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껍데기 #
마치 두르고 있던 가죽을 벗어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곰이나 사슴의 그것이 아닌, 인간의 살갗이란 점이 아주 그로테스크하게 비쳤다. 껍질을 벗고 알맹이처럼 튀어나온 까만 그것은 눈코입이 없지만, 주둥이는 있었고, 거기엔 섬뜩한 이빨이 돋아 있었다.
-도망친다! 잡아!
타타탓!
놈은 갑자기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아주 필사적이었고 빨랐다. 애초에 육체를 구성한 형태 자체가 물리법칙을 벗어난 놈이라 흐물흐물 몸을 움직이면서도 쭉쭉 미끄러지듯 뛰었다.
‘오케이!’
번이 땅을 박찼다.
“어딜!”
하지만 이 남자에게 벗어나는 것은 애당초 힘든 일이다. 따돌리려는지 요리조리 장애물을 만들며 도주하는데, 바짝 따라붙은 번의 몸에 닿은 낡은 묘비가 퍽퍽! 부서지긴 했지만, 그 정도론 영향을 받지 않았다.
-놈은 아주 순수한 어둠의 덩어리다! 흡수하는 방향으로!
‘알고 있다고!’
손만 뻗으면 놈의 뒷덜미를 잡아챌 수 있을 거리. 여기서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놈과 상극이 마땅할 신성력을 끌어올려 녹여버릴 것인가, 아니면..
「중단전이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양분으로 삼을 것인가?
답은 간단히 나왔다.
“끄그그그극?”
놈이 기괴한 소리를 내는 동시에,
“으라-차!”
번이 녀석의 허리에 태클을 시도했다. 성난 멧돼지처럼 놈의 몸을 끌어안고 함께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다가,
씨익.
관성이 멈추자, 놈의 몸에 올라탄 자세로 번이 내려보며 웃었다.
콰앙-!
기다림은 없다. 두 손을 깍지끼고 모아 그대로 놈의 가슴을 쳤다.
투웅!
질긴 타이어를 때린 것 같이 반탄력이 엄청났지만, 번은 멈추지 않았다. 놈의 몸에서 왈칵! 터진 어둠이 스스스스- 그의 육체로 흘러들었기 때문이었다.
「농밀한 어둠을 흡수했습니다.」
“좋구나!”
쾅- 쾅!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물풍선에서 쭉쭉 물을 짜내듯 놈은 어둠을 토해낼 때마다 점차 쪼그라드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는 성인 남성만 했는데, 어느덧 여자처럼 작아지더니 이젠 초등학생 수준으로 아담해졌다.
“끄그그그그극!”
물론, 이리되는 동안 놈이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손을 휘갈기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손톱은 호신기를 두른 번의 몸에 생채기조차 남기지 못했고, 몸을 뒤틀어봐도 단단하게 조인 번의 허벅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쾅쾅!
그렇게 점차 쪼그라든다.
이제 번의 주먹은 놈의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우수수 부러진 이빨은 모두 떨어졌고, 끄윽, 끅, 연신 신음만 흘릴 뿐 저항하지 못한다. 게다가 기력을 다했는지 이제는 팔도 들지 못하는 녀석. 번의 공격이 멈췄다.
놈의 목을 잡고, 일어서는 번.
“이거..”
‘예상보다 엄청난데?’
번은 순수하게 놀라고 있었다.
이놈들이 대충 어떤 카테고리에 속했는진 알고 있었지만, 품은 어둠은 그의 추정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1을 기대했는데, 100을 얻은 기분이랄까?
「중단전의 어둠이 포화상태에 도달했습니다.」
「중단전의 씨앗이 꿈틀거립니다.」
「좀 더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고밀도 정수精髓를 제작합니다.」
「씨앗이 발아합니다.」
‘고밀도?’
-오오오! 드디어 너도 만드는구나!
마계에서 이러한 정수를 가진 녀석을 본 적이 있었다. 단적인 예로 드래곤의 심장도 이러한 역할을 한다 했다. 게다가 고작 한 마리 잡았는데, 이 정도라니.. 푸들푸들 몸을 떨어대는 녀석을 보며 번은 씨익 웃었다.
이것들이 뭔지는 모른다. 다만, 몇 주 전 결혼식 뒤풀이가 끝난 후 수도로 숨어들었다는 것은 이미 알아챈 그였다. 지금까지 수도를 돌아다닌 이유엔 이놈들의 위치파악을 하기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나야 땡큐지. 크크크..!”
번이 양손에 힘을 주자, 얼마 남지 않았던 녀석이 양쪽으로 찢어지며 파악! 허공에 어둠을 뿌렸다.
끄그그그그..
이 기운 자체는 보통 사람에겐 노출되는 것 자체로 오한이 들게 하고 면역력을 떨어지게 할 것이다. 하지만 번에겐 그 무엇보다 좋은 종합비타민!
