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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117화 (117/177)

# 다른 꿈 1 #

처음엔 그저 장난처럼,

-허허, 금이야 옥이야 키운 공주를 이역만리 타지로 보낼 생각에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나 또한 자식 둔 아비라 충분히 공감합니다. 해서 말인데···.

시작한 내기.

하루 이틀 체스를 둘 땐, 게임에서 져도 그리 화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패배가 계속되고, 이게 슬슬 장난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을 땐, 이미 12판을 지고 난 후였다.

-장난이라니요? 제가 설마, 금보다 귀한 시간을 그리 허투루 쓰는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반장난, 반협박.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알아챘을 땐, 이미 늦어버렸다.

급히 현자도 초빙해서 가르침을 받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왕국 제일의 체스 고수를 데려와 특훈도 해봤지만, 에비뉴의 황제는 빈틈이 없었다. 이건 뭐 밥만 먹고 체스만 둔 사람처럼 단 한판도 양보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오며 가며 아이들 고생만 시킬 것이 뻔한데, 식은 간소하게 이곳에서 한 번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제의 말에 왕은 입을 다물었다.

“…….”

벌써 대신들의 아우성이 들려오는 것 같다.

-아니, 어찌 그런 내기를 하셨사옵니까?

-분명 저 에비뉴의 황제가 지독한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데릴사위라니요! 이런 건 말도 안 됩니다!

-그 태자가 우리 왕국에서 뭘 한단 말입니까? 눈치만 봐야 할 터인데, 이건 꿔다놓은 보따리가 아니라 애지중지 돌봐야 하는 새끼 염소가 아닙니까?

여러 황자 중 하나도 아니고, 무려 태자란다. 후계 싸움에서 밀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핏줄이라면 이해하겠는데, 에비뉴에서 가장 유력한 황위 계승 서열 1위이며, 심지어 어린 나이에 전쟁 영웅으로 칭송까지 받고 있다 한다.

이게 뭔가?

“그건.. 차차 생각해보겠습니다.”

“너무 늦으면 곤란합니다. 제가 슬슬 떠나야 할 것 같은데, 그 전에 자식놈 식은 꼭 보고 가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혼을 왜 여기서 하느냐고! 버럭 외치고 싶었지만, 왕은 꾸욱 참았다.

“노력..해 보지요.”

황제와 헤어진 왕은 축 늘어진 어깨로 정원을 걸었다.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을 지나, 고풍스럽지만 깨끗하고 정갈한 3층짜리 건물로 들어섰다.

그러자 눈앞에 드러나는 공주.

거실 밖 테라스에 그림같이 앉아있는 딸을 보며 왕은 슬며시 미소를 띄웠다. 죽은 아내를 똑 닮아 보석처럼 빛나는 아이.

“카시오페이아Cassiopeia.”

그의 낮은 부름에 스윽 돌아보는 두 눈은 저 하늘의 별을 박아 넣은 것 같았다. 사내자식만 줄줄이 낳다가 어렵게 얻은 소중한 딸인 그녀다. 하지만,

“…….”

꾸벅 머리를 숙이는 딸을 보며 왕은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볼이 빨갛구나. 오래 나와 있었느냐?”

그의 물음에 그녀는 그저 슬며시 머리로 저었다.

“녀석..”

아니라 하지만 안다. 딸애가 늘 이곳에 나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재작년 가을쯤인가? 아마 제 어미가 죽은 그 해부터였을 거다. 아이가 말을 잃고, 이곳에 메여 있던 것이.

“애비가 원망스럽지 않으냐..”

이 아이도 이제 알고 있었다. 열넷 어린 나이에 생판 처음 보는 남자와 혼인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공주의 운명이 다 그렇다지만, 마음의 병이 있는 것을 알아서 일까? 더욱 눈에 밟힌다. 가서 모진 꼴을 당하진 않을지, 병신이라며 손찌검이라도 하진 않을지..

도리도리.

공주는 웃으며 얼굴을 흔들지만, 그래서 더 처연했다. 왕은 의자를 옮겨 딸애의 옆으로 갔다. 그러면서 그녀의 손을 끌어와 두 손으로 잡았다.

“일이 좀 이상하게 꼬였다. 당분간 에비뉴의 태자가 이곳에 있을 것 같구나.”

“……?”

아직 딸애는 이 황당한 내기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여기가 본궁과 그리 멀진 않았지만,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격리된 삶을 자처하고 살았으니 소식에 느릴 수밖에 없었다.

“애비가 알아서 할 거다. 혼란스럽다 해도 당분간만 참거라. 알겠지?”

영혼없는 사람처럼 끄덕이는 딸애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대체..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모르겠구나. 하아..”

