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16화 (116/177)

# 깽판 #

비가 왔는지 흙이 젖어있었다.

번은 수풀을 헤치며 산을 탔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가늠도 안 된다. 구글 지도나 내비게이션 같은 것을 만들면 떼돈을 벌 수 있는 세상. 그만큼 한번 길을 잃으면 답이 안 나온다는 얘기도 되었다. 뭐, 그래도 저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가 이정표가 되어주니 다행이랄까?

“끄응-차.”

울창한 나뭇잎을 손으로 치우며 허리를 펴는 번.

길이 끊겼다. 바로 앞은 절벽.

그리고 저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이 보였다. 계단식 논이 위에서 아래로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고, 여느 오지의 마을처럼 불빛이라곤 집에서 새어 나오는 것들이 전부였다.

그런데,

“흐음.”

이상한데? 번의 눈이 가늘어졌다.

처음엔 모닥불 따위가 피워올리는 연기로 여겼는데, 이렇게 보니 그게 아니었다. 집 한 채가 통째로 활활 타고 있는 거다.

-이봐.

번이 움직이려는데, 악마가 불렀다.

“왜?”

-느낌이 좋지 않다. 다른 길을 찾자.

“음?”

이 녀석이 이리 말했던 적이 있던가?

“무슨 느낌?”

-그냥 기분이 좋지 않아. 저긴 가까이하지 않는 편이 좋겠어.

악마의 말에 번은 피식 웃었다.

자기가 무슨 선량한 멘토나 절친한 조언자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잊지 말자. 이놈은 악마다.

-어이, 야!

주르르륵.

번의 몸이 훌쩍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일반인에겐 천 길 낭떠러지로 보였겠지만, 이 절벽, 저 절벽 훌쩍훌쩍 뛰어다녔던 산양으로도 살아본 그였기에 이런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금세 다다른 마을 어귀.

폐쇄된 사회일수록 낯선 이의 방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이 마을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오늘은 예외인가 보다. 번이 접근하는 걸 봤지만,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은 눈만 부리부리하게 뜰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활활 불타는 집 주변에 둥그렇게 모여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눈은 여러 감정이 담겨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은 회한이었다.

“저기, 말 좀 물읍시다.”

번은 목소리를 높여 말을 걸어보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괴이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뭐랄까? 이들은 잔뜩 경계하는 표정이었지만 불청객을 저지하지도 않았고, 그 흔한 소란조차 없었다. 그저 말뚝처럼 그 자리에 박혀 불길만 보고 있을 뿐.

‘뭐야?’

생소한 반응에 의아해할 때,

-가자니까!

번은 움찔했다.

악마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악마가 외치는 순간, 사람들의 얼굴이 전부 이쪽을 향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들 역시 악마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말이다.

-이것들 뭐야?

악마도 당황했는지 허둥댔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절로 떠오르는 순간. 게다가 악마가 이런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도 웃겼다.

쯥, 가볍게 입맛을 다신 번. 태연한 척 다시 말을 걸어본다.

“길을 잃었습니다. 콩가 왕국이 어느 쪽인지 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타닥, 타다닥.

불길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집 주변에 고랑을 파놓지 않았다면 마을 전체에 영향을 줄 정도로 큰 화재였다. 그런데도 아무도 진화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거참.”

계속된 냉담한 반응에 황당한 번이다.

그거 알려주는 게 그리 어려운가? 아니, 단체로 벙어리라도 된 건가? 이상한 점은 그 뿐이 아니었다.

사람이 이만큼 모이면 작은 소리라도 나야 정상이다. 뾰족한 감탄사나 신음, 속닥이는 것 같은 거 말이다. 그런데 새근새근 숨소리 말곤, 일절 아무 소음이 없었다. 심지어 어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코흘리개 애도 있는데 말이다. 이게 말이 되나? 이건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가만히 주시하던 번.

“······.”

됐다. 이리 거부하는데, 뭘 더 할까?

조용히 발길을 돌리려는데,

「아이야.」

수백 개의 입에서 동시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온 몸에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괴한 일이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도망쳐!

악마가 다급히 말했지만, 번은 눈을 깜빡이며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의 모든 눈동자가 이쪽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보면서 깨달은 건데, 확실한 것은 절대 이들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

뭔가가 개입했다. 그리고 이런 힘을 발현할 수 있는 것은 단 두 종류밖에 없다는 걸 번도 알고 있었다. 신이거나,

“한동안 뜸하다 했더니..”

악마거나.

“내게 무슨 볼일이지?”

까맣게 잊고 살다가도 이런 순간이 오면 기분이 더러워진다. 신을 마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한없이 이쪽이 작아지는 기분이었으니까. 덩달아 놈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느낌도 들었고.

「그 길, 가지 마라.」

“허..!”

어이가 없다는 듯 신음하자, 다시 목소리가 들린다. 마을 사람 전체가 동시에 다른 목소리로 같은 말을 웅얼거리니, 마치 벌떼가 웅웅-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널 위한 충고다.」

“명령이 아니고?”

번이 이죽거리자, 사람들의 몸이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혼 없는 언데드 무리 같다.