「어둠을 흡수합니다.」
「어둠을 흡수합니다..」
아지랑이처럼 모여드는 기운을 맛보며 번은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다른 힘 하나를 개방했다. 그러자 슬며시 그의 이마에서 눈이 뜬다.
삼안三眼!
신의 힘이 깃든 그것이 부리부리한 시선으로 저 앞을 훑고 있었다.
“히야, 많기도 하네. 대체 저게 다 몇 마리야? 그제보다 더 늘었는데?”
공동묘지가 높은 위치였기에 저 멀리 수도가 아스라이 보였는데, 일반적인 시각이 아닌 전혀 다른 메커니즘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삼안은 수도 곳곳에 있는 큼지막한 어둠 덩어리들을 찾아냈다.
나무와 동산 같은 것이 앞을 가린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 모든 것을 투과하여 그 너머를 직관하고 있었으니까.
-얼추 일천은 넘어 보인다.
“대박이네.”
쉽게 흥분하지 않는 번이 입맛을 다셨다. 저것들을 다 잡아먹으면 얼마나 많은 어둠을 얻게 될지 벌써 기대가 된다.
-쉽게 생각하지 마. 봤잖아? 이것들이 얼마나 완벽하게 사람 행세를 하는지.
“알아.”
놈들을 파악했을 때, 번과 악마는 고심했다. 이놈들의 목적이나 행태, 강한 정도 같은 것들을 말이다. 언데드에 속한 몬스터 같긴 한데, 악마조차 녀석들의 정체를 특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수 차례 은밀한 실험을 한 결과, 이놈들은 숙주를 죽이고 그 껍데기를 덮어쓴다는 걸 알아냈다. 다행히 그걸 자주 반복하진 못하는 것 같았지만, 일단 그렇게 숨어들면 기억을 고스란히 뽑아내는지 겉으로 봐서는 구분이 힘들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았잖아?"
놈들은 빠르고 날렵하여 숙련된 기사 수준으로 강했다. 하지만 어둠과 신성력을 동시에 가진 번에겐 한 끼 식사나 다름없었달까?
- 우습게 볼 일은 아니라고! 집중해!
하지만 목적은 몰랐다. 잡아서 추궁해봐야 입을 열 것 같지도 않았고. 다만, 그 시기를 보자면 번이 수도에 자리를 잡기 시작할 때 벌어졌으니, 오며 만난 타락신이란 놈과 관련이 있거나 혹은 번의 등장이 불편한 콩가의 누군가가 수작을 부리는 것일 거라 추정했다.
“흐음..”
번은 수도를 바라보며 턱을 매만졌다.
어느 쪽이든 번으로선 겁먹을 이유가 없었다. 어둠 한정해선 그 어떤 놈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자부하는 번이었기에 이까짓 것들은 아무리 많아도 우스웠으니까. 문제는 이것들이 사람들과 섞여 있다는 점?
살랑, 살랑.
어느새 삐져나온 꼬리가 고양이의 그것처럼 움직인다.
“무턱대고 찾아다니며 제거하면 수도가 발칵 뒤집히겠지?”
-너 또한 그리 좋은 소린 못 듣겠지. 뭐, 성기사처럼 보는 족족 쳐 죽이면 모르겠지만, 그러면 놈들이 품은 어둠이 너무 아깝다.
“그렇지.”
일단은 이 무덤 관리자처럼 으슥한 곳에 홀로 떨어져 있는 것들을 노릴 생각이었다. 대충 훑어도 일천이 넘어가는 엄청난 숫자. 놈들은 시장에도, 광장에도, 심지어 왕궁에도 잠입해 있었다.
“어쩔 수 없다면 모를까. 이 아까운 걸 낭비할 순 없으니.”
그때였다.
움찔!
번의 몸이 굳는 동시에 악마가 외쳤다.
-이놈들! 눈치챈 것 같다! 이동한다!
수도 곳곳의 작은 점들이 동시에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이런 움직임은 불가능하다. 흡사 무전을 듣고 있거나 전쟁터의 명령체계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조직적 꿈틀거림 아닌가? 전자기기의 발달이 더딘 이곳에서 핸드폰이나 비슷한 장비가 있을 린 없으니 이 움직임은 두 가지 중 하나로 좁혀진다.
‘지휘관이 있거나.’
-한몸이라는 얘기겠지.
삼안으로 전체를 관조하고 있는 번이기에 쉽게 알아챘다. 하지만 수도의 그 누구도 알아챈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래 봐야 놈들이 한 행동이라고는 집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거나, 저쪽으로 걷다가 이쪽으로 방향을 돌리거나, 휴식을 취하다가 일어나 성큼 걸어가는 정도의 움직임이었으니까.
그러나 무려 일천의 방향이 이쪽을 향하면 그건 문제가 된다. 당하는 처지에선 아주 섬뜩하고 무서울 수 있는 순간, 하지만 번은 그저 웃었다.
“후후.. 어느 쪽이든 뭐.”
