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잉태 1 #
30분쯤 기다렸을까?
카시오페이아는 안내자를 따라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이 탑의 지하가 어디까지 뚫려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마법사들의 집이니, 공간확장이나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도 있을 거란 소문도 있었고, 커다란 고래 뱃속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도 있었다.
어찌 됐든, 문전박대는 면했기에 카시오페이아는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묵묵히 걸었다. 이윽고 오래되고 불길한 기운 풍기는 나무문이 그녀의 앞을 막아설 때,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안내자가 돌아섰다.
그에게 감사하며 살짝 고개를 숙이는데, 삐이걱 문이 열리고 매케한 곰팡내와 알 수 없는 약품 냄새가 가장 먼저 그녀를 반겼다.
“..으읍.”
그리고 그가 저편에 서 있었다.
콩가 왕국 마법사 모임 중에서 가장 저명한 듀랙스 마탑의 탑주, 다코비치였다.
저 멀리 북부의 작은 나라에서 상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콩가 왕국으로 건너온 그는 12살 때 마법사의 길에 입문하여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업적을 세웠고, 명예뿐이긴 하지만 백작의 칭호도 받았다. 그가 22년 전 코트레이아 협곡에서 독 연기와 불덩이를 소환하여 적군을 몰살시킨 일화는 지금도 아주 유명한 일화 중 하나. 그 덕분에 지난 22년간 작은 전쟁 한 번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는 빙긋 웃으며 공주에게 인사했다.
“안색이 좋으십니다. 신혼 생활이 나쁘지 않으신 것 같아 다행이군요. 공주님.”
“······.”
그녀는 악취에 코를 잡았던 손을 놓으며 주변을 둘러보곤 천천히 그에게로 걸어갔다. 늘 그가 궁으로 왔었기에 이곳에 와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확실히 이렇게 보니 또 달라 보이긴 한다. 마냥 친절한 할아버지 같았는데, 지금은 살짝 무섭달까? 마법사는 마법사인가보다.
“대공大公께선 안녕하시지요?”
번, 그의 안부를 묻는 것이다.
“······.”
끄덕이며 앉을 곳을 찾는 그녀.
오래간만에 장시간 걸었더니, 발목이 시큰했다.
“어이쿠, 늙은이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이리 앉으시지요.”
다코비치는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마법에도 조예가 깊지만,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미여서 흥미가 생기면 무섭게 파고들어 몇 날 며칠을 꼬박 새웠다. 그런 성격으로 60년을 공부했으니, 세상 모르는 게 없을 정도. 그래서 왕은 부탁했었다. 제발 내 딸애를 고쳐달라고.
그는 카시오페이아의 마음의 병을 치료하고자, 우선 그녀와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었는데, 드래곤 역시 그런 이야기 중 하나였다. 물론 그때는 몰랐다. 주로 용사의 앞길을 막는 악룡惡龍으로 들려준 이야기가 이렇게 그녀에게 뒤틀린 현실이 될지는.
“당신이라면..”
카시오페이아가 입을 열자, 다코비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공주가 말을 한다? 어떻게? 아니, 어째서?
“아픈 드래곤을 낫게 할 수 있지 않나요? 그렇죠?”
“..으음.”
다코비치 역시 궁에 블랙 드래곤 한 마리가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다. 그 녀석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외로군.’
드래곤에게 마음을 주었나? 설마 그것이 수 년간 그녀를 괴롭히던 병을 치유할 만큼 강했던 것이고?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정을 붙일만한 귀여운 애완동물이라도 줘볼 걸 그랬다. 그녀는 다코비치에게 풀지 못한 숙제 같은 것이었으니까.
“하아, 공주님..”
그의 한숨에 카시오페이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안된다 말하지 말아주세요. 당신마저 못하면 저는, 저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요.”
하필, 블랙 드래곤이라 신전에도 못 간다. 그렇다고 어둠의 주술에 능한 마녀를 찾아갈 수도 없었고. 당연히 그녀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기도 했으니, 기댈 곳은 이곳 뿐이었다.
