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정 #
공동체엔 공공의 적이 필요하다.
보통 이러한 기준을 법에 두는데, 에비뉴엔 황제의 말이 곧 법이며 진리였다.
“무슨..”
프로가 백작의 발이 슬금슬금 뒤로 향했다. 번의 눈빛에서 아주 좋지 않은 징조를 읽은 것이다.
이때, 번의 뒤로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다루.”
“예, 태자님.”
“샅샅이 수색하도록.”
“저항하는 이들은 어느 선에서 처리할까요?”
영장 따윈 발부할 필요도 없는 세상. 게다가 아직 황제가 번에게 내린 명령은 유효했다. 7황비를 찍어냈던 마약 제조와 유통에 관련된 자들을 색출하라는 그 명 말이다.
백작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번이 서늘하게 말했다.
“공무집행 중이다. 가로막는 자는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 반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즉결처형한다.”
그 말에 프로가 백작이 기겁했다.
“무슨 짓입니까! 당신에겐 이럴 권리가 없소! 내게 왜 이러는 겁니까?”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프로가 백작이 버럭 외쳤다. 그의 평소 성격도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기에 당황하긴 해도 기죽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가 앞에 둔 이 남자가 누구던가. 파티장에서 봤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맹수가 한 마리 그의 앞에 도사리고 있었다.
“이런, 이런.”
번이 비릿하게 웃으며 손을 훅 내쳤다.
챙그랑.
그가 들고 있던 어떤 물건이 프로이드의 발치를 굴렀다. 쇠붙이 같기도 하고, 검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흐물거림이 보이는..
“······!”
연검이었다.
이런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를 프로가 백작은 잘 알고 있었고. 자연스레 백작의 얼굴이 꿈틀댔다.
“표정을 보아하니, 답은 이미 나온 것 같은데?”
“나, 나는..”
생사람 잡지 마시오. 나는 모르는 일이오! 라고 외치려던 프로가 백작. 하지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번의 몸이 귀신처럼 바짝 다가온 거다.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고.”
씨익 웃는 번의 얼굴을 보며 프로가 백작은 현기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약의 부작용은 아닐 것이다. 그가 복용한 것은 안전하기로 유명한 세이프 레인보우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이제, 그의 목줄을 죄는 올가미가 되었다.
.
.
.
“마약 사건이 끊이질 않는군요. 쯧, 버러지 같은 것들. 아무리 밟아 죽여도 어디서 계속 기어 나오는지.”
다음 날 아침.
집정관은 번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난 일로 프로가 백작가가 발칵 뒤집혔기 때문이다. 늘 자로 잰 것 같이 기계처럼 일과를 소화하던 집정관은 잠을 설친 탓인지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향.
번은 그 익숙한 냄새에 고개를 갸웃한다.
“잠을 깨우는 차군요?”
“오호! 이 차를 알아보시는군요?”
집정관이 놀란 듯 번을 본다.
이 세계에도 각성 성분이 있는 식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콩을 볶아 까맣게 우린 물을 마시는 것은 몇 가지 없다.
‘커피라..’
이 세계에서 커피를 처음 본 번이다. 그가 설명우의 삶을 살 땐, 커피란 기호식품이 주는 파급력이 얼마나 강했던가? 돈을 떠나 그 영향력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입이 아플 지경이니 말이다. 후엔 식당보다 커피전문점이 더 많이 들어섰을 정도였으니, 말해 뭐해.
“대륙의 서쪽 왕국에 다녀온 상인에게 선물로 받은 것인데, 향이 좋아 가까이하고 있습니다. 한잔 드릴까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집정관은 번에게 빈 잔을 하나 내어주곤, 주전자에 있는 커피를 따라주었다. 그러더니 기대하는 표정으로 번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본다.
후르릅.
가볍게 한 모금 들이키는 번.
‘좋군.’
사람의 기억은 놀랍다.
이 한 모금에서 아주 먼 생에 맛본 추억을 바로 떠올린다. 이건 미각에 저장된 맛이라기보다는 삶에 각인된 추억이었다.
맛은 당분 한 톨 들어가지 않은 쓰디쓴 아메리카노와 비슷했다. 수험생이었던 그에겐 물보다 더 가까웠던 음료이자, 습관처럼 목을 적셨던 것. 그땐 이게 왜 그리도 썼던지. 지금은 묘하게 쌉쌀하면서도 아주 좋은 게 자꾸 손이 갔다.
“흐음. 잘 드시는군요?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쓰다고 진저리치기 일쑤인데.”
김샜다는 투로 말하며 입맛을 다시는 집정관에게 번이 웃으며 말했다.
