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11화 (111/177)

# 전광석화 1 #

세상에 가장 센 깡패 같은 놈이 있다고 치자. 그런 놈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천 년이나 활보하며 재산을 모았다면, 그게 얼마나 많이 모였을까? 물론, 드래곤과 인간의 물질적 가치가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할 순 없겠지만, 반짝이고 예쁘며, 귀한 것은 누구에게나 값진 법이다.

번은 블랙 드래곤의 둥지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보물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떠올렸다. 이거 남들이 알면 큰일 나겠다고. 태자란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다. 즉 공공의 이익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직업을 가졌다는 건데, 이런 상황에 개인재산이 무지막지하게 불려 있다는 걸 알려서 좋을 게 없었다.

-그런데 그 은행이란 거 말이야. 그게 제대로 굴러갈까? 본래 인간이란 족속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법이라고! 돈 빌려주고, 못 받으면 그 손해를 어떻게 감당할래?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번에 벨버른에서 곡식을 빌려주고, 증서를 받아보며 알게 됐다. 여기 사람들은 생각보다 의리가 있다는 걸 말이다. 당장 돈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때우려 노력한다. 누군가에게 빚지고 태연할 만큼 뻔뻔함도 없었고, 기본적으로 소속 영지에 묶여 살아가는 이들이 태반이라 일가친척 다 모인 마을을 쉽게 떠나지도 못했다.

'그리고 만약을 위해 추심팀도 따로 만들꺼고.'

-뭐, 사정은 알겠다만, 왜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만드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건 네가 몰라서 그래.’

21세기 대한민국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은행이란 집단이 얼마나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거기에 더해 금리라는 것까지 적용하게 되면, 이제 번영회의 돈을 끌어 쓴 사람은 번의 말이라면 절대 무시할 수 없어질 것이다.

“크크크..”

「나는 늙고 병들었으니, 네가 오늘부터 에비뉴를 이끌 거라.」

언젠가 황제가 이런 말을 하기 전에 번은 스스로 자리를 잡으려는 거였다. 강력한 기반을 다지고, 지지세력을 모은 뒤, 누가 생각해도 번이 아니면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 여길만큼 말이다!

“곧 알게 될 거야. 그리 오래 안 걸려.”

연미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번이 성큼성큼 자리를 빠져나갔다.

황제가 돌아오기 전에 모든 일을 마쳐야 했다. 누군가 이 시스템의 강력함을 눈치채게 된다면, 반드시 숟가락을 얹으려 할 것이고, 다른 놈들은 몰라도 황제와 그의 측근이 나선다면 아직 번이 대항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번은 열심히 뛰어다녔다.

처음 한 달은 사람들에게 주식회사 개념을 이해시키며 여러 차례에 걸쳐 사업 설명회를 했고, 지방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도시를 옮겨 다니며 계속해서 전파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드래곤을 타고 다니는 태자. 그것도 모자라 외진 곳까지 찾아와 나라를 위한 사업을 몸소 실천하겠다 하시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던가? 물론, 프로가 백작처럼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번은 그런 자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까지 아양을 떨어가며 돈을 모아야 할 정돈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한 달, 또 한 달이 지나갔다.

이윽고, 번이 포부를 밝힌 지 3개월이 지났을 때, 멀리서 소식이 들려왔다.

“역시 폐하께선 실패를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은 수도의 권력자들과 오찬이 있는 날이었다. 당연히 번도 이 자리에 참석했는데, 급보가 날아들었고, 황제가 이웃 국가와 아주 좋은 조건으로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이었다.

‘협박이었겠지.’

번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왕국이 미쳤다고 우리와 동맹을 맺으려 했을까? 그게 성사되었다는 것은 속된 말로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럼 폐하께선 돌아오신답니까?”

대신이 급히 묻자, 서찰을 든 집정관은 머리를 흔들었다.

“내친김에 콩가 왕국까지 가신다 하십니다.”

이번에 동맹을 맺은 오하마르드 왕국은 제국의 서쪽에 있는 나라였다. 후단을 중심으로 지리적 위치를 잡자면 오하마르드는 후단의 북쪽에 있었고, 황제가 향했다는 콩가는 더 북쪽에 있었다.

