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싫은데? #
“허어.. 이거 언제왔어?”
어이없다는 듯 묻는 번에게 미루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며칠 전에요..”
편지와 함께, 이미 에비뉴에서 날아온 소문은 요세인 곳곳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콩가 공주라고?”
서신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는 번.
짧은 인사말조차 없는 딱딱한 문장엔, 분명 써 있었다.
「..하여 너도 나이가 찼으니, 콩가 왕국과의 동맹을 견고히 하고자..」
왕국 이름이 그래서일까? 번의 머릿속엔 자연스럽게 고릴라 같은 여자 하나가 떠올랐다.
“왜 직접 하지 않으시고···?”
외형이야 어찌 됐든 중요한 게 아니니, 첫 번째로 떠오르는 의문이 바로 이것이었다. 아버지는 이제까지 점령국의 모든 여인을 자신이 취했었다. 고작 15살밖에 안 된 공주도 잡아와 황비로 앉힌 사람 아니던가?
“여러.. 이유가 있으시겠죠.”
미루가 조곤조곤하게 설명했다.
“다른 황자분들은 대부분 혼처가 정해졌는데, 태자께선 아직도 홀몸이시니 챙겨 준 것일 수도 있고요. 어쩌면 콩가 왕국에서 그리 원했을지도 몰라요.”
자세한 사정은 더 들어와야 알겠지만, 이 상황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맹국과 핏줄로 묶이는 것은 다반사였으니까.
“흐음..”
하지만 이 남자가 그런 쪽으론 별생각이 없다는 게 난관이었다. 언젠가 필요하면 하겠지만, 이렇게 타의에 의해 등 떠밀려 가정을 이루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에겐 자유연애라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흐으음..”
-뭘 그렇게 고민해? 주면 넙죽 받지.
악마의 말도 맞다. 이웃 나라 공주라는데, 마다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하지만 번은 뭔가의 찝찝함이 물씬 든다. 게다가 번이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왔나? 이번 생만 아니라, 그전에도 아니 그, 그전에도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늘 혼자 투쟁해왔지 않은가?
치열하게 싸우며 앞으로 나가기도 바쁜 이 와중에 가족이 생기면 소위 말해 발목이 잡힐 것이다. 몇 개의 삶에서도 짝을 이루고 자식도 얻어봤지만, 그건 동물이었으니 자연의 섭리에 맞게 살았을 뿐. 인간은 다르지 않나?
부인이 생기면 맞춰줘야 하고, 아이가 생기면 여간 신경이 갈 것이 분명했다. 지금 자신만 해도 무슨 일을 하려 할 때, 어머니와 동생 걱정에 멈칫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았나 말이다.
‘내가 그리 무책임한 성격은 또 아니라서 말이지.’
-허! 그런 말을 네 주둥이로 하면 부끄럽지도 않냐?
‘내가 뭘?’
-무책임하지 않은 놈이 아버지 여자를 들고 튀어?
움찔!
악마의 말에 번은 괜히 주변 눈치를 보다가 입맛을 다셨다.
“이 건은 내가 폐하와 직접 해결하지.”
“콩가 왕국으로 가시려고요?”
드래곤을 타면 먼 여행길은 아닐 거다. 물론, 그 녀석이 비행을 할 수 있는 상태여야겠지만.
“다른 건?”
번이 끄덕이며 묻는다.
미루가 눈짓하자, 리켄스가 그녀를 대신했다.
“최근 두 달 사이 우리 물건이 강탈당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번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강탈? 누가? 왜?”
“누가 왜 그랬는지 알았다면 이리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겠지요.”
그도 그렇다. 2만4천 발키리가 아니라도 솔개부대가 있고, 번 친위대가 있는데 무슨 소린가?
“얼마나 당했는데?”
“총 4회입니다.”
“뭐?”
“광석을 나르는 수레 몇 개는 그렇다 쳐도 다른 것이 골치 아프게 됐습니다.”
하나 상단을 번영회가 인수해 운영해온 것도 어언 6개월. 사실 그 속을 들여보면, 하나 상단은 주인조차 바뀌지 않은 상태로 본래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 뿐이었지만, 겉으로 보면 위상이 많이 올라갔다.
일단, 국책사업을 도맡아 하고 있었고, 500인의 솔개부대가 호위를 맡으니 감히 하나 상단을 노리는 간 큰 도적 따위는 없다고 봐야 옳았다.
그런데 털린 거다.
“설마..”
“예, 최근 수레 광석 사이에 숨겨둔 레인보우를 빼앗겼습니다. 소량이긴 해도 그 값이 만만치 않고, 우리가 그걸 취급하고 있다는 걸 집정관이 알면..”
에비뉴는 지금 본격적으로 마약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황제의 밀명을 받아 집정관은 아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레인보우 립 농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공하여 완성된 마약을 쌓아두고 있었는데, 때가 되면 그것을 일종의 전략무기로 이용할 셈이었다.