“벨버른에서 몇 번 마셔 보았습니다.”
“하긴.”
페트릭을 떠올린 집정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겠지요.”
에비뉴에 흘러든 것이 가까운 벨버른이라고 가지 않았을까? 게다가 그는 한때 왕이었으니, 많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나중에 한번 알아봐야겠군.’
커피라니 생각도 못 했던 정보였다. 기후만 따라준다면 벨버른의 가난을 단박에 해결할 수 있는 하늘의 선물이 될 수도 있는 일이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되려면 사회, 문화, 생활 수준이 커피를 즐길 수 있을 만큼 올라가야 한다는 단서가 붙겠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딸깍.
집정관이 찻잔을 내려놓고, 손을 배 위로 올려 깍지끼며 번을 바라보았다.
“왜 제게 알리지 않고, 직접 처리하신 것입니까?”
마약에 관련된 모든 일은 집정관이 처리 중이었다.
소문이란 게 어찌나 발빠른지, 아무리 엄포를 놓는다 하더라도 소규모로 레인보우 립을 키워 유통하는 범죄자들이 끊이질 않았다. 아마 그만큼 원하는 이가 많다는 증거이자, 목숨을 걸고 그래야 할 만큼 몰렸다는 뜻이기도 했고.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무얼 못할까? 주로 빈민층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활발했는데, 과거 7황비 아래에서 일하던 자들이 떠들고 다닌 것이 문제였다. 단속한다고 했는데도 바퀴벌레보다 빠르게 번지는 것이 말言 아니던가? 주둥이 하나면 금세 수천, 수만으로 퍼져나가니 말이다.
“보안이 중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집정관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번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해둔 일종의 보고서였다. 하지만 어째, 그 내용보다 종이에 관심을 보이는 집정관.
“호오, 이것이 그것입니까?”
까칠한 질감이 21세기 대한민국의 그것엔 미치지 못하겠지만, 아주 생소하면서도 가볍고 얇은 종이. 게다가 쓰인 글자도 잉크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흡사 여인들이 얼굴에 칠하는 화장품을 굵게 그어놓은 것 같달까?
“예, 상上품이라곤 할 순 없지만, 차차 개선될 것입니다. 어떻게 마음에 드십니까?”
“나쁘진 않군요. 기존에 쓰던 것들보다 얇아 여러 장을 겹칠 수 있을 것 같고, 가벼우니 휴대성도 좋겠군요. 이거, 가격만 저렴하면 아주 널리 쓰일 수 있겠습니다. 흐음.. 그럼 내구성은 어떻습니까? 화기나 습기에 약할 것 같긴 한데.”
“물론, 단점이 있습니다만, 대량생산을 하니 감안할만 합니다.”
“그렇군요. 다른 물건도 있습니까?”
번은 끄덕이며 옆에 두었던 가방을 하나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안그래도 시제품 몇 가지를 챙겨왔습니다.”
투박하긴 하지만, 연필도 있고 그것을 깎는 용도로 쓰는 작은 칼도 있었으며, 다양한 크기의 종이를 공책 형태로 만들어둔 것도 있었다. 아직 접착제가 널리 쓰이지 않았기에 공책은 종이의 왼쪽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묶는 형태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다른 건 알겠는데, 하나의 쓰임을 유추할 수 없던 집정관이 묻는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종이가 돌돌 감겨 뭉치를 이룬 모양.
“휴지라 이름 붙였습니다.”
“휴지요? 이건 어디에 쓰는 물건입니까?”
번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볼일 보시고, 쓰시는 용도입니다.”
“헙..”
돈이 튀면 비단으로라도 못 닦을까? 시간이 남아돌면 매번 씻기라도 할 것이고. 하지만 이 세계의 사람들은 대부분 뒤처리에 그리 공을 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생소한 거다. 이런 개념 자체가.
‘한번 써보면 절대 끊지 못하지.’
번은 속으로 웃으며 집정관에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미리 기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엔 워낙 경황이 없어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프로이드란 자가 보통이 아니더군요. 완전히 뿌리 뽑으려면 조심해야 했습니다.”
휴지를 들고 이리저리 만져보던 집정관. 그것을 내려놓고 끄덕였다.
“그 자에 관해서라면 제 쪽에도 몇 가지 정보가 있었습니다. 특이한 검을 사용하는 오러 유저라고 하더군요. 그런 자를 상대하기 어려웠을 것인데, 피해가 크진 않았습니까?”
번은 진저리를 치듯 말했다.
