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술은 새 부대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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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었을 꿈.
그런 순간들이 있다. 승진이 될 수도 있고,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거나, 복권이 당첨된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그리고 여자의 기준으로 본다면, 어쩌면 그 순간은 아마 결혼식이 아닐까?
성대한 팡파르와 수많은 하객.
오롯이 이날만큼은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 빛나는 자리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날은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너무도 화창했고, 간혹 매가 유영했다. 에비뉴 4만 군사는 오늘 무기를 착용하지 않았다. 대신 사전에 준비한 꽃을 한 송이씩 손에 들고 웃는다. 철鐵의 사내들로 유명한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미소 띤 얼굴로 축제를 즐겼다.
모인 사람만 10만이 넘어가고, 수도 광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여인. 그녀는 눈처럼 하얀 순백의 드레스를 입었고, 얼굴을 살포시 가리는 얇은 면사포를 썼다. 복장 덕분인지 멀리서도 그녀는 두드러졌고, 모두가 안다. 오늘 그녀가 신부라는 것을.
"······."
바들바들.
순결을 상징하는 크로데아 꽃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는 그녀. 꽃봉오리가 계속 흔들리는 것을 보면 그녀의 심정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사랑 따윈 사치인 결혼식. 대부분의 공주가 이렇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처음이라 그렇소. 처음이라.”
그녀의 옆에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엔 따스함과 배려가 듬뿍 묻어 있었고, 절로 귀 기울이게 되었다.
“서툴러서.”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반려가 될 사람을 보았다.
그는 큰 키에 넓은 가슴, 듬직한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게 얼굴은 아직 남자다움보다는 예쁘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 턱선을 물끄러미 보다가 흠칫 고개를 돌리는 그녀.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모든 것이 그런 것이라오. 부모가 처음이라 육아에 미숙하고, 자식 역할이 처음이라 마음속으로만 효도하지. 겉으론 가시 돋친 소릴 내뱉으면서.”
이제 그녀의 반려자, 번이었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한다.
“나 또한 처음 전장에 나갔을 때, 당신과 비슷한 기분이었을 거요.”
“······.”
카시오페이아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번은 그녀의 대답을 기대하진 않는다.
“그런데 말이오.”
번갯불에 콩 구워 먹을 정도로 순식간에 동반자가 정해지긴 했어도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후회하지 말자는 번이었으니, 이왕 내 사람이 될 거 확실히 보듬기로 한 모양.
“사람이란 게 참으로 놀라워서 금세 적응하더이다. 나라고 이리될 줄 알았겠소?”
번은 자신의 손을 들어 그녀에게 보였다. 그러자 하얀 장갑 낀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렸다. 뭐, 장난으로 일부러 그런 것이었지만, 그 모습에 긴장이 조금 풀렸을까?
“..푸웃.”
카시오페이아는 절로 웃다가 저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번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망설이던 카시오페아이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끝을 잡았다. 그 순간, 덥석 그녀의 손을 힘껏 쥐고, 성큼 앞으로 걷기 시작하는 번.
때에 맞춰 축포가 터졌다.
빠바바바바바방!
오색찬란한 마법 폭죽이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아!
-에비뉴 만세! 콩가 만세!
-멋지다! 꺄아!
-이런 성대한 결혼식은 처음이야!
사람들의 환호 속에 번은 저 앞에 난 길을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걸어갔다. 양쪽엔 사람들로 이뤄진 촘촘히 늘어선 벽이 만들어져 있다.
이 순간, 번은 느낀다.
이것이 인생. 이렇게 사람들 틈에서 내가 가야 할 길. 그걸 묵묵히 걷는 게 삶이다.
스윽.
인기척에 그가 저쪽 하늘을 올려보았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공중에 떠서 양팔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마법을 이용한 모양인데, 그녀의 입이 열리는 순간 그녀의 재능이 무엇인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한동안 아파야 할 수도 있고.』
그녀는 가수였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살던 설명우의 기억엔 약간 괴리감이 있는 음정과 박자였지만, 그땐 경험하지 못했던 맑고 깨끗한 음색과 오페라 가수와 같은 목청은 귀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서러울 수도 있겠지만.』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흡사 물속에서 흐물거리는 해파리처럼 하늘에서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이상했지만, 아름다웠다.
『둘이라면 이겨낼 수 있어요.』
그녀의 노래가 끝나갈 때쯤, 번은 길 끝에 도착했다.