에비뉴와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아주 큰 모험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건 기회이기도 했다. 매년 제국에 바치는 공물도 버거웠고, 무엇보다 제국에서 사신이 오면 심한 모멸감을 느껴야만 했다. 400년 넘게 제국의 속국으로 살아오며 쌓인 원한. 이제껏 그 어떤 나라도 제국에 대항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제국을 넘어설 마음을 품지 못했었다.

그런데 저 에비뉴의 황제가 시도하는 거다. 놀랍게도 이미 제국과의 일전에서 승리를 했으며, 주변국의 동맹까지 끌어내고 있었다. 물론 왕국 몇 개 모인다고 제국과 자웅을 겨루긴 한참 모자라겠지만, 이것이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지 않나? 그래 봐야 괘씸죄로 몇 년 세나 올리고 말겠지.

“바람이 차다. 오래 있지 말고 들어가거라.”

더 고민해봐야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왕은 입맛을 다시며 일어났다.

이제 대신들에게 가서 알려야 했다. 결혼식 준비를 해야 한다 말하면, 얼마나 난리가 날지..

뚜벅뚜벅 걷다, 뒤를 돌아보는 왕.

딸애는 처음처럼 앉아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삶의 의욕을 다 잃어버린 사람처럼.

“카시오페이아..”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 머리를 흔들며 다시 걷는 왕.

딸 아이가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는 걸 알기에 더 안쓰러울 뿐이었다.

.

.

.

드래곤.

2~3천년 연령대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며, 질풍노도 사춘기 청소년처럼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곤 한다. 인간 세상에 내려와 장난도 많이 치고, 무작정 폭력적으로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는데, 사실 개체 수도 많지 않고 수명이 워낙 길어 이런 드래곤의 유희를 목격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모습은 듣도 보도 못했다.

-허얼..

-드래곤을 종처럼 부린다더니, 소문이 사실이었어?

-보고 있어도 믿을 수가 없군.

콩가 왕성 위를 거대하고 까만 그림자가 천천히 선회하자, 사람들은 우르르 밖으로 뛰쳐나왔다. 드래곤 딴엔 이들을 배려한 거다. 바로 내려서면 난리가 날 걸 아니까.

펄럭, 펄럭-

빙빙 돌다 천천히 내려오는 커다란 몸뚱이를 보며 사람들은 그저 입만 떡 벌렸다.

마침내 쿠웅-!

흙먼지가 사방으로 후욱 풍길 때, 드래곤의 머리에서 누군가가 훌쩍 뛰어내려 한 사람의 앞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소자.”

한쪽 무릎을 꿇고, 쩌렁쩌렁하게 외친다.

“번,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황제는 뒷짐 지고 서서 흐뭇하게 웃었다. 그의 뒤론 스캇과 딘딘이 서 있다.

“그래, 혼자 온 것이냐?”

“예, 그편이 편하다 생각했습니다.”

황제는 눈동자를 들어 번의 뒤쪽을 보았다. 드래곤이 숨을 씩씩 내쉬며 자리를 잡고, 누우려는 것 같았다. 별거 아닌 그 동작에도 사람들은 탄성과 감탄을 연발하며 구경 중이다.

-저거 진짜야?

-보고도 몰라?

-마법이나 속임수 아닐까?

-드래곤이라고! 우리 모두가 속는다는 게 말이 되니?

소란스런 와중에도 사람들은 부자父子의 재회에 절로 눈길을 모여진다.

“일어나거라.”

“예, 폐하.”

번은 이제 황제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고작 몇 달 못 본 것뿐인데, 아들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었다.

“많이 컸구나.”

“몸만 자랐을 뿐입니다. 아직 배워야 할 것도, 익혀야 할 것도 산더미옵니다.”

번의 말에 황제는 웃었다.

원, 녀석. 말은 참 기똥차게 잘한다.

“황국엔 별일 없더냐?”

“예, 폐하께서 지성至誠으로 보살피시는데, 무슨 일이 있겠사옵니까.”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늘 마음으로 살피니, 하늘이 돕는다는 뜻이었다. 황제는 번에게 다가가 그의 등에 팔을 두르더니 툭툭 두드리며 이끌었다.

“……?”

이런 정감 어린 스킨십은 처음 받아보는 번이었기에 잠깐 움찔했다. 그러다 저쪽에 나와 있는 왕관 쓴 중년인을 보자, 느끼는 게 있어 장단을 맞춘다.

“인사드리거라. 콩가 왕국의 왕이시다.”

이미 서로 어떤 혼약이 오갔는진 다 알고 있었다. 장인과 첫 만남이나 마찬가지인 순간.

