성 탐지도 주의하고!

“그렇군.”

번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다가 우뚝 선다. 인기척을 느낀 거다.

잠시 서서 기다리니, 똑똑 노크가 들려왔다. 카시오페이아다. 문 뒤의 숨소리만 들어도 그녀를 파악할 수 있다.

“······?”

이 방으로 그녀가 찾아온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녀는 번번이 발길을 돌려 떠났었는데, 이렇게 문을 두드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은 잠겨있지 않다.

딸깍.

고리를 당기자,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방안을 비춘다.

“카시오페이아.”

번은 어른스럽다. 어려서부터 황실에서 자랐으니, 보고 배운 것이 그렇다. 심지어 그는 아주 많은 삶을 살아왔다. 비록 그것이 대부분 동물의 그것이라 할지라도 나이를 먹으면 인간이나 사슴이나 의젓해지는 것은 똑같다. 그래서일까?

“어쩐 일이오?”

고작 1살 차이였지만, 번은 그녀와 비교하면 한층 높은 연배로 느껴졌다. 카시오페이아 역시 차분한 스타일인데도 불구하고 번의 앞에 서면 괜히 아이가 되어버리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애가.. 아파요..”

웬만해선 말을 하지 않는 그녀가 입을 열었다.

“······.”

5천 살 먹은 드래곤을 ‘애’라고 칭하는 그녀의 머릿속이 궁금했지만, 설명우로 살 때 아버지가 해주신 말을 잊지 않고 있다.

-여자는 말이다. 우리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야. 설득하려고 하지도 말고, 맞서지도 마. 그냥 받아들이는 거다. 그게 평화를 지키는 지름길이니까.

아버지는 명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엄마도 여자야. 알겠냐?’ 그 말을 끝으로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씨익 웃었는데, 그땐 잘 몰랐지만 이젠 안다.

남자, 여자.

생물학적이나 신체구조가 아니라, 둘은 그냥 다른 생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알고 있소.”

“..알면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죠?”

그녀가 요즘 해가 뜨기 무섭게 정원으로 달려나가 해가 지도록 드래곤 옆에 붙어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뭐, 외로운 이들끼리 서로 의지하고 정서적 교감을 나누면 그것도 좋은지라 놔뒀는데, 이제는 애착이 너무 심해진 것일까? 아니, 그녀의 눈빛을 보니 이건 집착에 가까웠다.

“나 역시 노력하는 중이라오. 녀석의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게 아니라서..”

말이 끝나기도 전, 그녀가 덥석 번의 손을 잡았다.

“함께.. 가요..”

“······.”

이렇게 저돌적인 그녀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번은 쓰게 웃으며 따라나섰다.

복도를 지나 현관을 나서니 정원이 보인다. 거기엔 언제나처럼 이제는 이 정원의 일부가 되어버린 드래곤이 그 커다란 콧구멍으로 드르렁, 드르렁 숨을 내쉬고 있었다. 기운찬 코골이가 아니다. 언제라도 멎을 것 같이 미약한 숨결이었다.

“네이는.. 아파요. 아주 많이 아파요.”

“네이..?”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번은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 보니 그는 저 녀석 이름도 몰랐다.

“네이기우스.”

질책하는 듯한 눈으로 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하는 그녀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 녀석 이름이 네이기우스였나? 줄여서 네이라 부르기로 한 모양이다. 카시오페이아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꾸욱 다물고 번을 바라보았는데, 번에겐 그저 마냥 귀여워 보이는 얼굴일 뿐이다.

잠시 꿍한 듯한 그녀.

드디어 결심한 듯 말했다.

“아주 유명한 마법사께서 치료약을 주셨어요.”

옆으로 멘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는 그녀를 번이 바라보았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소용없을 거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는다. 그녀는 산타클로스를 믿는 아이 같은 눈망울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거라면.. 네이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두 손으로 가죽 주머니를 내미는 그녀를 바라보다 번은 고개를 돌려 드래곤을 향했다. 녀석은 누가 떠들든 말든 세상 모르고 잔다.

“그랬으면 좋겠소.”

주머니를 받아든 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톱만큼도 기대하진 않았다. 낡아빠진 가죽 주머니도 그러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단하신 마법사가 누군진 몰라도 드래곤을 되살리려면 보통의 방법으론 불가능하단 것을 아니까.

“어디..”

뭐가 들었나 볼까?

대수롭지 않게 주머니를 막은 윗부분의 마개를 따는 번.

포옹-!

그걸 본 카시오페이아가 뾰족하게 소리를 질렀다.

“아앗!”

아직 주의사항을 말해주지 않았는데!

“······?”

번은 놀랐다. 그녀 때문이 아니다. 순식간에 손에 잡은 주머니에서 엄청난 힘이 느껴진 거다.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가 이 작은 주머니 안에 담겨 있는 것 같달까?

“흐읍..!”

번은 급히 마개를 닫으려 해보았지만, 그 순간!

“꺄악-!”

그와 그녀가 주머니를 중심으로 3미터 이상 밀려났다. 데굴데굴 구르며 비명을 지르다 추욱 늘어진 카시오페이아.

“무슨?”

번은 그녀처럼은 아니었지만, 중심을 잡자마자 다시 뛰려다가 멈췄다.

-이건?

“뭔데?”

악마도 놀랐는지 다급하다.

-원념이다! 어둠에 속하지만, 이 녀석 자체가 하나의 생물이나 다름없어!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며 뭉친 한恨! 그것이 구체화하여 나타난 거야!