『우리 둘이서.』
이 길을 인생에 빗댔다.
그리고 그 끝에 왔더니, 이 남자가 있다.
“따님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에비뉴의 황제가 옆에 앉은 콩가의 왕에게 말했다.
“허허, 옷이 날개라서 그렇습니다. 미숙한 게 많은 아이입니다. 모쪼록 너그러이 아껴주시길 부탁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겠습니다.”
덕담을 나누는 그들을 보며 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이 인생은 이리 시작하고, 끝나나 보다. 저 남자. 에비뉴의 황제가 내가 가야 할 종착지에 있다.
아들이 넘어야 할 마지막 산이 아버지의 등이라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차라리 신을 죽이라면 더 쉬웠을 거다.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너무 많은 것들이 얽혀있고, 걸려 있었다.
“······.”
번이 눈에 힘을 주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연애결혼 따위 바란 적도 없지만, 결국 결혼까지 그의 뜻대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라 생각 마라. 이제 시작이니까. 여기 콩가에서 당신의 눈을 피해, 나란 나무가 얼마나 거목이 될지 훗날 알게 되리라.
‘당신이 땅이라 하셨나?’
그 좁은 땅에 품을 수도 없는 큰 기둥과 깊은 뿌리를 가지리라!
“..아파..”
흠칫, 번이 옆을 돌아보았다.
방금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카시오페이아가 번에게 잡혔던 손을 빼 다른 손으로 주무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힘이 들어간 모양이다.
“하하하! 저리 많은 이들이 지켜보니, 후딱 끝냅시다! 모두가 기다리는 건 술과 음식이 아니겠소? 하하하”
화끈한 황제의 성미는 여기서도 감출 줄 모른다.
“뜻대로 하시지요.”
콩가의 왕도 피식 웃었다.
번은 벌떡 일어나 우렁차게 외치는 황제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대 에비뉴의 태자! 번 리갈 드 요르간드 바야흐! 너는 카시오페이아 산티 루악 클레어를 신부로 맞이하여 평생 헌신하고 사랑할 것을 맹세하느냐?”
“예.”
식은 여기 콩가에서 진행하지만, 가장 웃어른은 누가 뭐래도 황제다. 그가 식순을 생략하고 코뿔소처럼 진행한다고 말릴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내 며느리의 눈에서 눈물이 보이는 날엔, 네 녀석의 그 작은 궁둥이를 걷어차 줄 것이다!”
황제의 말에 왕이 옆에서 껄껄 웃었다.
지금까지 몇 가지 핀트가 맞지 않는 일들이 있긴 했어도 이제 한 식구이니 마음은 편하게 먹어야 했다. 그렇게 마음을 바꾸니, 황제의 저 성격도 같은 남자로서 호감이 간다.
“아이야.”
황제는 카시오페이아를 보았다.
그 역시 대답은 기대하지 않는다. 마음의 병이 있다는 것을 아니까.
“조금이라도 힘든 것이 있다면 주저 말고 이 애비에게 말하거라. 알겠느냐?”
“······.”
“너도 이제 우리 황가의 보물이 되었으니.”
부드럽게 말하는 황제였지만, 이건 마냥 좋은 뜻으로 한 말이라곤 볼 수 없었다. 철없이 들으면, 우와! 시아버지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그 속을 보면 집안일을 밖으로 떠들지 말란 얘기도 되었다. 그래, 이제 그녀도 에비뉴의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이곳에 있을 예정 아닌가? 다소 황당한 상황이긴 하다.
“하하하! 내, 오늘 여기 콩가의 술을 모조리 바닥낼 것이외다!”
“그러십시다! 나도 한쪽 팔 거들겠소이다! 하하하!”
“누가 이기나 해봅시다! 병사들은 들어라!”
황제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철의 군대를 향해 외쳤다.
“나보다 먼저 취해 쓰러지는 놈은 여기 두고 갈 줄 알아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10만 명 이상이 들고 있던 꽃을 하늘로 던졌다. 마치 꽃 비가 내리듯 아름답게 수 놓이는 하늘.
-으하하하하핫!
-마시자!
-마셔!
-우와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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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빈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광장에서 장장 사흘을 4만 명의 철의 군대와 함께 술을 퍼마셨다.