“말도 마십시오. 그자의 기세가 어찌나 흉악하던지. 어쩔 수 없이 처리했습니다. 사로잡기엔 불가능할 것 같더군요.”
번의 능청스러운 연기에 집정관은 넘어가는 듯 했다.
하지만,
“프로가 백작은 왜 즉결처형 하셨습니까? 그 자는 생포할 수 있었을 텐데요? 정황상 도주 우려도 없어 보였고요.”
집정관은 궁금했다. 프로가 백작과 프로이드란 사내가 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마약을 손에 넣어 다루고 있었는지 말이다.
“쯧.”
번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암습을 시도하더군요. 저도 그리될지 몰랐습니다.”
“아..”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경우가 있다. 특히 사람과 사람이 아웅다웅할 땐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가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재수가 없어도 그리 없는지.. 원..”
능청스럽게 말하지만, 번의 처지에선 그들을 모두 죽여야만 했다. 행여나 살아 집정관에게 이것저것 떠벌리면 좋을 것이 하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하나 상단의 마차에서 그냥 마약도 아니고, 세이프 레인보우가 나왔다는 것이고, 그걸 꼬투리 잡아 역추적하다 보면 아주 골치가 아파질 것이 분명했으니, 초기에 싹을 잘라버리는 게 좋았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그보다 폐하의 전언은 확인하셨지요?”
다행히 집정관은 넘어가려는 모양이었다. 자연스레 화제는 돌아갔다.
“예, 오후쯤 콩가 왕국으로 가볼 생각입니다. 폐하도 뵐 겸 해서.”
“그것도 좋겠습니다.”
드래곤이 있으니 참으로 편리하다. 그 먼 나라를 오가는 길을 이리도 가볍게 말할 수 있다니.
“그럼, 떠나기 전까지 푹 쉬시지요. 제가 눈치 없이 너무 오래 붙잡아두고 있었나 봅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귀한 차도 얻어 마시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번이 웃으며 일어섰다.
가볍게 악수를 한 뒤 밖으로 나가자, 홀로 남은 집정관이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
그러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낸다.
“흐음.”
캡슐.
프로가 백작이 들고 있던 바로 그 세이프 레인보우가 집정관의 손에 들려 있었다.
“흐으음..”
마약을 만지작거리던 그.
다시 그걸 주머니에 갈무리하더니, 번이 나간 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도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태자님.”
서늘한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
.
-너 또한 어둠에 기대고 있으니, 내 어둠을 나눠 가지면 꺼져가는 생명력을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과연 그거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렇게 해서 네가 원하는 게 뭐지?
-너와 나는 서로 도울 수 있겠지. 각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테니까.
-주인이 되겠다는 거냐?
-아니, 친구라고 해두지.
-친구라..
불시착不時着이라는 말은 이럴 때 두고 쓰는 말일 것이다.
“젠장..”
숲은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으스러졌다. 30미터짜리 동체가 하늘에서 그대로 떨어져 처박혔으니, 이런 참사가 터질 수 밖에.
끄르르르..
자빠진 드래곤이 몸을 떨어대며 중심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오른쪽 날개가 뜻대로 되지 않는지 뒤뚱거리다, 다시 자빠졌다. 사실 관절염 어쩌고 둘러댔지만, 이건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마비가 오는 거다.
「미안하군..」
드래곤은 머리를 부르르 털며 말했다.
하마터면 깔려 죽을 뻔했던 번은 화를 낼 정신도 없었다. 게다가 저런 모습을 보며 무슨 탓을 하겠나.
“움직일 수 있겠냐?”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채근하게 된다. 일어나라고, 아직 멀었다고!
드래곤이 말이 없자, 번이 손을 내밀었다.
“기다려봐.”
우우우우웅.
그의 손바닥에 검은 빛무리가 응어리진다. 중단전에서 뽑아낸 어둠의 정수를 드래곤에게 넘기려는 거다.
「소용.. 없다.」
드래곤은 몇 번 더 뒤뚱거리더니, 질펀하게 몸을 눕혔다. 그러곤 동그랗게 몸을 말고는 눈을 감는다.
「쉬어야..겠어.」
'제기랄.'
머리를 흔드는 번. 미간을 잔뜩 구기며 시선을 돌렸다.
여긴 어딜까? 보이는 것이라곤 언제나처럼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과..
“······?”
저 멀리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하얀 기체.
“그나마 다행인가?”
처음엔 구름이라 생각했다. 산봉우리에 두른 안개인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민가가 있는 모양. 번은 뒤를 돌아 드래곤에게 다가가 녀석의 코 주변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한숨 푹 자라고. 친구. 금방 돌아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