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 2막 스타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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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함께 산 지도 어느새 2주가 흘렀다.
카시오페이아는 생각했다. '남자는 다 이런가?' 평소 관심 없던 다른 사내들까지 훔쳐보며 몇 번이나 비교해보았지만, 답은 아니다였다.
남편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딱히 싫다거나 치가 떨린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홀로 앉아 명상을 2시간씩 하는 것도 모자라, 낮엔 뭘 하는지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았다. 뿐인가? 지리를 익힌다며 해 질 녘 나가면, 부엉이도 잠을 청할 늦은 시간에 들어와 잠을 잤다. 아니, 자기는 한 걸까?
“하하! 오늘 아침은 빵이 아주 잘 구워졌구려.”
경쾌하게 웃으며 빵이 든 바구니를 카시오페이아 쪽으로 밀어주는 번.
“왜 들질 않소? 입맛이 없소?”
“······.”
그런 건 아니었지만, 대충 끄덕였다.
“흐음. 겨울이 오려는지 요즘 일교차가 커서 신체적으로 변화가 생겨 그럴 수도 있소. 잠시 기다려보시구려. 내, 간만에 솜씨 좀 발휘해 볼테니.”
번은 벌떡 일어나, 팔을 걷더니 어디론가 향했다. 그가 주방에 다녀왔다는 것을 20분 정도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
달깍.
“드셔 보시구려.”
그녀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는 번.
“······?”
그녀가 이게 뭐냐는 표정으로 번을 올려보았다.
“샌드위치란 건데, 아마 입에 맞을 거요.”
한국에서는 익숙한 음식이지만, 이곳에서는 생소한 것이었다. 빵을 얇게 저며 다시 굽고, 그사이에 고기와 토마토, 채소와 달걀부침을 넣었다.
“어서.”
번이 빤히 바라보자, 카시오페이아는 마지못해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는데, 번이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건 두 손으로 잡고 먹어야 제맛이라오.”
차 한잔 마시는 것도 법도가 있거늘..
그래도 손수 만들어왔다니 한번 먹어볼까?
와삭.
딱 한입 야금 물었을 뿐인데, 어느새 샌드위치 하나가 모두 그녀의 뱃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하하하! 거 보시오? 맛있지 않소?”
그는 아주 다양한 지식을 보유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해박했으며, 듣도 보도 못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는데, 오후에 아버지가 찾아왔을 때도 그랬다. 의견을 피력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으며, 그것이 철부지의 객기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거 참으로 기발한 발상이다.”
왕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저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나 가벼운 마음으로 왔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함께 온 피벗 공작과 얘기를 나누는데, 번이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기존의 환자복은 통째로 입고 벗어야 해서 상처 위치에 따라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곤 합니다. 콩가 왕국은 겨울이 길고 추우므로 이런 의복을 만들어 보급한다면 병사들의 체온 유지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피벗 공작이 크게 끄덕였다.
“곧 겨울이 오면 아녀자들 일손도 여유가 있을 것이니 물량은 어렵지 않게 맞출 수 있을 것입니다.”
에비뉴와 함께 제국을 치려면 올해부터 강병을 양성해야 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문제들이 생겼는데, 그 중 하나가 보급에 관한 것이었다.
“목 부분이 쓸리지 않게 품이 크게 하고, 중간에 단추를 달아 쉽게 탈의할 수 있게 하면 보관도 좋고, 실내외에서 각자의 기호에 맞게 착용할 것입니다.”
번의 추가 설명에 피벗 공작이 '과연, 그렇군!' 턱을 쓰다듬으며 감탄했다.
“에비뉴에선 이미 쓰고 있는 겐가?”
왕의 질문에 번은 머리를 흔들었다.
“에비뉴의 모든 것은.. 폐하께서 결정하십니다.”
“하긴..”
몇 달 겪어보니 충분히 알겠다.
“우선 몇 벌 만들어 병사들의 호응도를 살펴보지.”
“바로 만들라 지시하겠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카디건이라 불리는 형태의 양식. 1800년대 영국의 카디건 백작이 병사들을 위해 만들었다던 털옷이 이렇게 번에 의해 콩가에 전파된다. 물론, 크림 전쟁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번은 몰랐지만, 개념만 알면 된다. 그리고 이렇게 작은 것들이 모여 큰 변화를 끌어내는 것이었다.