“번 리갈 드 요르간드 바야흐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태자가 올해 열다섯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허어.. 뜻밖이군요.

-저리 듬직하다니..

-어머! 어머! 에비뉴의 태자님, 너무 멋지시다.

-어쩜 저리 잘 생기셨을까?

콩가 왕국의 대신들은 어른스러운 번을 보며 혀를 내둘렀고, 궁녀들은 눈을 크게 떴다.

"……!"

왕 역시 경황이 없었다.

저 드래곤도 충분히 놀랐지만, 이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발산하는 태자 또한 거목의 자질을 가졌지 않은가? 자신이 상상하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훤칠한 키.

짙은 눈썹은 사내다웠고, 목소리는 듬직했으며 몸가짐에서 나오는 묵직함까지 어디 하나 손색이 없었다.

“반갑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어.”

번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져주며 왕은 황제를 보았다.

“연회를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부자간에 쌓인 이야기도 많을 터이니, 저녁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내 황제가 번과 함께 별채로 이동하자, 대신들과 남겨진 왕은 침을 삼켰다.

그르르릉, 그르르르릉.

피곤한지 코를 골며 잠을 자는 드래곤.

저 거대한 생물은 아무리 보아도 곁에 두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떻게 보나?”

왕이 툭하고 묻자, 옆에서 빵처럼 동그란 빨간 모자를 쓴 중년인이 바짝 붙어 답한다. 그는 왕의 20년 지기 친구이자, 왕국 제일의 지략가답게 왕이 드래곤을 두고 묻는 것이 아님을 바로 알아차렸다.

“품기엔 너무 큰 것 같았습니다.”

“경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던가?”

“소문이 전부 사실이었다고 가정할 때, 10년만 지나도 제 아비를 넘어설 것 같습니다.”

일단 저 드래곤만 해도 그렇다. 세상 어느 누가 저런 걸 말처럼 부리겠는가?

“저런 아들을 대체 왜 여기에 두고 가려는 것인가..”

에비뉴의 태자는 한눈에 봐도 비범했다. 딱 보자마자 누구라도 사위 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말이다. 실상 그렇게 되긴 했다만, 의중을 모르겠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냥 평범하게 공주를 데려가 자식새끼들 주렁주렁 낳고 살면 되는 거 아닌가?

“연회 때, 다시 떠보시지요. 아직 시간은 충분합니다.”

“으음..”

왕은 끄덕이며 얼굴을 돌려 저쪽을 보았다. 귀빈이 묵는 별채의 지붕 끝이 보인다.

“그러지.”

저녁에 다시 설득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왕이었다.

한편.

번과 함께 별채의 거실로 들어간 황제.

“은사.”

“예, 폐하.”

그의 말에 스윽 귀신처럼 은사가 나타났다.

“귀는?”

주변에 듣는 이가 있냐는 말이다.

“없습니다.”

"주시하도록."

밖에서와는 전혀 다른 기도를 풍기는 황제가 끄덕이며 돌아섰다.

“태자는 듣거라.”

“예, 폐하.”

분위기가 변했음을 느낀 번도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 콩가 왕국은 다섯 개의 중소 왕국과 인접해있고,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알고 있사옵니다.”

“주변국뿐 아니라 대륙 전체로 보자면 노른자의 바로 아래 딱 붙어 있다고 할 수 있지.”

황제의 몰아치는 박력에 숨이 턱턱 막힐 정도다. 차 한잔 내어주지도 않고 심각한 얘기부터 꺼내는 황제의 태도에 번은 바짝 긴장했다.

“3년이다.”

황제의 눈빛이 부리부리하게 빛났다.

“3년이라 하심은?”

번의 물음에 황제는 바로 답했다.

“3년 이내에 나는 군사를 모아 제국과 일전을 치를 것이다.”

지난 후단 전투 같은 것이 아니라, 양국의 사활을 걸어야 하는 대전大戰을 말하는 것이었다.

쿠웅-!

번이 거칠게 무릎을 꿇었다.

“소자, 이 한목숨 바쳐 돕겠사옵니다!”

번이 기세등등하게 외쳤으나, 황제는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을 뿐이었다.

“아니.”

“……?”

번의 고개가 들렸다.

“너는 그다음이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는 번에게 황제가 말했다.

“나는 이곳 콩가 왕국을 전초기지로 쓸 생각이다.”

황제는 제국과의 전쟁 이후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싸움은 시작도 안 했는데, 뒤의 계획을 벌써 세우는 황제의 배포에 기가 막히다.

“해서 널 여기 남길 생각이다.”

“……!”

번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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