“대공께선 별말씀 없으십니까?”
불쑥 떠오른 번의 얼굴을 생각하던 카시오페이아는 얼굴을 도리질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에비뉴에서 온 태자에 대한 소문은 아주 많았다. 사람들의 관심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겠지만, 많아도 너무 많아 무엇부터 추려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3일 내내 술을 마셨는데 취하지 않았다는 둥, 드래곤을 개처럼 부리는 것치곤 아주 친절하고 밝은 남자라는 둥, 힘이 어찌나 장사인지 팔씨름 내기에서 88명을 연거푸 이겼다는 것 같은 얘기들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도 눈에 보이는 분명한 것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드래곤이었는데, 지식 좀 있다 자부하는 이들은 그 속사정을 알고 혀를 차며 끄덕였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수명 다한 늙은 드래곤. 아니 오히려 죽어야 더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는 생명체. 하지만 차마 이 가련한 공주의 얼굴을 보며 진실을 얘기하기 힘들었던 마법사는 싱긋 웃으며 자글자글한 주름을 꿈틀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으니, 세상 안될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 방법이 있나요?”
그녀가 말을 잃어가기 시작한 것이 왕비의 죽음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번 시련이 그녀에게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장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그가 살아온 긴 세월답게 현명했고, 지레 겁먹어 주저앉는 것보다는 다쳐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다 믿는다.
“제가..”
마법사는 몸을 돌려 유리병 가득한 장식장을 지나 수 많은 낡은 책이 꼽힌 책장을 거닐었다.
이것들은 그의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한 권 한 권을 직접 모았고, 어떤 것은 새로 필사했으며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었다. 그러한 책이 2,400권이 넘는다. 저 에비뉴의 ‘현자의 서’만큼은 안되어도 세상의 비밀을 기록한 위대한 유산이라는 점엔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일전에..”
그는 멈춰 한 권을 뽑아들었다.
사라라락.
절반쯤 넘어가 펼쳐진 책엔, 두꺼운 잉크로 쓰인 글자가 빼곡하다.
“드래곤은 요정과 같다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알아요! 한 가지 속성을 타고나 죽을 때까지 그것을 양분 삼아 살아간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대공의 블랙 드래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색으로 알 수 있듯 블랙 드래곤은 어둠의 속성을 지녔습니다.”
그는 책에 쓰인 글귀를 입으로 웅얼거리다 제자리에 책을 꽂아두고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용도를 알 수 없는 주머니들이 가득한 진열장이었다.
딸깍.
문을 대신한 유리가 열리고, 그 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드는 늙은 마법사의 모습에 카시오페이아는 왠지 모를 오한을 느꼈지만, 꾸욱 참아낸다.
“이 안에는 무려 1만이 넘는 이들의 한恨과 원怨이 담겨 있습니다.”
“혹시 22년 전 그..”
다코비치는 쓰게 미소 지으며 카시오페이아에게 다가섰다.
“세상엔 정답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루고자 마음먹으면 인간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
건네주는 주머니를 받은 카시오페이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주의할 점은 이것을 함부로 개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안의 사악한 것들이 어디에 달라붙을지 모르니까요. 반드시 그걸 통제할 누군가가 있을 때 여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드래곤에게 주면 되는 건가요?”
다코비치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문 쪽으로 흔들었다.
볼일이 끝났으면 가보란 것이다.
“..고마워요. 이 은혜는 꼭 갚을 거에요.”
주머니를 보물처럼 품에 꼭 끌어안고 문으로 향하는 그녀를 다코비치가 불렀다.
“공주님.”
“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겠지만, 어떤 결과가 나타나든 공주님을 최선을 다하신 것입니다.”
그건 공주님 잘못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그의 따스한 눈길에 카시오페이아는 밝게 미소 지으며 끄덕이곤 문을 닫았다.
“쯔읏..”
그녀가 나가자, 홀로 남겨진 다코비치는 혀를 차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인간이 발전하고 마법과 지혜가 쌓여도 거부할 수 없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두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랑과 시간이었다. 인간의 마음에 사랑이 싹트면 육체 또한 그것에 끌려가고, 싸늘하게 식으면 다시 태워보려고 해도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로 절대 응하지 않는 것도 마음이다.
