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14화 (114/177)

# 내가 왜? #

-저놈 상당히 센 놈이다!

악마가 외쳤지만, 번은 피식 웃었다.

‘알아.’

놈이 페트릭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강자라는 건, 그저 보기만 해도 느껴진다. 하지만 반가움이 더 컸다. 수레를 타고 벨버른과 에비뉴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아주 지긋지긋했으니까.

스윽. 일어나 목을 좌우로 꺾는 번.

우두둑, 우두둑 소리가 섬뜩하게 퍼졌다.

“이거..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가 걸려든 모양인데?”

프로이드도 직감했다.

기존보다 강한 호위. 낯선 사내의 분위기. 모든 것이 함정이라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남의 물건을 노렸을 땐, 자기 머리 위 물건도 노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쯤은 예상했어야지.”

번의 말에 프로이드가 쓰게 웃었다.

“과연 그럴까?”

프르르륵.

그의 손에 든 연검이 떨었다.

일이 뜻대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다 죽이고, 물건을 가져가면, 그 뿐.

“낄낄낄. 젖비린내 풀풀 풍기는 놈이 간뎅이가 부었구나. 설마 이년들 믿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저놈 하난가? 어디 더 숨어있는 놈들이 있는 건가?”

“아닌 것 같은데?”

“허허.. 애송이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는구나.”

부하들도 한마디씩 보탰다.

그럴만도 한게 프로이드의 눈엔, 번이 아직 스물도 안 된 핏덩이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저 나이 때는 수만 단위로 얽혀 서로 죽고 죽이는 전장에 살지 않았는가. 부하들 대부분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하지만 조롱에도 불구하고, 번의 표정엔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수레 위에 서서 주변 여자들을 스윽 둘러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발키리.”

그가 불렀다.

“부대- 대기-!”

다루가 흡사 군인처럼 두 발을 착 모아 외치자, 눈빛이 달라진 여자들이 집중했다. 이 모습에 놀란 것은 프로이드와 부하들이다. 이게 뭔 해괴한..?

“무장을 허가한다.”

번의 명령이 떨어졌다.

“부대-! 준비preparation!”

“충!”

“충!”

발키리 내에서도 정예 중에 최정예 열을 선발했다. 그녀들은 페트릭에게 따로 기술을 전수받았으며, 번은 그녀들에게 드래곤의 둥지에서 고르고 고른 무기武器를 선물했다.

척, 척척.

어떤 이는 검을, 어떤 이는 채찍을, 어떤 이는 망토를 두르기도 했고, 수레에 넣어둔 흉갑을 입는 이도 있었다.

“살행殺行을 허가한다.”

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들의 안색이 변했다. 이제까진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감정 없는 인형 같다. 선두에서 다루가 기합처럼 외친다.

“제압하라!”

“충-!”

“충-!”

요세인에선 그녀들의 존재 자체가 비밀이었다. 발키리 부대와는 별개로 활동하게 될 것이며, 그 어떤 명령체계도 무시하고, 오직 번의 명령만 따라야 했다.

까드득.

그녀들의 혀 안쪽, 은밀한 공간에 있던 캡슐이 터졌다. 세이프 레인보우다. 거기에 더해,

「공유한 대상에게 투지를 분배합니다.」

「공유한 대상에게 활력을 분배합니다.」

융의 주술로 어둠을 감염시킨 번의 능력이 고루 퍼져나갔다.

“어어엇?”

“이, 이년들이?”

부하들을 향해 달려드는 발키리!

강력한 무구로 무장한 정예 발키리는 강하다. 그녀들이 두른 파츠 하나하나가 수천, 수만 골드를 호가할 수도 있는 명품 아닌가? 쉽게 말하자면 템빨이라는 건데, 세이프 레인보우의 힘까지 더해지니 실력차는 단숨에 좁혀진다.

“물러서! 너희의 상대가 아니다!”

프로이드는 그녀들의 격변을 알아보고 외쳤지만, 그의 상대는 따로 있었다.

“어이! 급은 맞춰야지?”

번이 수레에서 뛰어내리며 씨익 웃었다. 도약 한번에 둘의 거리가 바짝 좁혀졌다. 번의 몸에 은은하게 번지는 호신기를 감지한 프로이드가 멈췄다.

“네가 주제가 될 거라 여기느냐?”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차는 프로이드.

그의 눈에 비친 번은 이제 막 입문한 견습 오러 오너 정도였다. 저 때가 가장 위험하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겠지만, 그때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을 모르니까. 프로이드의 눈엔 오히려 주변의 발키리라는 여자들이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건 두고 보면 알 거고.”

번은 비릿하게 미소 지으며 주변을 스윽 훑었다.

“크, 크윽. 대장..”

“끄르르륵!”

“커억, 이럴 수는.. 없..”

프로이드의 부하들이 순식간에 제거되기 시작했다. 발키리들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고, 인정사정없이 급소나 약점을 공격했다. 심지어 자기 상대가 사라지면 동료를 돕기 위해 주저 없이 가세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판세는 분명해졌다.

