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10화 (110/177)

# 번창 3 #

동인도회사 East India Company, 東印度會社.

17세기 초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이 자국에서 동양에 대한 무역권을 부여받아 동인도에 설립한 무역회사의 통칭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누구나 세계사 시간에 배우는 지식이었지만, 여기는 이러한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쉽고, 간결하게 이해시켜야 했다.

“제게 투자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 모두는 부자가 되실 겁니다.”

응? 뭘 믿고 투자하라는 거지? 사람들의 눈빛은 순간, 회의적으로 변했다. 뭐, 이건 당연한 거다. 번은 이제 고작 열네 살. 아무리 태자란 지위가 있다지만, 그래서 더 위험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망했을 때 멱살 잡고 따질 수 있는 분이 아니지 않은가?

“이해를 돕고자, 표를 준비했습니다.”

번이 손짓하자, 옆에 드레스 곱게 차려입은 미녀가 커다란 종이가 붙은 판을 들고 자리했다. 대현자의 딸로 유명한 우리아.

“우선, 번영회는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목돈을 만든 뒤, 그것으로 각종 사업에 투자를 하거나 소액을 개인에게 빌려주는 형식의 ‘금융업’을 주로 하게 될 것입니다. 이윤이 많이 발생할수록 투자금의 가치는 올라갈 것이며 번영회가 커질수록 여러분이 투자하시고 받으신 증서의 값도 오를 것입니다.”

우리아가 든 판엔 이러한 시스템이 알기 쉽도록 일목요연하게 그려 있었는데, 결국 번이 하려는 것은 은행의 초기 모델을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태자님,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콧수염 멋지게 기른 필로스 후작이 손을 들며 물었다.

“얼마든지요.”

필로스 후작은 에비뉴 주변 목초지에 8개의 대규모 농장을 가진 거부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소유로 소, 돼지, 양, 말이 다 합치면 1천 마리가 넘었고, 양털, 우유 같은 2차 사업도 활발하게 하고 있었으니, 대부호라 불릴만한 이였다.

“그 증서의 매매도 개인 간에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매주 정해진 시간에 번영회에서 증서의 가치를 매겨 발표할 것이며, 그것은 기준이 될 것입니다.”

설명우가 살던 세계에선 매시, 매분, 매초 단위로 주가가 오르기도 내리기도 했지만, 여기선 그게 불가능하니, 이렇게 시작한다.

“흐음.. 돈을 모아 큰 사업에 투자한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허나, 어디에 투자할 것인지가 핵심인 것 같은데, 그건 누가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까?”

확실히 후작은 돈 좀 굴려본 사람이라 그런지 맥을 잘 짚었다.

번은 미소 지으며 친절하게 대답한다.

“가장 많은 금액의 투자자 10인을 선정하여 주주총회를 열 것입니다. 회의에서 다각적인 분석과 선별을 통해 모두의 의견이 모이면, 안전하게 투자처를 고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 그것 참, 합리적인 방법이군요.”

“과연, 그렇게 하면 실패를 줄일 수 있겠습니다.”

“허면, 투자 규모는 어느 정도가 적당하겠습니까?”

순식간에 사방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사람들의 관심도가 높아졌다는 증거다. 번은 가볍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답해드릴 터이니, 우선은 제 이야기에 집중해주시길 바랍니다.”

번은 웃음기를 지우고, 눈에 힘을 주었다. 활활 타오르는 그 시선에서 사람들은 투지와 열정을 느낀다.

“이제껏 없던,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규모의 사업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는 혁신의 시작이며,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본 태자는 전적으로 모든 책임을 질 것을 약속드리며 훗날 내 신분이 어떻게 되든 번영회를 끝까지 지킬 것을 약속합니다.”

증서는 ‘주’로 명명하며, 시작가 1골드로 한다. 돈만 있으면 그 누구라도 살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신분이나 소속에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녀도, 노예도, 소작농도, 장사치도 돈만 있으면 주주가 될 수 있다는 뜻이었고, 언제든 원하면 번영회에 시가의 80% 값으로 팔 수도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화폐의 기준이 되던 골드, 실버와는 전혀 다른 개념의 신종 ‘돈’이었고, 어느 세상이나 돈이 흐르는 중심에 선 자는 막강한 파워를 가질 것이다.

“저는 여기까지. 자세한 이야기는..”

번이 옆을 보자, 우리아가 생긋 웃으면서 끄덕였다.

“우리아, 부탁하지.”