당연히 이런 계획엔 독점이라는 단서가 붙는데, 누군가 따로 마약을 유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집정관이 가만 놔둘 리 없지 않은가?
“짐작 가는 곳도 없고?”
“아주 신출귀몰한 자들입니다. 심지어 고수高手가 있는지 현장엔 호위가 제대로 대항한 흔적도 없었습니다. 목격자도 없고요..”
“다 죽였다고?”
“예..”
도둑놈들은 아주 철두철미했다. 호위뿐 아니라, 마부나 짐꾼조차 살려두지 않았다. 마약은 그렇다쳐도 광물같이 무거운 짐을 강탈해 운반하려면 꽤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을 텐데도 놈들은 단 하나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중급 땅의 정령사를 대동해 대지에 깃든 옛일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놈들이 수를 써둔 것 같습니다. 마법처리를 했다고 하더군요.”
땅의 기록조차 지워버리는 놈들이라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굴러먹다 도적으로 전향한 용병 따위는 저런 고위 마법사나 정령사를 부리지 못하니까.
“일단 마약 운반은 전부 멈추도록 해.”
“예, 그렇지않아도 조치했습니다.”
“잘했어.”
감히 태자의 물건을 건드리다니.
‘황비 중 하나인가?’
잡초는 뽑아도 같은 자리에 계속 나기 마련이다. 아직 어머니께서 정식 데뷔를 하지 않아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으니, 또 어떤 황비가 흑심을 품고 수작을 부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그저 심증 아닌가? 경우의 수는 많았다.
20명이 넘어가는 황비, 그 자식들, 그와 관련된 외척까지 다 생각하면 번의 적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인가?
일단, 확인해 봐야겠지?
“리켄스.”
“네!”
“수레를 준비해.”
.
.
.
에비뉴.
대륙 중앙 강국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 염두에 둘 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변방의 약소국들이 치고,받고 하다 합쳐지고 쪼개지는 일이야 다반사였으니, 최근 에비뉴가 몸집을 불리고 있다고 해도 그러다 말겠지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었다.
하지만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갈수록 에비뉴는 무섭게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대륙 중앙에 오래전부터 한자리 차지하고 있던 제국에까지 덤비고 있지 않나? 그렇게 어느샌가 귀추가 주목되는 하나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대륙엔 많은 나라가 있었다.
그 만큼 많은 사람이 있었으며, 알려지지 않은 강자들 또한 많았는데, 프로이드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
그는 13년 전까진 주로 용병으로 떠돌다, 이젠 몸값을 높여 의뢰가 들어오면 받아 처리하는 일종의 청부업을 하고 있었다. 경험도 많고, 신중한 성격에 머리도 잘 돌아가 맡은 일에 실패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 꽤 이름난 자였다.
“목표가 접근한다.”
50대 초반의 그는 걷기 시작할 때부터 길바닥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마 신성제국 출신이라 빈곤층 복지가 잘 되어있어 굶어 죽진 않았지만, 설움까지 채울 순 없었고, 남들은 돈 독이 머리끝까지 올랐네, 돈 귀신이네! 손가락질해도, 의리가 밥 먹여 주나? 라며 무조건 내 손에 쥔 현금이 최고다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이번 의뢰도 무작정 받았다.
에비뉴도 아닌 벨버른이라는 촌구석까지 와서 일하고 있었지만, 약속된 보수가 꽤 짭짤했고, 일도 어렵지 않았으니 말이다.
“옵니다.”
납작 엎드린 부하가 말하자, 프로이드는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쉿.”
20명의 부하는 오래전부터 합을 맞춰온 이들답게 프로이드의 눈빛만 봐도 척척 알아들었다.
‘멍청한 것들.’
“쯧..”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달그락, 달그락.
저 멀리에서 이쪽으로 말이 끄는 수레 행렬이 다가오고 있었다. 벨버른에서 에비뉴로 가려면 이 산맥은 반드시 거쳐야 했고, 특히 이 지역은 경사가 완만해 수레가 다니기 적격이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변함이 없군.’
지금까지 7번의 습격을 했다.
한 10번쯤 하면 끝이 보일 것 같은데, 6개월로 잡았던 일정이 이 상태면 이달 안에 끝날 것 같지 않은가?
‘단순한 건지, 아둔한 건지.’
역시 변두리 촌놈들이라 그런가? 언제나 호위의 숫자도 10명 아래였고, 무장 상태도 경계할 수준이 아니었다. 고작 저 정도로 돈이나 다름없는 광물을 운반한다는 것 자체가 제국 쪽만 가도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덮칠까요?”
수레가 바짝 다가오자, 부하가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끄덕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나?
부하가 저쪽으로 손짓하자, 숨어있던 사내들이 석궁을 들고 벌떡벌떡 일어나 수레를 향해 발사하기 시작했다.