“우리도 슬슬 시작해야지?”

퍼억!

가볍게 땅을 박차고 앞으로 뛰어드는 번. 그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근력이 최대치를 유지합니다.」

「마나가 육체를 보호합니다.」

「근육이 밸런스를 맞춥니다.」

지난 15년간 축적한 모든 것들이 이 순간 활화산처럼 터지고 있었다. 맛없어도 씹고, 더러워도 삼키며 일 푼이라도 힘을 얻고자 했던 인고의 세월. 하지만 번이 얻은 것은 그런 능력뿐만이 아니었다.

경험. 무수한 실전實戰에서 얻은 판단력과 자신감이 있었다.

“흥!”

프로이드는 팔을 내지르며 번의 경로를 막았다. 이 연검은 320년 전 멸망한 어느 왕가의 보물이었다. 거기에 오러까지 입혔으니, 자르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 두껍고 무거운 일반 검보다 얇고, 가늘었으며 가볍다. 미꾸라지처럼 낭창거리는 검날을 당연히 회피할 것으로 생각한 그가 다른 공격을 위해 한발 옆으로 디디는데,

“……?”

베테랑이라 생각했던 그조차 예상할 수 없는 움직임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

쑤우우욱-!

번의 몸이 가래떡처럼 길쭉하게 늘어난 거다. 허공에서 흔들리며 변화무쌍한 궤적을 그리는 것이 연검의 장점인데, 그조차 무력하게 번의 몸은 연체동물처럼 흐물거렸다.

“뭐..”

이런?

마치 연검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는 것 같지 않은가?

프로이드는 급히 손목을 돌려, 검의 손잡이로 앞을 내리찍었다. 시커먼 머리통이 그의 가슴을 향해 대포알처럼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위도 쪼갤 자신이 있는 공격이다. 한데..

콰앙-!

진짜 바위를 후려친 것 같은 반탄력이 그의 손목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왔다.

「머리가 최고조로 단단해졌습니다.」

번의 몸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리 없는 그였기에 황당하기만 하다.

“미친..”

그래도 담긴 힘이 무시할 수 없는 거력이라 번의 머리가 아래로 꺾였다. 하지만 쿠웅! 발로 땅을 디디며 코뿔소처럼 다시 이마를 치켜드는 번. 검도 아니고, 창도 아닌 그저 몸뚱이로 이런 무식한 공격을 하는 인간은 처음 경험한 프로이드는 급급히 뒷걸음질 쳐 곧 닥쳐올 충격을 줄이려 했다.

어금니를 단단히 문다. 그러면서 놈의 등을 잘려버릴 생각으로 팔을 들었다.

하지만,

“……!”

여기까지였다.

수십 년, 싸움판을 떠돌며 온갖 임무를 수행했던 그가 단 한 순간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당한 것은.

아그작-!

그는 가슴뼈가 통째로 으스러지는 것을 느끼며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그러면서 본다. 번의 엉덩이에 꼬리처럼 달려 살랑거리고 있는 어떤 것을.

‘꼬리..?’

마나로 보호한 가슴이 무력하게 부서진 것도, 놈의 몸이 뱀처럼 늘어난 것도, 이 고통도, 울컥 차오르는 핏물의 비릿함도 모두 기막힌 꿈같았다. 그러니 헛것이 보이나 보다.

그러나 그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머리로 그의 가슴을 들이받은 번은 프로이드의 몸이 붕 뜨자, 틈을 놓치지 않고 팔꿈치를 내지른다. 강철보다 단단한 그의 뼈가 프로이드의 복부를 연달아 강타하고, 북 두드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람의 인체구조로는 불가능한 각도로 움직이는 몸을 위해 꼬리가 중심을 잡았고,

기이이이이잉.

번은 지금 이 순간 사물을 아주 느릿하게 보고 있었다. 뇌를 가득 채운 약 기운은 퐁퐁! 그에게 다채로운 색감의 시야를 선물했고, 프로이드의 솜털 하나의 움직임까지 분석하며 연산과 분석을 마친다.

퍼퍼퍼퍼퍽-!

가공할만한 연타!

“꺼어어억..”

인생은 타이밍이라 했던가?

싸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강한 놈도 심장에 칼이 박히면 죽는 거고, 드래곤도 목이 잘린 상태로 살 수 없다. 요지는 칼을 박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순간.

번은 대상의 작은 틈을 순식간에 파고드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고, 인간은 상식이란 틀에 갇혀 살기에 허점을 파고들기가 번에겐 더욱 쉬웠다.

후욱-!

번의 무릎이 프로이드의 낭심을 차올렸다.

쩌저저적.

생식기도 모자라, 골반까지 금이 간다.

사슴의 목줄을 한번 문 사자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번 역시 일격필살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결과는 충분히 낼 수 있는 능력과 투지가 있었다.

“끄으윽.”

