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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112화 (112/177)

# 전광석화 2 #

“거의.. 된 건가?”

손에 든 광석을 들고, 잠깐 고민하던 번. 냉큼 입속으로 던져넣는다.

까드드드득!

그의 이는 이제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 쇠도 아그작, 아그작 씹어먹을 수 있도록 단련되었고, 이런 과정에서도 전혀 이가 상하지 않았다.

「더는 철鐵 성분을 흡수할 수 없습니다.」

“그렇군.”

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일어섰다.

-욕심도 많다. 이제 네 뼈를 검으로 끊어낼 수 있는 인간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고.

악마의 말에 번은 쓰게 웃었다.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

번은 이곳에 온 이후, 본격적으로 광산에서 나온 광물을 흡수해 왔다. 그것들은 혈액으로, 뼈로, 골수로, 근육으로 파고 들었고, 영화 울버린에서처럼 마음만 먹으면 쑤캉! 주먹에 쇠붙이가 튀어나올 정돈 아니라 해도 웬만한 충격엔 견딜 수 있는 튼튼함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건 일반적인 물리법칙 안에서나 보호받는 거였고, 오러가 개입하면 또 다른 문제가 되니까.

“아직 멀었어.”

번은 어두운 동굴을 거슬러 나갔다.

중간 중간에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매케한 냄새가 사방에 자욱하다. 이건 흑연 특유의 냄새였다.

이곳은 처음 개발한 광산이기도 하며, 이제는 파낼 것 하나없이 바닥나 버려진 광산을 번이 개인 창고로 쓰고 있는 곳이었다.

“아..”

밖으로 나가려던 번이 발길을 돌렸다.

“잊을 뻔했군.”

입맛을 다시며 다시 안쪽을 향하는 번. 약 20여 분쯤 들어가자,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르르르릉. 그르릉.

동물의 숨결이다. 하지만 고양이나 개 정도의 몸집을 지닌 생물의 그것이 아니라, 그 콧바람이 온몸에 느껴질 정도의 거구. 드래곤이었다.

15살이 된 번은 좀 더 성장했다. 키도 크고, 근육도 훨씬 큼지막하게 자리 잡았으며 얼굴에서 앳된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자랐다고 해도, 드래곤 앞에선 모닥불 앞 반딧불이나 다름없으리라. 하지만,

“이봐.”

그는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드래곤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다가왔는데도 드래곤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시간 됐다고. 일어나.”

크르르릉. 크르르릉.

귀찮다는 듯 몸까지 뒤척이며 머리를 날개 안쪽으로 더욱 깊이 박는 녀석.

“······..”

사실 드래곤은 번이 나눠주는 어둠의 기운을 흡수하면서도 많이 힘겨워하고 있었다.

-늬들이 노력하는 건 알겠는데, 신이 정한 섭리를 어길 수 없는 거야. 이놈은 이미 수명을 다했다고.

딱하다는 듯 이야기하는 악마다.

그래. 악마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번이 아무리 노력해도 드래곤의 거대한 육체가 붕괴하는 걸 막을 순 없었으니 말이다. 눈이 절로 감기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그런 순간이 오면,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안식安息. 영면永眠뿐이지 않은가.

“쓰읍..”

입맛을 다시며 걸음을 옮기는 번. 드래곤의 뒤로 돌아간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들이 번을 반겼다. 드래곤의 둥지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보물이 아무렇게나 구석에 쌓여 있는 것이었다.

한때, 누군가의 손에서 명검이었을 쇠붙이는 손잡이만 갈아주면 다시 보검으로 불리리라. 세월이 흘러 빛바랬지만 아직도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는 방패는, 명품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다는 듯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게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가 골동품이자, 보물이었다.

전에 이것들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는데, 적어도 10만 골드 이상은 되지 않을까? 추정했었다. 하지만 급히 떨이 칠 이유가 없었으니, 천천히 제값을 받고 소분할 것이다. 세상 모든 것들은 주인이 있다지 않나?

보물 더미를 찬찬히 보던 번이 허리를 굽혀 뭔가를 집어 들었다.

-그건 왜?

녹색 칼집에 들어있는 30cm 정도의 칼이었다.

“몰라도 돼.”

번은 칼집의 끈을 허리에 두르고, 드래곤을 본다. 깨울까? 고민하다 머리를 흔들었다.

언젠가부터 점차 이렇게 늘어져 자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드래곤. 그간 정도 들었고, 여러 방면에 써먹기도 좋았는데, 이리 처져 있는 꼴이 안쓰러웠다.

“쓰으읍..”

결국, 번은 그곳을 나왔다. 그러면서 묻는다.

“정말 아무런 방법이 없냐?”

-그런 게 있었다면 세상 모든 드래곤이 아직까지 살아있겠지. 이런 생각을 너만 했겠냐?

“그런가..”