「많은 신이 지켜보고 있다.」

“그래서?”

어쩌라고?

「모두가 너를 달가워하는 것이 아니다.」

“염병하네.”

번의 불경하고 거친 말에 사람들이 작살을 맞은 듯 바르르 떨었다. 아무래도 이들은 꼭두각시 같다. 길을 물어도 알려줄 사람이 없다면 더 있을 이유도 없겠지.

“내 길은 내가 정해.”

헬조선에서 태어나 수험생으로 살았다. 뭐 그거까진 그렇다 치자. 그 뒤로 이어진 삶은? 인제 와서 뭐? 인도자 노릇이라도 하시려고?

파리로 태어나 개구리 뱃속으로 들어가면서도, 송충이로 태어나 새의 부리에 찍혀 온몸이 터지면서도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꿋꿋하게 버텨온 삶이다. 이제와 다 널 사랑해서 그런 거다, 신은 언제나 함께 하신다, 라고 말하면서 다리 슬쩍 걸치려는 건가? 그리고 뭔가 전하고 싶다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같은 육하원칙에 의거해 친절하게 설명해도 모자랄 판에 대뜸 가지 말라면, 그걸 누가 들어?

「그 앞엔 재앙만 있을 것이다!」

형형한 눈을 뜬 사람들이 팔을 들더니, 손가락을 펴고 번에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꿈에 나올까 두려운 장면이 펼쳐지지만,

“재앙은..”

번은 침을 퉤 뱉으며 몸을 훌쩍 돌렸다.

“늬들이 재앙이고!”

이제 좀 사람답게 살아보려는데, 뭔 수작질이야?

번의 몸이 앞으로 후욱 쏘아졌다.

그의 민첩함이라면 여길 벗어나는 것쯤은 어렵지 않으리라. 하지만..

구우우우웅-

「경고, 육체 기능이 저하되었습니다.」

「경고,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노출되었습니다.」

돌덩이를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것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달려나가려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번.

“이.. 씨..”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런 번의 위로 메뚜기처럼 사람들이 뛰어들기 시작했다.

「저항하지 마라.」

귓가에서 생생하게 들려오는 어떤 노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번은 순간, 고민했다. 과격히 뿌리치고 싶은데, 묘하게 거슬린거다.

이들은 그저 죄 없이 이 시골구석에서 살고 있었을 선량한 자들 아닌가?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이들을 다치게 해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엄연히 다른 기분. 그래, 이건 번의 마음속에 남은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이것마저 없으면 그는 지금보다 더욱 동물에 가까워지리라.

그 사이,

터업! 터업!

사람으로 쌓인 탑은 계속해서 넓고 높아져 갔다. 어릴 적 친구들과 햄버거나 샌드위치라고 이름 붙인 비슷한 놀이를 했던 것 같긴 한데, 분명 이런 기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적당히.. 해..”

번의 이가 빠득빠득 갈렸다.

알 수 없는 힘이 온몸을 옥죄고 있다지만,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다.

인내심보다는 인성의 문제.

「무의미한 일이다.」

밑바닥까지 참고 또 참아온 그게 아슬아슬하게 터지려는 그때,

후우우우우우우웅-!

하늘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냥 바람이 아니다. 태풍이라도 몰아치듯 강력한 어떤 것이 전력을 다해 쏟아내는 재해!

「이노옴!」

사람들은 나뭇잎처럼 사방으로 날아가면서도 고함쳤다.

카라라라라라라라!

대기가 터져나가는 것 같이 쩌렁쩌렁한 포효에 사람들이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몸을 움츠렸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충격에 몸이 절로 반응한 것이다.

혼란 속에 벼룩처럼 뭔가가 툭! 하늘로 튀었다.

“나이스 타이밍!”

번이었다. 그는 힘껏 뛰어올라, 드래곤의 발가락을 붙잡았다. 위에서 뚝 떨어져 지상에 닿기 전에 날개를 활짝 펼쳐 몸을 멈춘 드래곤은 그것으로 풍압을 만들어 사람들을 날려버리고, 고고하게 날개를 펄럭이며 떠 있었다. 그러다 번이 달라붙자, 힘차게 비상한다.

쑤욱-!

하늘로 떠오르는 드래곤의 몸.

「후회할 것이다! 후회할 것이야!」

이 와중에도 사람들은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며 외치고 있었다.

“휴우..”

십년감수 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아래를 보는 번. 차라리 전장에 나가 싸우라면 하겠는데, 이런 건 영 내키지 않는다.

“저거 뭔데?”

번이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악마가 그렇게 말했지만, 번은 느꼈다. 이놈, 알고 있다.

“너희 쪽 놈이냐?”

-아니거든!

악마가 발끈하다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놈은 신도 아니며, 악마도 아닌 중간 존재. 타락신이다. 가장 위험하며 음흉하고, 신사적이지.

“신사적이라고..?”

번이 헛웃음을 흘리며 저 아래를 내려다본다. 아직도 사람들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지 허둥대고 있었다.

