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18화 (118/177)

# 다른 꿈 2 #

“그것이 무슨..”

번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황제가 말을 멈추고, 손을 옆으로 뻗었기 때문이다. 펼친 손바닥 위로 은사가 뭔가를 놓아준다.

‘저건..’

익숙한 미향이 사라락 번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간 재미있는 일을 여럿 벌였더구나.”

“……!”

황제가 밖으로 나돌고, 번이 세력을 구축하던 최근 몇 년. 의식하지 못한 사이, 황제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네가 노력하는 것은 안다만.”

황제는 손 위의 세이프 레인보우를 와락 움켜쥐고는 뒷짐을 지며 창가로 걸어갔다.

“나는 애비다. 그리고 자식이 너 하나는 아니지.”

황제가 이야기를 하는 사이, 번은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을 진정하려 애썼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기회는 균등해야 하고, 부모로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편애偏愛다.”

얼마 전 에비뉴를 떠날 때, 집정관의 몸에서 레인보우 립 향이 풍겨 잠깐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가 이것이었나? 그땐, 집정관 역시 마약을 취급하고 있었으니 당연하다 생각하여 애써 넘겼는데, 돌이켜보면 프로가 백작 일을 너무 쉽게 넘겼었다. 집정관 성격에 그렇게 넘어갈 사건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생각해보면 추궁도 없었다. 아니, 그러한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어디서부터 꼬리를 밟힌 거지?’

번은 궁금했으나,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가 다른 것까지 걸려들까 조심스러웠다.

“다소 불법적이고 편법적인 일들이었지만, 그것 모두 황국을 위해 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겠다.”

황제가 번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이 순간, 번은 느낀다.

은사, 딘딘, 스캇까지 내 편은 없다는 것을.

딘딘은 언제나처럼 그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이었고, 은사는 언제든 명령만 떨어지면 손을 쓸 수 있을 것처럼 눈에 살기까지 내비치고 있었으며, 스캇은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그 장난스러운 웃음을 한쪽 입꼬리에 매달고 있었다.

그래, 처음부터 이랬다. 잠시 착각하고 있었을 뿐. 이 남자와 그의 측근은 결국 번이 넘어야 할 마지막 산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소국이었던 에비뉴를 황국으로, 그것도 모자라 제국으로 만들려 하는 이들이다. 그걸 거저 얻었겠는가?

“빈국을 먹고 살 만하게 끌어올리는 네 기지도.”

벨버른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상단을 꾸려 조직을 관리하고, 사람들의 돈을 투자받아 거대한 공동체를 조성하는 방식 역시, 이전에 없던 기발한 것이었다.”

“…….”

번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린다.

하나 상단과 번영회의 일까지 다 꿰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피부 까만 이종족 또한, 꽤 쓸모가 있었고.”

다크 엘프까지..

“마계의 나무 또한, 훌륭하더구나. 네가 처음부터 거짓을 고하진 않았을 테니, 최근 유통기한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봐야 옳겠지?”

절망적이었다.

황제의 호랑이 같은 눈동자가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떠보는 것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여인들을 이용해 군대를 조직한 것 역시 훌륭했다.”

“…….”

자박, 자박.

숨 막힐듯한 정적 속에서 황제가 천천히 번의 앞으로 걸어왔다.

이 남자가 이렇게 커 보였던 적이 없다.

4살 아이였을 때도, 9살 꼬마였을 때도, 대청에서 그를 마주했을 때도 이보단 자신감 넘쳤었는데.

“상심하였느냐?”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번은 이 순간에도 초인적인 인내심을 보였다.

“아니옵니다.”

“쯧, 끝까지 어른스러운 척하는구나. 네가 나중에 자식을 낳아보면 알 것이다. 제 놈이 아무리 머리를 쓰고, 똑똑하다 날뛰어도 부모 눈엔 다 보이는 법이라는 것을. 이건 아무리 영특하거나 지능이 높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시간이 주는 선물이지.”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을 쑤셨다.

넌 아직 멀었다, 라는 말이었으니까. 삼장 손바닥 위에서 뛰노는 원숭이처럼 아주 더러운 기분을 진하게 맛보며 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설마 그녀까지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황비를 빼돌린 걸 들키는 날엔 목을 보전하지 못하리라. 또 뭐가 있지? 드래곤의 보물? 은밀한 지하실?