-스, 습격이다!
-아아악!
-엎드려!
1차 공격으로 지근 거리에서 석궁을 쏜다. 그러면 말은 발이 묶이고, 호위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슉슉슉슉슉!
“쳐라-!”
프로이드의 부하들이 무기를 꺼내 들고 전방위에서 달려들었다. 이미 수레의 호위들은 대항할 엄두도 못 냈는지 땅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그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으어어어어억?
가장 앞서 수레에 접근하던 부하 하나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훅! 고꾸라진 것이다.
“······!”
그의 눈에 느낌표에 이어 물음표가 떠오를 때, 보았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호위 하나가 벌떡 일어나 짧은 검을 꺼내 드는 것을.
‘여자..?’
품이 큰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호리호리한 몸매에 젖가슴이 도드라진 것이 보였다.
“차아-!”
거기에 들려오는 음성까지.
“허엇?”
부하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넙죽 엎드렸던 것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맞서 싸우기 시작하니, 순간적으로 난전이 벌어졌는데, 이 호위들 수준이 심상치 않았다. 각종 전투에서 잔뼈가 굵은 부하들이다. 지난 7차례의 습격에서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것이 그 증거! 그런데..
“허어..”
어떤 명령을 내릴 새도 없이 훅훅-! 쓰러지기 시작하는 부하들. 고작 몇 합 만에 실력이 갈린 거다.
“물러서라-!”
그는 사자처럼 쩌렁쩌렁하게 외치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쿠웅! 바닥에 큰 돌이 떨어진 것 같이 육중한 소리가 그의 발끝에서 터졌고, 순식간에 화악! 거리를 좁혀 단도를 들고 있는 여자를 향해 쏘아졌다.
“흐읍..!”
여자는 급히 손목을 들어 방어했다.
그녀의 팔뚝엔 방패로 쓸 수 있는 갑鉀이 둘러 있었는데, 프로이드는 비웃으며 검을 내리 베었다.
깡!
그녀의 팔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급히 떨어졌다.
“어엇?”
하지만 놀란 것은 프로이드였다.
오러가 실린 검이다. 그런데도 잘리지 않았다?
“어림없다!”
여자는 공중에서 앞구르기를 하는 것처럼 빙글 몸을 돌려 발꿈치로 프로이드의 정수리를 노린다. 참으로 가벼운 몸놀림이며 빠른 상황판단이다.
“어린 년이 제법이구나!”
숨결이 닿을 거리가 되니, 이제 많은 정보가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왔다. 여자는 날씬했고, 어렸으며 예뻤다.
후우웅!
그는 날아오는 발을 향해 주먹을 휘갈겼다. 단순한 것 같아도 이 주먹 역시 마나의 힘이 한껏 내포되었다.
퍼억-!
“꺄악!”
통상적으로 다리의 힘은 주먹의 3배 강하다지만, 지금은 그런 물리법칙 따윈 간단히 씹어 먹힌다. 마나를 다루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가랑잎처럼 저쪽으로 날아가 수레에 등을 처박는 여자.
“고년들..”
프로이드는 빠르게 주변을 파악했다.
부하들을 상대하는 호위가 다 여자라는 것도 이상했지만, 성별을 떠나 꽤 수준급의 실력을 지녔다는 것도 수상했다. 벌써 부하 셋이 죽지 않았나? 더는 희생이 없어야 했다. 그들의 목숨도 다 돈이었으니까.
“내가 상대하마! 물러서라!”
그의 말에 부하들이 급급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여성 호위들은 무리하지 않았다.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수레에 모여든다.
“계집들이라니. 오늘 손맛 한번 제대로 보겠구나.”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그가 훌훌 웃으며 허리에서 뭔가를 잡아 뽑았다. 낭창거리는 연검이다. 그가 가장 애용하는 병기이자, 오늘의 그를 있게 해준 보물寶物이었다.
“흐흐흐, 대장. 아까우니 좀 남겨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저 계집들을 그냥 죽이기엔 먼저 간 형제들에게 미안하지 않습니까?”
“그냥 죽여선 안 됩니다!”
부하들이 한마디씩 하자, 프로이드의 눈에도 음심淫心이 깃들었다.
“어디 소속인진 몰라도 계집들이 일을 도모하다니 참으로 웃기는군.”
프로이드가 서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계집치곤 제법이다만, 그에겐 위협으로 다가올 수준은 아니었던 거다.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 끌끌..”
여자들의 얼굴과 몸을 감상하듯 훑어보며 혀로 입술을 핥는 프로이드. 한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그의 발길이 우뚝 멈췄다.
“고맙긴.”
가죽으로 덮여있던 수레 위. 언제부터지? 한 남자가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다.
“내가 고맙지.”
번은 이가 드러날 정도로 활짝 웃으며 프로이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