단언컨대 번은 이 세계에 온 이후로 신이 직접 저렇게 인간을 부리는 것을 처음 보았다. 심지어 저 가이아 신전의 사제들도 저렇게 꼭두각시처럼은 아니지 않나?

-기준을 인간에 맞출 필욘 없으니까. 어쨌든 저놈은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아. 악마보다 더 어둡고, 과격한 놈이니까. 전설에 따르면 저자는 자신을 잡으러 온 천사 일천을 도륙하고, 그 피를 마셨다고 하지. 종잡을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자다.

그런 대단하신 분이 왜 이 구석까지 와서 사람을 놀래켜?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아래를 보다가 머리를 흔드는 번.

그보다,

“너, 괜찮냐?”

-나야 뭐, 딱히 공격을 받거나 한 건 아니니까.

‘너 말고.’

-······.

기세 좋게 날아오른 것치곤 점차 날개의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은 날 수 있다.」

'아직은.' 이 세 글자가 이리도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번은 입을 꾹 다물고,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손으로 녀석의 발가락을 툭툭 두드렸다.

“그래, 또 떨어지면 그땐 가만 안 둔다.”

대답 대신 숨을 '크아아아아아' 크게 들이마시는 것으로 대신한 드래곤은 더욱 힘차게 날개를 움직였다.

번은 쓰게 웃으며 저 앞을 바라보았다.

‘콩가..’

거기에 대체 뭐가 있는데, 이 난리일까?

“웃기지 마.”

번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가 보자! 까짓거!

언제는 꽃길이었던 적 있었냐?

그렇게 번이 드래곤을 타고 훌쩍 날아가자, 아래 있던 사람들이 인형처럼 하늘만 올려보았다.

“······.”

“······.”

그러다가 흐물흐물..

“으으으..”

신음하던 그들의 살갗이 진흙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수백 명이 동시에 반죽처럼 찌부러지더니 잠시 후, 까만 그림자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사람형상을 하고 있지만, 눈코입 아무것도 없는 그저 순수한 어둠의 모습으로 일어선 그림자들.

출렁출렁 몸을 흔들더니,

「가라!」

명령에 다다다다다! 뜀박질 치기 시작했다. 번이 간 그 방향으로..

.

.

.

신의 안배는 놀랍도록 정교해서 모든 것엔 이유가 있고, 법칙 안에 존재할 뿐이라 하였다. 어떤 이는 사람의 인생조차 그 범주에 든다 여겨 애초에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것일 뿐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다 말했는데, 또 어떤 이는 오직 인간만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신의 시험을 이겨내던지 타락할지 결정할 수 있다고도 했다.

누구의 이야기가 맞는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법칙이 존재한다면 그걸 깨는 유일한 것은 법칙을 무시하는 누군가라는 것이다. 이를 초월자라고 할 수도 있고, 다른 카테고리 언어를 빌리면 버그라 부를 수도 있는데, 최근 콩가 왕국에서는 한 남자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법이 통하지 않는 외부의 다른 세계에서 온 깡패.

에비뉴의 황제, 바알 리갈 드 요르간드 바야흐다.

테이블 위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앉은 두 사내. 누가 봐도 백白이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는 판세였다. 황제는 손을 뻗어 비숍을 잡았다.

“체크메이트checkmate.”

맞은 편 사내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걸로 100판째.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내리 졌다. 하지만 그 실력 없음에 자책하기보다는 우스갯소리로 했던 내기를 덜컥 받았다는 것이 짜증이 난다. 물릴 수도 없고, 뱉은 말이 있으니 들어주긴 해야겠는데..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참으로 아쉽구려. 두 수 물리리까?”

황제가 말하자, 맞은 편 남자는 테이블 아래 주먹을 꼬옥 쥐었다. 아무리 국격은 밀린다 한들, 그도 일국의 왕이다.

“됐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무른다고 달라지겠습니까?”

“허허, 서운해서 그렇습니다. 서운해서.”

입은 웃고 있지만, 게슴츠레하게 뜬 황제의 눈이 콩가의 왕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식놈이 민폐라도 끼치지 않을지.”

황제는 게임이 끝난 것을 아쉽다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

콩가의 왕이 황제를 마주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이놈!’

하루 1판씩 100일간 벌어진 황당한 내기. 그것보다 더 황당한 승부 조건.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이제는 그리 여길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요구를 들어줘야 할 때가 왔다.

“저야, 상관없지만 이런 법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시 생각해보심이 어떠신지요? 다른 요구는 얼마든지 들어드리지요.”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면 되겠소이까?”

황제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없으면 만들면 그뿐이지요. 마침 녀석이 오고 있다 하니, 보신다면 마음에 쏙 드실 거외다.”

이미 아들딸 혼인시키기로 했던 일. 거기까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왕자가 공주의 집에 들어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나? 아니, 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수작을 부린단 말인가?

“······.”

입을 다무는 콩가의 왕을 보며 황제는 환하게 웃었다.

“모쪼록 부족한 자식놈이지만, 하해河海와 같은 마음으로 보듬어주시길 부탁하겠습니다.”

그랬다. 데릴사위.

황제가 이 황당한 내기의 조건으로 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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