“전에 네가 이런 말을 했었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지지 않을 것이라고. 어떤 장수가 했던 말이라 했던가?”

이순신..

“예.”

“고개를 들라.”

번이 얼굴을 들었다.

당황한 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했다.

“네 패착은 바로 그것이다.”

“……?”

“너는 십위十衛를 얕보았다.”

황제의 눈은 아주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십위十衛.

은사의 그림자이자, 지난 십여 년간 황국의 모든 은밀한 일을 도맡아 해온 베테랑. 그들은 아마 번에게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보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번의 능력을 가늠하고, 분석하며 기회를 노리고 틈을 파고들었다. 그건 결국, 적은 나를 아는데, 나는 적을 몰랐던 말이 된다.

“딱히 멀리 뛰어다닐 필요도 없었지. 그저 너만 지켜보면 되는 일이었으니.”

“아..”

육체적인 능력이 전부가 아니었다.

싸움을 잘한다고 그가 모든 곳에 유능한 것도 아니며, 검술이 뛰어나다고 황제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곳에 없어도 지배하며, 함께 하지 않아도 통제한다. 늘 남들보다 몇 수 앞을 보고 있어야 하고, 결코 조급해하지 않으며 때를 기다린다. 체스처럼.

이런 사람이 하는 거다.

이런 남자가 앉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황좌다.

“소자의 실책이었습니다.”

번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 순간 잃은 것에 대한 억울함보다, 내가 가야 할 길이 뚜렷하게 보인 시원함이 더 컸다.

“그들이 너의 사람이라 생각했더냐?”

“솔직히 고하자면 그랬습니다.”

딘딘은 몰라도 은사, 스캇은 내게 많이 기울었다 여긴 번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 더 잔인하게 말하자면 조작된 기억이었다.

“기죽을 거 없다. 네 나이를 생각하면, 네가 이룬 것들은 충분히 대단한 것들이었으니.”

‘빌어먹을.’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고작 열다섯이 아니지 않은가? 그의 삶은 이번 한 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공으로 생각하면 반역죄로 몰아 목을 잘라도 부족함이 없다.”

“……!”

“허나 아비와 자식으로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으니, 사적으로 구분해야겠지.”

적어도 죽이진 않을 것 같다.

‘빌어 처먹을!’

15년. 그토록 노력했는데, 이 남자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일어나거라.”

“예, 폐하.”

번이 황제와 눈을 맞췄다. 그러자 황제가 번의 가슴을 가볍게 주먹으로 쳤다. 심장이 있는 위치다.

“모두가 혼자 태어나, 혼자 죽는다.”

황제는 어린 아들에게 조언한다. 몸은 훌쩍 컸지만, 아직 애송이나 다름없는 철부지에게.

“농부는 아무것도 없는 땅을 갈아 씨를 뿌리고, 비바람과 싸우며 작물을 수확하지. 그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땅에서 캐낸 기적은 많은 사람을 먹이지.”

번은 황제를 바라보며 끄덕였다.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 또한 잃었다 생각하지 마라. 에비뉴는.”

번의 볼이 꿈틀거렸다.

어금니를 너무 꽉 깨물어서 그렇다.

“내 것이고, 앞으로도 내 것이다.”

“…….”

“하지만 부모와 자식 간엔, 그것이 아니다. 너는 내 것이 되고 싶으냐?”

씨를 받아 황자로 태어난들 그게 뭐? 이 남자는 애초에 자식에게 금화 하나 순순히 물려줄 생각 따윈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저 땅이다. 이 땅에 무얼 뿌려 키울진 네가 스스로 정해야 하는 것이다. 남이 피땀 흘려 키운 것을 훔칠 생각 말고.”

“…….”

“벨버른 역시 내가 따냈으니, 내 것이지.”

“소자..”

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래야 가르치는 맛이 나지 않겠느냐?”

껄껄 웃는 황제는 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곤 다른 손을 번의 앞에 폈다.

캡슐이 으그러진 세이프 레인보우가 보였다.

“누군가는 이것을 보며 쾌락과 돈만 좇겠지만, 누군가는 이것을 통해 세상을 본다.”

번은 담담하게 끄덕였다.

“여기 남는 것을 유배라 생각하면, 너는 전자가 될 것이오.”

황제의 말을 번이 잘랐다.

“기회라 여기겠습니다.”