‘당신은 후회할 겁니다.’
번은 황제를 생각하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3년. 두고 보자.
여기 콩가를 에비뉴에 비견되는 선진국으로 만들어 보이리라.
“그럼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번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자릴 비우자, 황제와 함께 왔던 사람들도 일어났다. 부녀를 위해 시간을 주려는 것이다.
“함께 사는 것이 불편하진 않으냐?”
왕의 말에 카시오페이아는 얼굴을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머리칼이 참으로 아름답다. 내 딸이지만, 왕국 최고의 미녀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
물론 말을 하지 않으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마는.
“듣기론.. 에비뉴의 황실이 아주 복잡하다더구나. 스물이 넘는 황비를 두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
황제와 번 사이에서 오간 대화를 꿈에도 모른 채, 왕은 번이 어떤 정치적 싸움에서 밀려났다 여겼다.
“어쩌면 계속 이곳에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래도 용모 반듯하고 영민하니, 눈엣가시는 아니었다. 다만, 딸애가 걱정될 뿐이다. 그 녀석도 타지에서 감옥살이나 마찬가지로 살아가는데, 생각해보면 이 녀석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한 지붕에 두 사람이 갇혀있으니, 얼마나 답답할꼬.
그때였다.
그르르르르르릉.
정원에서 큰 울림이 들려왔다.
드래곤이 몸을 뒤척이며 나는 소음이었다.
“..쯧.”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카시오페이아를 바라보는 왕.
“잘 지내도록 노력해보렴.”
왕은 그 말을 끝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카시오페이아는 말하고 싶었다.
그는..
‘충분히 잘 지내고 있는 걸요?’
물론, 뭐가 그리 바쁜지 번은 그녀가 있는 침실엔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남녀 간에 무엇이 통해야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두근거리는 가슴 꼭 끌어안고 노심초사 보냈던 수많은 밤이 묘하게 서운하다.
‘이상해.’
그를 떠올리면 정말 이상하기만 했다.
‘내가 예쁘지 않은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그녀는 그저 제탓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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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가 왕국은 북부에 위치한 지역적 특성 때문인지 한여름에도 20도를 웃돌지 않았다. 대신 겨울이 오면 영하 40도까지 추락할 정도로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는데,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니 예로부터 추위를 이겨내는 지혜가 발달했다.
‘저건 온돌과 비슷한 구조로군.’
번은 오늘도 수도 곳곳을 걷고 있었다. 평소 사람들의 눈이 뜸한 저녁 무렵 나오곤 했는데, 오늘은 왕의 방문 덕에 좀 일찍 서둘렀다.
-온돌?
‘방바닥 아래 불을 때 방을 덥히는 구조다. 보통은 나무를 쓰는데, 여긴 똥을 쓰는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몬스터의 것인가?’
-인간들은 참 귀찮겠어. 추우면 춥다고 난리, 더우면 덥다고 난리. 그냥 보온효과 있는 마법 아이템 하나 차면 그만일 텐데.
“······.”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드세요! 라고 말했던 어떤 여자가 절로 떠올랐다. 유식한 척은 있는 대로 다 하지만, 결국 악마는 악마다. 절대 인간 처지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면 따듯한 나라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던가. 왜 이 고생들이야?
번은 대꾸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에비뉴보다는 도시가 그리 발전하지 않았지만, 이곳은 이곳만의 정감과 특색이 있었다.
-멍청한 것들. 쯧쯧.
잠자코 듣던 번이 머리를 흔들었다.
‘겨울이 꼭 나쁘다고만 말할 순 없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겨울이 있기에 인간은 부지런해지지. 추위와 싸우기 위해 기술이 발전하고, 봄의 온기에 감사하며 가을의 풍요로움에 미래를 기약한다.’
전에 황제가 말했던 저 벨버른 아래 따듯한 왕국이 왜 망했겠는가? 겨울이 없어 얼어 죽을 일 없고, 지천에 과일 같은 것이 널렸으니 애써 일하지 않는다. 게으름은 이렇게 환경 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거기에 무능한 군주까지 겹치면 나라를 빼앗기는 것은 순식간 아니겠는가?