‘위로 쭉 거슬러 올라가겠다는 거군.’

참으로 단순 과격한 황제가 아닐 수 없다.

“으음.. 자칫 마찰이 생길 수도 있겠습니다. 그들이 대비를 할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콩가 왕국은 대대로 제국의 속국이나 다름없이 공물을 바쳐왔는데..”

“이거 걱정입니다.”

“다시 전쟁이라도 벌어지는 게 아닐지..”

대신들이 걱정하자, 집정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다 생각이 있으셨겠지요.”

집정관은 언제나 이랬다. 밖에 나간 황제를 염려하거나 안절부절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믿고 기다리며 제 할 일만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응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일이 잘 풀린다고 해도 폐하를 뵈려면 최소 4개월은 걸리겠습니다.”

“그렇겠지요.”

“그리 걱정되시면 폐하가 계신 곳으로 잠시 다녀오시면 되지 않겠소?”

“허허..! 제가 요즘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1시간도 못 걸어 다닙니다.”

“끌끌, 말과 마차를 이용하면 되지 않겠소?”

“아, 어려서부터 마차만 타면 토악질을 해대는 체질이라.”

“말은요?”

“제가 짝궁둥이라서..!”

“허허허! 참으로 오묘한 신체를 타고나셨소이다!”

농을 주고받으며 낄낄대는 대신들을 보며 집정관이 가볍게 끄덕였다. 황제에 대한 건은 여기까지. 이제 오늘 해야 할 일을 처리해야 한다.

“태자께서 요청하신.”

집정관의 목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자, 대신들이 입을 다물었다.

“오만 골드는 오늘 지급할 예정입니다. 이에 반대 의견이 있거나 궁금한 점이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워낙 큰 규모의 나랏돈이 투입되는 일이다 보니, 이렇게 여러 사람의 공증을 받아야 했다. 그래야 훗날 잘못되었을 때 책임도 나누고, 윗사람의 분노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없습니다.”

“저도 없습니다.”

이미 이곳의 대신들은 번영회 사업에 한발 걸치기로 마음먹은 이들이었다. 지난 3개월간 번이 수도 이곳저곳과 람보르를 드나들며 죄다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집정관이 끄덕였다.

“태자께서 3만 골드에 대한 재화를 곡물로 받길 원하셨는데, 이에도 모두 동의하십니까?”

황궁에선 이전 해에 걷힌 곡식을 따로 저장하여 태풍이나 가뭄 같은 것에 대비했는데, 이건 설명우가 살던 대한민국에서도 정부미란 이름으로 사용된 것과 같은 시스템이었다. 번은 그걸 요청한 것이었고.

“벌써부터 올해, 풍년이 될 조짐이 보인다 하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도 넉넉히 오고 있고, 농부들의 얼굴도 밝더이다.”

벨버른은 지금 먹지도 못하는 금덩이보단 한 줌의 밀이 더 귀했다. 노동력이 널렸다지만, 먹지도 못하면서 무슨 힘을 쓰겠나? 하지만 다행히 곡식이 잘 여물고 있었으니, 모두가 너그러워진다.

“태자께서 요청하신 대로, 하나 상단을 이용해 벨버른 5개 도시에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머지 2만 골드는 내일까지 거처로 보내지요.”

“감사합니다.”

번은 꾸벅 머리를 숙였다.

5만 골드.

이 정도면 21세기 대한민국 기준으로 4~500억은 될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환율, 물가, 사회 시스템 같은 것을 세세히 따지면 그 가치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겠지만, 어쨌든 고작 신용 하나만으로, 아무 담보 없이 이만한 사업자금을 빌렸다는 것 자체가 이 세계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로 호위는 필요 없으신가요?”

목돈이 움직인다. 당연히 소문이 돌기 마련이고, 파리가 들끓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번에겐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

번은 대답 대신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집정관은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하긴..”

드래곤이 있는데, 감히 누가 흑심을 품겠나.

“그럼, 후에 뵙겠습니다.”

활짝 웃은 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정이 났으니, 이제 재빨리 움직일 때다.

“당분간 뵙기 어렵겠습니다.”