말을 끝내지 못했음에도 황제는 노하지 않았다. 더 환하게 웃으며 번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물러났다.

“말했다. 여긴 전초기지로 쓸 것이라고. 3년. 그때 네가 이룬 것을 보자꾸나.”

내 편 하나 없는 이런 외진 곳에, 고작 열다섯 어린 아들 던져놓고 뭔가 해보란다. 기막히고 코 막힐 일이었지만, 아버지도, 아들도 그게 불가능한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

“나는 너에게 가능성을 보았다. 뿌리가 튼튼하고, 굵게 자랄 나무의 싹을 보았다.”

황제는 다시 창가로 가서 뒷짐을 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말도 하지 않았겠지. 말을 아낀 황제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은사를 보며 끄덕였다. 그러자 은사가 번에게 다가온다. 의중을 눈치챈 번. 황제에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

“이번엔 결코, 실망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번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다가오던 은사가 멈칫할 정도로 공격적인 어조였다.

“하하하! 그래! 그래야 할 것이야! 그때가 되면 너도 어른일 것이니, 내가 너에게 책임에 관해 가르치지 않도록 하는 게 좋겠지. 두 번 다시 이런 관대함을 받긴 힘들 것이니.”

황제는 시원하게 웃으며 창밖을 응시했다.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던 번. 몸을 돌렸다. 굳이 은사가 움직이지 않아도 알아서 나갈 거다.

-제대로 당했구나. 저 자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야. 인간 중에선 보기 드문 대단한 사람이다.

악마가 평가하지 않아도 충분히 안다.

태어나도 하필 이런 집구석에 태어나, 천 년에 한번 날까 말까 한 위인과 겨뤄야 한다니. 거, 인생 한번 참..

-이제 어쩔 거냐?

어쩌긴..

밖으로 나오니 거짓말처럼 분위기가 변했다.

화사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보며 번은 깊게 숨을 내쉰다. 그리곤 문가에서,

“이곳에서도 십위 눈치를 봐야 하는 건가요?”

은사에게 묻는다.

“아닙니다. 모두 철수할 것입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번이 서늘하게 웃자, 은사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닙니다. 암중에서 태자님을 호위하던 것도 십위였으니까요.”

“제 한몸 지킬 여력은 됩니다.”

“저 늙은 드래곤을 믿는다면, 그것 역시 아직 세상을 좁게 보고 계신 겁니다.”

“…….”

한 방 먹었다.

황제는 이미 드래곤이 별 쓸모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는 거다. 하긴, 그게 아니었다면 벌써 그의 손에 넘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인가?

“저는.. 3년간 돌아가면 안 되는 겁니까?”

“접촉하지 않으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염려 마십시오. 일궈놓으신 것들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더 발전해있겠지요.”

황제와 집정관이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하면, 아마 지금보다 몇 배는 성장할 거다. 발키리도, 레인보우도..

“후..”

큰 숨 한번. 그리고 번은 웃었다.

저 먼 하늘을 바라보며 홀가분한 표정으로 숨을 내쉬는 그 모습에 은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웃어?’

가장이 아니다. 저 미소는 진심으로 후련해 보였다.

“뭐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은사는 묻는다. 지난 1년, 십위의 보고를 받고, 정리하며 들었던 의문. 황자라는 신분을 떠나, 순수하게 번이라는 인간에게 느끼는 감정을 말이다.

“왜 대립하시는 겁니까?”

은사의 눈엔 그게 보였다.

비위 맞추며 아버지 옆에서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도 될 것인데, 왜 싸우려 하는가?

“…….”

번은 고개를 돌려, 은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말을 이자에게 해도 될까 갈등하는 사람처럼. 그러다가,

“당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번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

그래, 오늘은 졌다.

하지만 그가 무조건 이겼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번 또한 그의 진면목을 보았고, 무뎌진 가슴에 스스로 비수를 쑤셔 박았으니까.

‘두 번은 없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주먹을 불끈 쥔 번이 발걸음을 뗐다.

“…….”

번이 그렇게 저편으로 걸어가고, 남은 은사.

질문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지만, 그 속에서 은사는 답을 찾아냈다.

“적敵이라..”

쓰게 웃음 지을 수 밖에 없다. 그 아비에 그 아들 아닌가?

-하하하하..!

어느새 멀어진 번에게서 시원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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