토끼 일천 마리가 째려본다고 겁먹을 호랑이는 없지 않은가?
약간의 시간이 멈춘 듯 흘렀다.
세상의 시간은 흘러가는데, 번은 수 많은 눈이 자신을 노려보는 기분을 받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저쪽 놈들도 어떤 지령을 받았는지 다시 일상으로 녹아들어 아까처럼 일정한 패턴 없이 움직였다.
"······."
번 역시 성큼 묘지를 내려가기 시작한다. 옷을 툭툭 털며 걸음을 옮기는 동안 그의 이마에 뜬 눈은 감쪽같이 감겼다.
“때려잡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예나 지금이나 이 남잔 여전히 사냥을 즐기는 맹수였다.
.
.
.
“그때 정말 즐거웠는데! 어디 파티에라도 가볼까?”
“아직도 그 남자랑 만나?”
“아니.. 그렇게 조르더니, 이젠 시들해졌는지 찾아오지도 않네.”
“멍충아! 그러니까 함부로 주지 말라니까!”
아직도 장장 사흘간 계속되었던 불타는 축제의 여흥이 식지 않았나 보다. 젊은 남녀는 사랑을 나눴고, 장사꾼들은 새로운 인맥을 확장했다.
“내가 먼저 찾아가 볼까?”
“으이구, 남자는 한번 마음 떠나면 다시 안 온다구! 그 반반한 얼굴로 벌써 다른 여자 만나고 있을걸?”
“······.”
“그리고 요즘 알잖아? 그 먼 길을 어디라고 가니?”
걸어서 1시간 이상 걸리긴 해도 수도 내에서 움직이는 것을 이렇게 멀다 표현하게 된 것이 이상하다. 나름 다른 도시보다 치안도 좋았고, 사람들 성향도 온순했기에 여자 혼자 다녀도 너무 깊은 밤이 아니라면 위험하다 여겨지진 않았었는데, 지금은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치.. 좀 그렇지?”
엄동설한이란 말이 있다. 아직 본격적인 한파는 찾아오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시린 소문 하나가 수도를 잡아먹었다.
살인.
연이어 이어지는 실종이 그것이었다.
-어이, 거기! 너희들! 일은 안 하고, 뭣들 하느냐!
“히익! 해요! 합니다!”
종종걸음으로 여인들이 사라지자, 카시오페이아는 얼굴을 덮은 망토를 더욱 아래로 끌어내리며 걸음을 옮겼다. 웬만해선 외출을 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용기를 냈다.
‘이상하네.’
그녀도 느낀다. 도시의 분위기가 아주 차갑다는 것을 말이다. 모여있는 사람들은 하나 건너 하나는 이 사건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믿을 순 없겠지만 벌써 수백 명이 당했다고 한다.
‘무슨 일이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수도 동남쪽 외곽.
예로부터 마법사라는 직업은 경외와 두려움을 동시에 지닌 이들이었다. '너! 계속 말 안 들으면 마법사님께 데려가서 개구리로 만들어 줄 거야!' 철없는 아이를 겁주는 아낙의 말처럼 마법사는 믿기지 않는 일들을 해내지만, 그건 다시 말하면 내가 예상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란 뜻도 된다. 그리고 인간은 거기에서 공포를 느낀다.
그 때문인지 탑 주변에는 민가가 없다. 수도에서 유일하게 성안 쪽에 있으면서도 북적이지 않는 곳. 듀랙스 마탑이었다.
사람들이 가까이하지 않는 탓도 있지만, 마법사 대부분은 어디 틀어박히면 한동안 두문불출杜門不出 하기에 이곳이 더 을씨년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카시오페이아는 멍하니 8층짜리 탑을 올려보다가 문에 다가서서 고리를 잡았다.
딱, 딱.
쇠가 나무에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이 작은 소리를 안쪽의 누가 들어줄까? 의심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여기는 마법사들의 요람이다. 이미 그녀가 접근하는 순간, 그녀의 신원부터 소지한 물건까지 모조리 분석을 끝낸 사람이 있었다.
“공주님.”
끼이이익.
문이 열리며 중년 사내가 카시오페이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
말없이 끄덕이며 안쪽으로 들어서는 카시오페이아. 그녀가 두른 망토를 벗자, 어두침침한 주변이 환히 빛나는 기분이 든다.
“탑주님을 뵈러 오셨습니까?”
공주는 탑주와 친분이 있었다. 이전, 그녀가 말을 하지 않기 시작하자, 왕이 온갖 방법을 동원했었는데, 그때 탑주와의 인연이 맺어졌다.
“으음. 탑주님께선 얼마 전부터 연구에 집중하셔서 연구실에 외부인은 누구도 들이지 말라 말씀하셨는데.. 공주님께서 오셨다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문지기가 말했다.
그는 딱히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공주가 말을 안 한다는 걸 아니까.
“찾아오신 목적은요? 일단 전달은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드래곤.. 드래곤에 관해 그의 조언이 필요해요.”
공주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