집정관도 따라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시간 나시면 언제 한번 들러 주십시오.”

번이 웃으며 손을 잡았지만, 집정관은 쓰게 마주 웃는다. 황제와 태자가 밖으로 나도니, 나랏일 대부분은 집정관의 몫, 그 무게가 가볍진 않다.

“또 뵙겠습니다. 건강하셔야 합니다.”

고관 대작들에게 모두 인사를 건넨 번. 회의장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대현자와 우리아가 배웅을 위해 서 있었다. 우리아는 수도에 남아 번을 돕기로 했다.

크르르르르..

공터에 웅크리고 있던 드래곤이 머리를 들며 번을 반겼다.

“······.”

드래곤을 한번 보고 얼굴을 돌린 대현자가 번에게 말했다.

“태자님께서 앞으로 또 어떤 일을 하실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그는 대현자란 이름답게 지난 3개월간 번이 추진하는 사업의 무궁무진할 가능성을 보았다. 이는 단 한 번도 시도된 적 없었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사업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또한 이게 자리만 잡는다면, 세상은 분명 발칵 뒤집힐 것이란 생각이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이제껏 없던 거인이 출현할 것이었으니 말이다.

“아직 멀었습니다.”

번은 웃으며 대현자와 손을 잡았다.

“바쁘실 테니, 더 붙잡지 않겠습니다.”

대현자는 번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우리아.”

“태자님.”

우리아와도 눈을 맞추었다.

잘 부탁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 따윈 하지 않는다. 알아서 잘할 것을 아니까.

“······.”

성큼, 드래곤을 향해 뛰어오르는 번.

그러자,

펄럭!

드래곤이 활개 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 위세에 풍압이 주변에 몰아치고, 팔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감았던 대현자.

화르르륵!

그가 눈을 떴을 땐, 이미 드래곤의 모습은 저 먼 하늘로 떠나가는 중이었다.

“허허허..”

왠지 허무한 듯, 허탈한 듯 너털웃음에 우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왜요?”

“아니다. 아니야.”

“기분이 좋지 않으신 것 같아요.”

“그럴 리가 있니. 단지..”

태자께서 하루가 다르게 장성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다. 한데, 왜 이리도 불안한 것일까? 폐하께선 주변국과 동맹을 끌어내시고 계셨고, 태자께선 민생을 돌보시느라 저리 열심이신데 말이다.

모든 일이 술술 풀려가는 이때.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불안감이 꼬리를 탁탁 쳤다.

어떤 예감이리라...

하지만,

“아니다. 가자꾸나.”

대현자는 웃으며 우리아의 등에 팔을 둘렀다.

.

.

.

7개월이 흘렀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지나 봄이 성큼 다가왔다.

요사이 있었던 일이라면 북쪽으로 가신 황제께서 또 한 번의 동맹을 이끌어내셨다는 소식과 벨버른 전역에서 아주 활발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는 것이었다.

돈이 움직이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크고 작은 일들이 생겨난다. 대규모 벌목과 그것을 옮기는 작업 또한 그러했으니, 나무를 이용해 종이의 원료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압축하거나 말려 종이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뿐인가? 동시에 광산 작업까지 동시에 이뤄졌고, 상급 정령사를 초빙해 흑연이 묻힌 곳을 탐지하고, 그것을 파내 연필심을 만들어야 했으니 수많은 사람들이 뭉친 것이다.

또한 종이를 위해 벌목을 하는 과정과 공통된 접점이 있었으니,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고, 땅을 파다 보니 다른 광물도 쏟아져 더욱 많은 일들이 펼쳐졌다.

까득.

아직 정제되지 않아 거친 느낌 물씬 풍기는 광석 더미 위에 앉아 있는 한 남자. 감자만한 돌을 하나 손에 들더니, 거침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까드득.

누가 보면 미쳤다고 손가락질하겠지만, 그는 당연한 듯 돌을 씹어 삼킨다.

「철鐵 성분을 흡수합니다.」

「흡수한 철의 성분이 한계치에 이릅니다.」

「육체의 모든 뼈에 철 성분이 가미됩니다.」

그랬다.

이제 15살이 된 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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