-그건 멍청한 소리야. 집구석에 처박혀 겨울을 보내는 동안 다른 나라들은 더 발전할 거 아니냐?
단순하게 수학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수 있겠지만, 인간이란 생물은 그렇지 않다. 뭐든 먹어봐야 쓴맛을 알고, 당해봐야 무서운지 깨닫지만, 이러한 것들이 있기에 인간은 과거를 딛고 일어나 내일을 향해 달린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
악마와 영양가 없는 씨름할 생각은 없었기에 번은 그 말을 끝으로 침묵했다.
그는 계속 걸었다.
산책하는 것 같이 천천히 다니지만, 어디에 무엇이 있고 어떤 곳에 누가 사는지 파악한다. 이렇게 주변 지리를 익혀가니, 꼭 에비뉴를 처음 돌아다니던 그 꼬마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는 이리될 줄 몰랐는데, 참.. 사람인생 얄궂다. 벨버른도 아닌, 콩가 왕국에서 다시 시작하는 인생이라니.
‘그래도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어.’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번은 벨버른에서 무수한 실험을 했고, 인간군상을 겪었다. 그리고 이제 같은 길을 걷더라도 확실히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는 자신감 또한 있었다.
‘전초기지..’
그리고 3년이라는 시간.
‘보십시오, 아버지. 그때 이 콩가가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최근 훑어보니, 가능성은 충분했다. 이곳은 주변 5국과 사이도 좋았고, 왕성한 거래도 이어진다. 문제는 제국인데, 그들도 에비뉴가 칼을 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무리한 병력운용은 하지 않을 것이다.
‘슬슬 시작해볼까?’
간은 봤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맛을 볼 차례.
-오오오! 가냐?
‘그래.’
-캬캬캬! 이 잡것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악마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번이 수도를 나서자, 인적이 뚝 끊기고, 어둠이 내렸다. 그럼에도 번의 발길은 멈추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보통사람이면 더욱 꺼릴 장소로 걸어간다.
까악-! 까아악-!
좀비, 구울, 늑대인간이나 어둠에 속한 불길한 것들이 당장에라도 튀어나와 그 더러운 이빨을 콰악! 목덜미에 박아넣을 것 같은 곳. 묘지였다.
콩가의 수도에 모여 사는 인구가 약 22만. 하루에도 수많은 이가 태어나고 죽는다.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는 풍습을 지닌 콩가는 그래서인지 공동묘지의 규모부터 대단했는데, 축구장 10개는 합친 것 같은 넓은 곳에 빼곡하게 묘비가 서 있었다.
-저기 있다! 저기! 저놈!
완만한 둔덕처럼 되어 있기에 번은 가볍게 오르며 저 앞을 본다. 묘지가 이리도 크니 누군가는 관리를 해야 한다. 천대받는 직업이긴 해도 몸이 불편하거나 다른 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이들에겐 참으로 편한 직업이기도 했다.
더럽고 칙칙한 망토를 뒤집어쓰고, 꾸부정한 자세로 번을 보고 있던 노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오셨습니까?”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간만에 장葬이 없어 편히 쉬나 했는데, 또 저 남자다. 불청객이 에비뉴란 곳에서 온 귀한 사람이란 건 안다. 사흘간 벌어진 술판은 이미 콩가 왕국 전체로 소문이 자자했으니까.
근데, 그리 귀한 양반이 왜 자꾸 야심한 밤에 무덤을 찾는단 말인가?
“누가 보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돌면 어찌하려고요.”
생각해서 하는 말이었지만, 번은 미소 띤 얼굴로 묵묵히 걸어 그의 앞까지 도달했다.
그러더니 푸욱-!
“······!”
곧게 편 손을 그대로 관리인의 배에 쑤셔 박았다.
“커허..”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관리자는 고통과 충격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 몸이 번에게 의지하려 기대지만, 매몰찬 시선과 음성이 따랐다.
“쇼하지 마.”
번의 손이 관리자의 몸속에서 위로 올라 펄떡이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이제 시작이잖아?”
손에 쥔 심장을 터트리며 번이 관리자를 걷어찼다.
주르르륵.
뒤로 밀려난 관리자는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건만, 그는 도리어 웃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끄끄끄끄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