녀석을 만나 교섭을 시도했을 때, 덥석 계약하던 그 날이 떠오른다. 사실 녀석은 이미 삶의 미련을 그때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잠깐의 유희를 더 즐기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단순한 변덕이었을 수도 있다.

“음..”

번이 지상으로 완전히 올라왔다.

“태자님.”

광산 앞을 지키고 있는 솔개부대원이 머리를 숙였다.

사실 드래곤이 있는 저길 누가 들어가겠느냐마는 그래도 혹시나 해서 보초를 두었다. 요즘 녀석 상태를 보면 집 지키는 개만도 못하니까.

“요세인에 다녀올 것이다. 좀 걸릴 거야.”

“넵!”

“특별한 일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번이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말에 올랐다.

“다녀오십시오!”

“이랴!”

요세인 서북쪽 9시간 거리.

깊은 산 속이라 인적도 없고, 당연히 가로등이나 도로도 닦여있지 않았지만, 말은 신들린 듯 질주했다.

두두두두두두!

주변 경관이 휙휙! 정신없이 지나는 와중에도 번의 머릿속은 고요하고 차분하다. 계속해서 생각에 잠겨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가 탄 말이 두어 번의 휴식을 끝으로 요세인에 닿았을 때,

“역시 안 되겠어.”

번은 결심한 듯 말했다.

-뭐가?

“이대론 못 보내.”

-헛수고라니까 그러네.

번이 드래곤에게 과한 애착을 느끼거나 반려동물에게 가지는 사랑 따위를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열이 받는다. 저 위에서 낄낄거리고 있는 어떤 놈들에게 보란 듯이 주먹 감자를 먹여주고 싶다.

차갑게 빛나는 번의 눈에 성벽이 보이고,

“태자님 드십니다!”

요세인 성벽 위 병사들이 번의 말을 발견하고 우렁차게 외쳤다.

“충-!”

“충-!”

“근무 중 이상 무!”

요세인.

불과 얼마 전까진 거지소굴이나 다름없던 도시.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그 누구도 그 시절을 믿지 못하리라.

“잡아라! 와아아아!”

까르르르! 아이들의 웃음소리만 들어도 그 마을의 상태를 알 수 있다 했다. 절로 웃음 짓게 하는 해맑은 녀석들은 그저 보고 있어도 즐겁다.

“아앗! 태자님이셔!”

“오오오! 태자님!”

아이들은 번에게 두려움이 없었다.

번은 이 애들에게 영웅이며 롤모델이었고, 아버지였다. 말에서 내려 아이들의 머리를 손으로 헝클어주는 번의 입가에도 조금 전과는 달리 흐믓한 미소가 걸렸다.

거리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우선 상점이 늘었다. 돈이 돌기 시작하니, 시장이 형성되고, 이웃 도시에서 행상들도 꾸준히 다녀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올해는 최근 50년 이내에 이런 풍년이 있었나 싶을 정도가 되었으니, 벨버른 전역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악착같이 버티고 버텼더니, 드디어 신이 선물을 준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덕분인가? 어쨌든, 분명한 것은 기아와 가난에 시달리던 이 도시가 한고비 넘겼다는 것이었다.

“태자님.”

“태자님..”

아이들이야 개념이 없지만, 어른들은 번을 보면 한결같이 몸을 숙여 낮췄다. 존경과 흠모, 고마움 가득 깃든 눈으로 번의 발치만 쫓는다.

모두가 아는 거다.

요세인이 이렇게 변한 것이 누구 덕분인지를.

“······.”

끄덕이며 영주성을 향해 걸어가는 번.

합-!

합합-!

차아!

멀리까지 기합성이 들려왔다.

보통이라면 사내의 걸걸한 음성이 마땅했겠지만, 여기 요세인에선 이런 뾰족하고 가는 목소리가 익숙하다.

“아앗-!”

저 멀리 서 있던 여인이 번을 발견하고, 후다닥 달려왔다.

“태자님!”

이제 2만4천으로 늘어난 발키리를 이끄는 1사단장 다루였다. 번은 가볍게 웃으며 허리의 칼집을 끌러 그녀에게 던졌다.

“에에?”

이게 뭐예요? 라는 표정에 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진급 선물.”

“헙..”

눈만 깜빡이던 그녀.

“저 진급해요?”

황당한듯 묻는다.

당연하지 않나? 그녀는 부대 내에서 2인자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녀의 위론 총사령관 페트릭 뿐. 언니가 있긴 해도 그녀는 포지션이 다르니..

대답 없이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걷는 번. 훈련하던 발키리들이 보내오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뒤로하고 성안으로 들어서자, 소식을 들었는지 요직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미루.”

실무의 총 책임자라 할 수 있는 그녀가 번의 보폭을 맞췄고,

“리켄스.”

외부에 나가 있던 리켄스도 급히 들어왔다.

대청.