먹고 자고 일어나서 또 마시더니 황제라는 체면을 던져버리고, 한량처럼 모두와 어울렸다. 그러더니 거짓말처럼 훌쩍 나흘째 아침 군대를 이끌고, 에비뉴로 돌아갔다.
어제와 오늘의 온도가 달라진 건 아니다. 단지 축제가 끝났고, 이제 현실이 왔을 뿐이었다. 에비뉴의 황제가 남기고 간 흔적을 치우느라 수도의 모두가 달라붙어 광장을 치우자, 어느새 다시 해가 졌다.
이 기간에 신랑 신부도 쉰 것은 아니었다. 황제가 광장에서 술판을 벌이는데, 결혼식의 주인공이 어딜 가겠나? 지긋지긋하게 수발을 들었고,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것인지 기억도 안 난다. 요 며칠을 떠올리며 정말 징글징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한, 번은 카시오페이아가 쓰던 건물을 그대로 쓰며 지내기로 했다. 빈방은 많았고, 모든 곳이 가까웠기도 해서였다. 번으로선 딱히 다른 거처를 얻을 이유가 없기도 했고.
그녀가 항상 앉아 있던 티 테이블. 오늘부턴 여기 두 사람이 앉게 되었다.
아, 번과 함께 한 녀석이 더 들어왔다.
그르르르르릉, 그르르르르릉.
정원의 꽃과 나무를 모두 뽑아내고, 최대한 넓은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건 드래곤의 침실이 된다. 결혼식에서 멋지게 포효라도 한번 해줬으면 좋았겠는데, 녀석은 이제 며칠에 한 번 깨어나는 것도 힘겨웠다.
-저놈, 이제 슬슬 때가 된 것 같다.
악마의 목소리에 번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재수 없는 소리.’
비록 모든 것을 탈탈 털리고, 여기에 처박혔다고 해도 마냥 불행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제 자유를 얻지 않았나? 참으로 비싼 값을 치르고 얻은 대가였지만, 이거 하나가 그 무엇보다 큰 가능성을 지니기도 했다고 여긴다.
원래 그의 삶이 이랬지 않은가? 지렁이나 벼룩 따위로 살아본 경험이 있다면, 이까짓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스윽.
차를 홀짝이던 카시오페이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번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사박 사박 걸어 정원을 향한다.
-야,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
그녀가 드래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딱히 공격할 의도가 없다고 해도 잠꼬대하느라 몸을 뒤척여도 깔려 죽을 수도 있다.
“······.”
번은 일단 지켜본다.
카시오페이아는 겁도 없이 드래곤에게 바짝 다가가서 후욱- 후욱- 뿜어져 나오는 녀석의 코를 손으로 쓸었다.
그러더니 번을 돌아본다.
“..아파요..?”
가까이 있어도 들릴까 말까 한 아주 작은 목소리. 하지만 번의 청각엔 그게 잡힌다.
“그래.”
번이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는 입을 꾸욱 다물더니, 슬픈 표정으로 다시 드래곤을 본다.
-햐, 저러고 있으니 예쁘긴, 진짜 예쁜데? 좋겠다. 야. 그래, 이제 황제도 갔으니 오늘 밤은 화끈하게 불태워야지?
움찔.
그러고 보니..
번은 생각도 못 했던 고민에 휩싸였다. 생식행위 자체에 별다른 거부감은 없다. 하지만 이 악마놈이.. 다 보고 들을 거 아닌가?
“이.. 뭔..”
묘하게 기분이 나빠진 번이 그렇게 피부에 돋은 소름을 지켜보고 있을 때,
콩가 왕국의 외곽.
에비뉴 4만의 군대가 숙취에 찌든 걸음으로 행군을 하고 있었다. 몸은 힘들지만, 참으로 대차게 놀았다는 만족감과 해방감이 그들의 등을 밀어주었다.
잠시 후,
그들이 떠나가고, 길엔 적막이 감돌았다. 간혹 불어오는 바람 소리만이 을씨년스럽게 들려올 때,
스으으윽.
스으윽.
뭔가가 꾸물거리며 땅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한다.
까맣고 불쾌한 수천의 그림자.
번의 흔적을 쫓아 따라왔다가 에비뉴의 군대가 떠나기만을 기다렸던 불청객.
끄으으으으으-
끄그그그그으-
땅속에서 기어 나온 놈들은 즐거운 듯 키득거리다가 몸을 좌우로 흔들며 한 방향으로 돌아섰다.
그쪽엔 콩가 왕국의 수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