외적으론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
그것으로 인간은 태어나서 늙고 죽는다. 물론, 이건 인간뿐 아니라 풀, 나무, 늑대, 사슴, 곤충, 바람까지 모든 것에 해당한다. 그 자연의 질서이자 법칙을 뒤틀 수 있는 것은 오직 신과 악마뿐.
“당신의 착한 마음씨가 저 하늘에 전해지면 기적이 일어날 지도..”
공주는 아름다웠다. 그만큼 모두가 그녀를 보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녀의 인형 같은 외모보다 선량한 마음이 더욱 예쁘다는 것을 말이다.
“쯧.”
그는 다시 혀를 차며 한 곳으로 걸어갔다. 공주 때문에 잠시 중단했던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
“저리 천사 같은 분께 어찌 계속 시련을 주실까.”
그는 중얼거리며 커다란 선반을 덮어둔 천을 후욱! 벗겨냈다. 그러자 악취와 함께 방부처리를 위해 뿌린 약품 냄새가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
선반 위의 물체를 바라보는 그의 눈가가 구겨졌다. 공주처럼 착한 사람도 있다면 세상엔 악마도 있었고, 그보다 더 잔인한 인간도 있었다.
이걸 보라.
사람이 가죽만 남긴 채 죽었다.
“악마놈아.. 악마놈아..”
뼈도 없고, 장기도 없었다. 그것들을 어떻게 이리도 깔끔하게 뽑아냈는지 아직 밝혀내지도 못했다. 안쪽에서부터 녹인 것일까? 아니면 뭔가가 먹어치운 걸까?
“대체 왜 이런 끔찍한 짓을 하는 것이냐..”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이 사체를 포함하여 81구의 시신을 살폈지만, 외부의 상처는 각기 많아야 두 곳 정도. 어떤 것은 치명적이라 할 수도 없었다. 흡사 누군가 대나무 빨대를 사람의 몸에 꽂고, 쭉 빨아먹은 것 같지 않나? 하지만 성인 남성을 그리할 수 있을 만한 몬스터가 주변에 있다면 이미 눈에 띄었을 거다.
‘기생 몬스터인가?’
얼마 전 이 사체를 처음 목격했을 때부터 번뜩 떠오르는 가능성이 이제는 거의 확실시 되고 있었다. 곤충 중에도 이러한 것들이 있다. 숙주의 몸에 알을 까놓고, 야금야금 먹어치우며 성체가 되면 튀어나오는..
‘하지만..’
듣기론 벌써 수백이 당했다는데, 튀어나온 놈들이 목격된 적은 없지 않나? 그래서 특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의 소행인지 단정하기엔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어둠의 흔적도 없고.’
몇 번이나 살폈지만, 사체엔 어둠 속성이 단 1도 없었다.
‘간악한 이의 제물로 사용되었다면, 진즉 어떤 사달이 났어야 정상이거늘.’
“하아.”
사체를 유심히 들여보는 마법사의 입에서 한숨이 푹푹 나왔다.
“모르겠구나, 정말 모르겠어.”
아무래도 그는 한동안 이 연구실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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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마리를 잡았을 때 고밀도 정수가 만들어졌고, 43마리를 흡수하니 엄지손톱만 하던 정수가 두 배로 커졌다. 이놈들은 마치 세상의 모든 어둠을 제 몸에 홀로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엄청난 기운을 내재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치를 떨었겠지만, 이 남자에겐 더할 나위 없는 산해진미였다.
「고밀도 정수가 한계치에 다다랐습니다.」
침대 위에 정좌하고 앉은 번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오늘 아침 116마리째 사냥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제,
「고밀도 정수가 초고밀도 정수로 진화합니다.」
「초고밀도 정수는 우주의 그 무엇보다 깨끗하고 순수하며 태초의 그것과 같은 성질을 지닙니다.」
「초고밀도 정수를 이용하여 외부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변화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