의자에 앉는 번.

그가 자리하자, 모두의 입이 근질거리는 것이 보였다.

수련을 빌미로 근 2개월 만에 영주성에 방문한 태자였다. 보고 해야 할 일도 산더미였고, 궁금한 것도 많았다.

“표정들을 보아하니, 잘 굴러가고 있군?”

그걸 말이라고! 울컥한 리켄스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미루가 빨랐다.

“집정관께서 몇 번이나 사람을 보냈어요.”

“왜?”

미루는 잠깐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꾸욱 다물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아 뭐부터 해야 할지 몰랐던 거다.

“우선..”

그녀의 머릿속에서 정리가 끝나고, 말을 잇기 시작한다.

“사업을 시작한 지도 반년이 지났으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싶어하시는 것 같아요.”

그건 당연한 거다.

“폐하께도 보고가 올라가겠지?”

“그렇겠죠?”

“으음..”

집정관이 선별해준 지식인.

그들은 대부분이 마탑 출신이었는데, 그들을 이용해 종이 기술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왔다. 처음 2달은 거의 그것만 매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랄까? 종이는 어떤 나무를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그 성질과 특성이 갈렸는데, 닥나무, 대나무 같은 것들이 설명우가 살던 그 세계와 완벽하게 일치할 순 없었으니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했다. 그리고 이제 그 노력이 결실을 보아 첫 출하를 앞두고 있었고.

하지만, 여기서 문제.

위로 보고하는 범위를 어디까지 해야 할까? 하는 것이었다. 너무 많으면 과한 관심을 받게 될 것이고, 그렇다고 너무 적으면 자칫 실패로 비칠 수도 있었다.

“한.. 손익분기점 정도만 간신히 넘길 것 같다고 할까?”

아직 종이나 연필을 팔지도 않았는데, 투자금 5만 골드를 채웠다고 보고한단다. 사실 이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건데, 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지금 이곳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었다.

“실사를 보내면 바로 탄로 날지도 몰라요.”

“우기면 어떻게 안 될까?”

“태자님..”

미루가 어이없다는 듯 번을 부르자, 다루가 킥킥 웃었다.

이 어처구니 없는 대흑자 사건은 어찌보면 간단했다. 흑연이 매장된 위치를 탐색하고자 수도에서 보낸 상급 정령사가 도착했는데, 번이 그를 드래곤에 태우더니 벨버른 전역을 뒤지기 시작한 거다. 게다가 흑연만이 아니었다. 금, 은, 철, 다이아몬드, 구리, 소금까지. 그래, 여기까진 충분히 예상범주에 있었다. 번이라는 사내는 워낙 어디로 튈지 몰랐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무도 번이 드래곤을 이용해 산을 허물고, 땅을 파낼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중장비가 없는 세상.

인간에게나 땅속에 묻혀 있는 광맥에 닿기 어려운 거지, 30m짜리 생물에겐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은 늙고 기력 떨어진 드래곤이었지만 그의 도움만으로도 광산개발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고, 일차적으로 드래곤이 뒤집어놓으면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가 수습하는 정도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무작정 파헤치고 다닌 광산이 4개월 동안 41곳. 거의 3일에 한 번꼴로 새로운 광산을 개발했던 것이었다. 항간에는 한동안 보이지 않는 드래곤을 두고, 이런 무리한 노동 때문에 드래곤이 자취를 감춘 게 아니냐는 소문도 나돌았지만, 어쨌든 그 결과는 누구도 상상치 못한 것들이었다.

이제까지 나온 광물의 가치만 5만 골드는 이미 넘어서고 있다. 신나게 돈 번다는 것이 딱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 아니겠는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오늘 먹고 죽을 음식이 없어 동생들과 쫄쫄 굶던 미루가 이젠 수만 골드를 언급하고 있었으니, 그녀 자신도 가끔 믿기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건 실사 나오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고. 다른 건?”

대충 넘어가려는 속셈이 빤히 보였지만, 워낙 밀린 게 많았으니 일단 넘겨야 했다.

“후우..”

미루가 한숨을 쉬었다.

번의 태도 때문이 아니라, 이 보고 때문이다.

“이건..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거에요.”

사각형의 편지.

고급스러운 붉은 색 촛농 인장이 찍혀 있었고, 두툼했으며 큼직하다.

“누가 보낸 거야?”

“폐하께서요.”

“아..”

번은 두 손으로 공손하게 편지를 받아들고, 겉장을 땠다. 그러고 보니 폐하의 친서를 받는 것은 처음 아닌가?

“······?”

편지를 보진 않았지만, 미루는 이미 소문을 들어 내용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고.

“에..?”

눈으로 빠르게 편지를 읽어 내려간 번이 황당하다는 듯 소리를 냈다.

“결혼하라고?”

번을 가슴에 품은 여인들.

그녀들 모두에게 재앙 같은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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