보통은 공동묘지나 대량학살이 일어난 곳에서나 발견되는 령靈의 기운이라 할 수 있는것! 이것들은 그 자체가 에너지원이 되어 스팩터나 다양한 언데드를 양산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둠을 다루는 자들도 이만한 양을 모으긴 쉽지 않다. 그걸 저 작은 주머니 안에, 그것도 겉으론 전혀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처리해 가둬두다니? 그녀의 말마따나 정말 대단한 마법사였단 말인가?

“흡수할 수 있나?”

-아니! 하지 마! 저건 타락한 영혼의 부유물이다! 네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아!

어둠의 카테고리에서도 상上이 있고, 하下가 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든 어떤 것은 소량으로도 요긴하게 쓰이지만, 어떤 것은 아무리 많아도 쓸모가 없다. 그걸 인간들은 쓰레기라 부른다.

“그럼 어떻게 상대해?”

우우우우우우우우우-!

귀신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며 주변에 희끄무레한 것들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명우가 어릴 적, 잠이 오지 않아 거실로 나가니 아버지가 영화를 보고 계셨다. 요즘 것 같지 않게 유치한 색감에 어설픈 CG로 만든 고전이었는데, 아버지는 고스트버스터즈라는 이 영화를 벌써 몇 번이나 보셨다 했다.

그때, 거기서 이런 장면을 본 것 같다.

이 주변만 허리케인처럼 빙글빙글 돌며 빠르게 유영하는 정체 모를 것들. 그것들은 주머니에서 빠져나오는 것들과 어울려 점점 더 몸집을 불려갔는데,

그르르르릉?

그 영향력에 들어선 드래곤이 반응해 깊은 잠에서 깰 정도였다.

「이 더러운 것들은.. 왜 여기 있는 거지?」

“나도 몰라!”

설명하기엔 너무 복잡했다.

번 자신도 정확히 모르고 있는 것도 있었고.

'빨리! 걷잡을 수 없어지기 전에 처리하자!’

악마를 채근했다. 그러나,

-흑강이나 네 신성력으로 소멸시킬 순 있겠지만, 저걸 언제 다 할 건데?

더럽고 불결하며 음산하고 소름 끼치는 기운으로 덮인 주머니엔 접근조차 어려웠다. 심지어, 요 잠깐 사이 거기서 빠져나온 놈들이 어림잡아도 수천.

-어떤 망할 자식이 이런 걸 모아둔 거야!

악마조차 상종하지 않는 어둠의 오물이 주변도 모자라, 하늘까지 치솟으며 가득 채웠다.

특별한 아이템을 이용해 령을 가둬야만 가능했을 거다. 미친 흑마법사나 마녀들이 이런 짓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대규모는 없었다. 인간으로선 통제하지 못할 것이니까.

크르르르르르르..

기분 나쁘다는 듯 몸을 일으키며 투레질을 하는 드래곤.

‘이것들, 구체적으로 뭘 하지?’

-많지. 사람들을 홀려 다치게 한다거나 병약하게 만든다거나..

한껏 긴장하던 번이 눈을 깜빡였다.

뭐야? 겨우 그 정도야? 라는 표정이다.

-애초에 이것들은 물리력이 없어. 죽은 자가 산 자에게 그 정도 영향력을 끼치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라고. 게다가 이 숫자면 한동안 수도가 몸살을 앓을 걸? 뭐, 사방에 마탑과 신전이 널렸으니, 곧 정리되긴 하겠지만.

“어떤 미친 자식이 이런 물건을..!”

저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에게 건네준 거야! 번은 말을 끝내지도 못했다. 악마의 말처럼 가벼운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보이는 기세는 참으로 대단했다.

어느새 주머니가 비었다.

토옥, 품었던 것에 비해 참으로 보잘것없이 널브러진 그것에서 빠져나온 령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늘로 승천하더니, 한 곳으로 꾸역꾸역 뭉치기 시작했다. 허여멀겋던 것들이 모이니 흡사 형광등처럼 밝게 빛나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반지름 5미터 정도의 구를 만들다가 급격하게 쪼그라들어 어른 머리통만 해졌다. 그게 다시 주먹만 하게 변했을 땐, 똑바로 바라보기도 거북할 정도로 작열하고 있었다.

그래, 타오른다. 그건 마치 불타는 태양처럼 응축했다.

-저럴수가..!

‘왜? 뭔데?’

「심상치 않다..」

그르르르르.

드래곤 조차 머리를 들어 큰 눈을 부라리며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대비하는 것이 좋겠어.」

커다란 그림자가 번에게 다가왔다. 드래곤이 날개를 뻗어 번을 감싼 거다.

-좋지 않아! 아주 기분이 나쁘다! 아주 강력한 사력死力이 느껴져!

악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은 벌어졌다.

쑤우우우우우-!

벼락처럼 빨랐다. 막고 피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다. 눈 한 번 깜빡일 순간보다 수백 배는 빠르게 아래로 추락한 그것은 한 지점에 내리꽂혔다. 그리고 그곳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카, 카시오페이아-!”

-이런 멍청한!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순결한 처녀만큼 훌륭한 제물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그녀는 이타적이고, 배려심이 많으며 마음에 어둠을 품고 있었다. 그것이 병이 되어 그녀의 목소리를 움켜쥐었지 않았나?

파르르르르륵!

그녀의 몸이 감전된 것처럼 펄떡이다가 축 늘어졌다.

“카시오페이아!”

번은 그녀를 향해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꼬물.

바닥의 흙을 손으로 쥐며 상체를 드는 그녀의 눈을 보며 우뚝 섰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고,

“······.”

“······.”

스스스스스스.

바람이 분다.

그것도 아주 지랄 맞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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