“네, 태자님.”

태자라는 사회적 지위와 신용, 확신과 믿음을 주었으니, 이제 번이 할 일은 없었다. 이제부턴 우리아가 꼼꼼하게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하며 설득할 것이다.

“허허허.. 참으로 기발하신 생각입니다. 어찌 이런 참신한 것을 떠올리셨는지요.”

번이 아래로 내려가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대현자가 가장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 번이 무슨일을 벌이는 걸까 궁금해 찾아온 길이었다.

“과찬이십니다. 그저 모두가 힘을 합쳐 사회와 국가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하여 떠올린 것뿐입니다.”

“태자님 애국심은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흡족하게 웃는 대현자의 말에 근처의 사람들도 끄덕였다. 어릴 적부터 번의 영민함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진즉 알았으나, 새로운 시도에 매번 감탄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주가총액은 어느 정도 예상하십니까?”

그새 번이 하려는 것을 알아듣곤, 묻는 그. 하지만 번은 쓰게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지요. 투자자가 얼마나 모일지 두고 봐야 하니까요.”

“목표로 하신 금액은 있으실 것 아니겠습니까? 투자처 역시 생각해 두셨을 테고요.”

대현자도 이제 어느 정도 번을 겪어보았기에 안다. 무턱대고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조만간 열릴 사업설명회에서 발표할 예정입니다. 궁금하시더라도 부디 그날까지 참아주셨으면 합니다.”

“허허! 귀띔이라도 안 해주시렵니까? 이 늙은이가 조바심에 잠을 설치는 것을 보시려고요?”

“하하하!”

대현자의 농에 번이 유쾌하게 웃었다. 근처의 사람들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때.

“결국, 일이 잘못 되었을 때, 투자금을 보상받을 수 있는 수단은 어디에도 없단 말이군요?”

싸늘한 목소리가 번의 귀에 파고들었다.

‘프로가 백작인가?’

번은 기억을 뒤져, 사내의 이름을 꺼냈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속으론 잔뜩 경계한다. 프로가 백작에게서 적대감이 물씬 느껴졌기 때문이다.

“모험에는 언제나 리스크가 따르기 마련이지요. 안전하게 자산을 불리고자 한다면 다른 수단도 많습니다.”

어차피 번은 한 두 사람에게 목돈을 끌어오려는 것이 아니었다. 수천, 수만의 사람이 쌈짓돈을 꺼내면 그것이 모여 수만, 수십만 골드가 된다. 게다가 사람이란 것이 자신이 조금이라도 다리를 걸친 곳에 관심을 두게 되고, 내 일처럼 생각하지 않는가? 모두가 응원하고 도와주는 그런 회사를 만들 생각이었던 거다.

“모험이라.. 결국, 태자께선 이 사업을 그리 위험하게 여기고 계신다는 말씀이시군요.”

프로가 백작의 싸늘한 말에 번의 이마가 구겨졌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하자, 옆에서 대현자가 무마하려 노력한다.

“허허.. 백작께선 너무 날카로우신듯합니다. 후에 따로 설명회를 여신다 하니, 그때 평가해도 될 것이지 않겠습니까?”

괜히 남의 잔칫상에 와서 재 뿌리지 말란 거다. 그러나, 프로가 백작은 작정하고 온 사람이었다. 그걸 대현자는 모르고 있었고.

“그럴듯한 말은 누가 못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돈을 끌어모아 뭘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일언반구도 없이 태자님 명성만 믿고 투자하기엔 지나친 자신감으로 보이는데요? 세상이 얼마나 혹독하고 무서운지 아직 경험해보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장사란 게 그리 쉬운 게 아닙니다.”

프로가 백작은 대놓고, 번을 애송이 취급하며 깎아내리고 있었다.

“······.”

“······.”

심상찮은 말이 오가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무거운 정적과 함께 우리아의 목소리도 이미 멈췄다.

‘이놈 봐라?’

번 역시 깨달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프로가 백작이 깽판치려고 마음을 먹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보통은 이런 자리에서 서로 얼굴 붉히려 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심지어 상대는 태자 아닌가? 훗날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사람 앞에서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만약, 번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 시점에서 분노하여 따귀라도 올려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남자는 뱃속에 수십 마리의 구렁이를 품고 아홉이 넘는 꼬리를 가진 여우. 백작은 번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순순히 인정하는 번. 그의 모습에 프로가 백작의 안색이 가볍게 굳었다.