본래라면 둘의 싸움은 오랜 시간 팽팽하게 흘렀을 것이다. 프로이드는 강자였고, 노련했으니까. 그런데도 이런 상황까지 몰린 것은 번이기 때문이리라.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변칙적인 공격과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 시킨 공격 루트. 거기에 더해 내 뼈를 주고, 상대의 목숨을 취한다는 과격한 몸짓은 오래전부터 인간에게 내려온 싸움 방식이 아니었다.

동물의 싸움.

그랬다. 번은 자신만의 전투법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거다.

“…….”

심지어 무슨 짓을 해도 소문낼 사람이 없지 않은가? 어차피 다 죽을 터인데. 전쟁터에서 힘을 감추며 싸웠던 답답함이 모두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축 늘어진 프로이드의 몸이 번에게 기대왔다. 숨은 쉬지만, 정신은 우주 저 멀리 날아가 버렸는지 오징어처럼 흐물거린다.

쓰러지는 그의 멱살을 잡고 선 번.

가장 늦게 시작했지만, 주변 전투가 끝나기도 전에 마무리해버린 그의 모습에 프로이드의 부하들은 의지를 상실했다. 대장이 저리도 쉽게 당하다니.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때마침 다루가 번에게 다가왔다.

“진眞 발키리. 임무 완수했습니다!”

“수고했다. 주변 정리해.”

“네!”

번이 시선을 돌려, 프로이드를 보았다.

씨익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차갑다.

“자, 이제 들어볼까? 누가 네놈을 보냈는지.”

.

.

.

야심한 밤.

“스으읍..”

사내가 숨을 들이마신다.

“파하..”

그리고 다시 내쉴 때 온몸이 부들거렸다.

“스으읍.”

또 다시 있는 힘껏 들이마시니, 온 세상 맑은 공기가 폐에 가득 들이차는 걸 생생하게 느끼며 행복감을 맛본다.

“파아아..”

내쉴 땐 또 다른 기대로 육체는 한껏 긴장하며 쾌락을 선물했다.

“과연.. 대단한 물건이로다.”

사내는 약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최고조에 이르렀고, 몸은 세포단위까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흐윽, 백작님 저도 좀..”

“저 부터요! 백작님! 흐윽..!”

그는 벌거벗은 상태였는데, 그의 몸에 거머리처럼 나체의 여인 둘이 달라붙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런 여인들을 보며 비웃는 것 같던 그가 말했다.

“이것을 원하느냐?”

“네!”

“하악! 하악! 어서요!”

그의 손에 작은 캡슐이 들렸다.

그녀들은 조금 전 이 안에 든 내용물을 아주 조금씩 맛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걸 잊지 못해 이 안달인 거다.

중독.

치명적이고 거부할 수 없으며,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함을 맛볼 수 있게 해주는 천상의 약이다.

“그래, 그래, 크크크! 나눠줄 테니 최선을 다해 봉사해라.”

“하악, 하악!”

“어서요! 백작님!”

매음굴에서 데려온 그녀들과 오늘 밤 활활 불태울 생각에 그의 얼굴은 벌써부터 뜨거웠다.

‘이것만 있으면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는 것도 허언이 아니다.’

직접 써보니 알겠다.

인간이라면 이 약을 거부할 수 없다. 심지어 이건 한때 나돌던 그 저급한 마약도 아니었다.

“어허! 주인님이라 불러야지!”

“네! 주인님!”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주인님!”

세이프 레인보우가 확실하다!

이리도 황홀한데, 약 기운이 물러가도 아무런 데미지가 없으니, 이보다 완벽한 것이 또 있을까?

“입을 크게 벌리거라.”

붕어들처럼 입을 쩍 벌리며 고개를 한껏 치켜드는 두 여자를 보며 그는 아주 즐거운 듯 껄껄 웃었다.

그런데 이때.

후우우우웅-!

강풍이 불어닥쳤고, 창문이 벌컥! 열렸다.

커튼이 미친년 머리처럼 나부끼고, 주변이 아까보다 더 어두워진 착각이 들었다.

“……?”

그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창밖을 멍하니 보았다.

그러다가 흠칫, 물러섰다.

“저, 저거..”

“왜요?”

“어서 약을 주세요!”

그녀들은 이 와중에도 한결같다.

“비켜-!”

그는 그녀들을 홱! 뿌리치더니, 황급히 문 쪽으로 달려갔다. 알아챈 거다. 정원에 내려선 거대한 그림자가 뭔지를 말이다.

그가 막 문 손잡이를 잡으려 할 때,

끼이이이이익.

절로 열리는 문.

“히이이이익..!”

그는 급히 멈춰 서려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흡사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 그런 그의 귀에 문을 열고 들어온 불청객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이거, 이거, 빼도 박도 못하겠는데? 프로가 백작. 감히 대 에비뉴의 지고하신 폐하께서 심신을 어지르는 마약 복용을 엄하게 벌한다 명하셨는데 겁도 없이..”

말의 내용은 엄중한데, 표정은 실실 웃고 있는 남자.

“태, 태자께서 어인 일로..”

번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