“하긴, 저 같아도 선뜻 투자하기 어렵겠습니다. 태자 놈이 돈을 끌어모아 튈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허어.. 설마 그렇겠습니까?”

대현자가 혀를 찼지만, 번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본래 설명회 때 하려 했으나, 귀빈 여러분께 최소한의 믿음을 드리는 것도 제 역할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흐음.. 그럼, 가볍게 하나 말씀드리자면.”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뱀처럼 차갑게 프로가 백작을 똑바로 노려보며 번은 말을 이었다.

“번영회의 첫 번째 사업은, 하나 상단을 인수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어엇?

-하나 상단?

-그 벨버른의 상단 말입니까?

하나 상단은 꽤 유명했다.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 벨버른도 모자라, 에비뉴와 인접국까지 세를 넓혀 왕성하게 활동했던 상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파산선언을 해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냈었다.

“싼값에 하나 상단을 인수하여 유통을 책임질 것이며, 몇 가지 추진되고 있는 국책 사업의 유통을 하나 상단이 맡을 것입니다.”

종이와 흑연 말이다. 어차피 이 세계는 공정한 입찰제나 정찰제 따위가 없으니, 모든 것이 권력자 마음이다. 당연히 사업의 총수권을 쥔 번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업을 연계할 수 있다.

“1차 5만 골드 규모의 사업이 예정되어 있으며, 수년 내에 그 몇 배에 해당하는 사업장이 늘어날 것입니다. 아직 투자금의 규모를 알 수 없어, 이 자리에서 구체적인 액수를 단언하긴 힘들지만,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다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모른다. 나무를 공수해 공장에서 종이를 뽑아내고, 그것을 유통하며 훗날 도소매상까지 늘린다면 이 모든 과정을 한 업체가 담당할 경우 얼마의 수익을 낼 수 있는지를 말이다. 게다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국책 사업은 계속해서 여러 방면으로 늘어날 것입니다. 이는 에비뉴가 부국으로 가기 위한 첫 단추이자, 미래를 위한 일보一步입니다.”

당장은 안전한 종이와 연필로 시작하지만, 곧 무수한 사업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할 것이다.

계열사.

이 세계엔 전무후무한 공룡기업이 번의 머릿속엔 이미 그려진 후다.

“여러분은 지금 전설의 한 지점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프로가 백작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도무지 번의 말에 끼어들 타이밍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충분히 고민하십시오. 몇 번이고 생각하십시오.”

번은 그들을 독촉하지 않는다.

“신중하고 신중하게 검토하신 뒤, 그럼에도 본 태자와 뜻을 함께하고 싶으시다면 그때 참여하셔도 좋습니다.”

번은 더 짙게 웃으며 프로가 백작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의 손이 올라가자, 움찔! 프로가 백작이 자기도 모르게 상체를 뒤로 물렸다. 피식 웃으며 프로가 백작의 어깨를 가볍게 손으로 털어주는 번.

그러며 말했다.

“단, 기회는 언제나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번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이제 여기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오오오! 태자께서 저리 확신하시니, 함께 하는 것도 좋겠소이다.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오. 하나 상단이라 하지 않소? 내가 전에 그들과 잠시 거래해봐서 아는데, 아주 전도유망한 곳이었소. 분명 파산도 뭔가 계획적인 것 같더이다!

-국책사업에 참여한다니, 최소한 본전은 하지 않겠소?

프로가 백작 덕분에 사람들의 관심도는 더욱 높아졌다.

이게 아닌데,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프로가 백작은 분노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지만, 이미 배는 떠난 것 같다.

파티장을 벗어나던 번에게 악마가 묻는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 너 돈 많잖아? 그냥 혼자 하지 왜 귀찮게 사람들을 끌어들여?

드래곤의 둥지에 있는 금은보화를 처분하면 번영회 따위를 조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니지. 그러면 의심을 피할 수 없잖아.’

-음?

‘내가 갑자기 그런 큰돈이 생기면, 누가 봐도 이상하지.’

-그럼, 그렇지..

악마가 그제야 이해한 것 같다.

“크크크..”

태자라는 공인의 신분. 이게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늘 사람들의 관심이 머문다는 뜻이니까. 드래곤 보물을 혼자 꿀꺽하려면 그럴듯한 자금출처가 되어줄 곳이 필요하지 않겠나?

‘이런 걸 전문용어로 돈세탁이라는 거다.’

그랬다. 번은 거기까지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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