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창 2 #
만약, 남들은 모르는데 나만 알고 있는 지식이 있다면 어떨까?
그것을 잘만 이용한다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고, 명예나 명성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일을 추진하려고 하면, 여기서 가장 현실적인 부분이 걸리게 된다.
“대체 뭘 하시려는 겁니까?”
사람들이 믿질 않는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 컴퓨터를 만든다며 투자를 유치하려고 하면, 그게 과연 되겠나? 미쳤다며 양반들에게 문전박대나 당할 거다.
“저는..”
휴지를 만들면, 아마 귀족들에게 불티나게 팔릴 거다. 종이로 공책이나 책을 만들어 보급하면, 세계적으로 엄청난 혁신을 일으키게 될 수도 있다. 우선, 교육 체계부터 바뀌게 될 것이니까.
어떤 일을 할 때, 시간을 단축할 수 있으면 그건 혁명이자, 사회발전으로 귀결된다. 지금처럼 잉크를 사용해 글자를 쓰다가 연필을 쓰게 되면 국가규모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단축될까? 모든 것이 그런 편리함 때문에 시작되는 거다.
마차를 타다 부족함을 느껴 자동차를 만들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비행기와 우주선까지 말이다. 물론, 스마트폰이나 탱크 같은 것을 뚝딱 만들 순 없다. 하지만 그 기원이 되는 것은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지 않나? 아직은 이 가치를 알아보는 이 없겠지만, 머잖아 깨닫게 될 것이다. 어느새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렇게 모인 가치는 번에겐 돈으로 바뀌어 쌓일 것이다.
여기, 에비뉴에서부터 전설은 시작되리라.
하지만, 이걸 집정관은 모른다.
이 똑똑한 사람도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거다. 이것이 무서운 거다. 발명이란 게 그래서 어려운 것이고.
“황국을 세계 최고의 부국으로 만들려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발명가는 번 아니겠는가? 머릿속에 극도로 과학이 발전한 세계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었으니까.
“1년입니다. 딱 1년만 믿고, 투자해주십시오.”
맨땅에 헤딩하려면 긴 시간과 자금이 필요하겠지만, 번이 가세하면 어떤 것이든 단축할 수 있다.
“크흠, 꼭 5만 골드나 필요합니까?”
고작 종이를 만드는데? 집정관의 눈에 의심이 감돌자, 번은 진지한 눈으로 끄덕였다.
“생산 설비를 구축해야 하니까요.”
아직 공장이나 공산품의 양산이라는 개념이 없는 세상.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진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흐으음..”
집정관이 고민한다.
5만 골드면 비상시에 쓰려고 빼둔 곳간을 완전히 탈탈 털어야 한다. 고작 태자의 유흥거리로 날려버릴 금액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단.”
아무리 전폭적으로 도와주라는 황명을 받았지만, 이건 한 번 더 확인받아야 할 것 같다.
“폐하께 인가를 받아야 할 것 같으니, 기다려보시지요.”
“알겠습니다.”
어차피 번도 바로 집정관이 승낙할꺼라 생각하진 않았다.
대충 마무리되는 분위기가 흐르자, 집정관이 묻는다. 창밖을 보는 그가 농담처럼 던졌다.
“보물은 없던가요?”
눈치 빠른 번은 그가 말하는 게 드래곤을 두고 하는 것이란 걸 깨닫는다.
“꾸미기 좋아하는 이야기꾼들이 만들어낸 허상이지요. 그저 몸뚱이 큰 짐승일 뿐입니다.”
드래곤의 둥지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하다! 흔히 하는 말 아니던가?
“하긴.”
곰이 살던 굴에 들어가 봐야 짐승 뼈다귀나 잔뜩이다. 드래곤이라고 뭐 다를까?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번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집정관을 등졌다. 방을 나서는데, 악마가 키득거렸다.
-도둑놈.
‘내가 왜?’
-그렇게 많은 보물을 독식하고도 모른 척하기냐?
‘그건 내 거야.’
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집정관의 질문을 천연덕스럽게 넘어가긴 했지만, 그가 정곡을 찌른 것은 사실이었다.
-그 많은 돈으로 뭐하게?
비실비실 늙어 죽어가던 고룡古龍.
녀석에겐 그 나이만큼이나 많은 금은보화가 있었다. 죽을 때가 되니, 이제 그런 반짝이는 것들도 위안이 되어주지 못했고, 번은 그런 고룡에게 거의 후려친 거나 다름없는 거래로 보물을 강탈했다. 악마는 그런 번을 두고 사기꾼이라 욕하는 거였다. 하지만 번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차피 잡아먹으려던 드래곤 아니었던가? 그 보물은 전리품일 뿐이었다.
‘다 쓸 데가 있어.’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 쭉쭉 빨리는 건 순식간이다. 진정한 부자는 많은 재산을 쌓아두고, 늘 궁한 모습으로 손을 벌리고 다니는 법 아니던가? 그래도 모처럼 큰돈을 벌었으니, 효도는 해야겠지? 웃음기를 머금은 채, 번은 그렇게 람보르로 향했다.
이제 미뤄왔던 것들을 해결할 때가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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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회繁榮會.
대한민국 사람에겐 아주 익숙한 단어겠지만, 에비뉴 수도에서는 참으로 낯선 이름이었다. 하지만 초저녁부터 파티장을 찾은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모임의 주최자가 바로 에비뉴 하나뿐인 태자였기 때문이다.
“초대장을 받아 오긴 했는데, 당최.. 뭘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구먼.”
“허허..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모임이라는 건, 본래 취향, 성향, 직종, 학업, 나이까지 비슷한 카테고리 안에 있는 사람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친분을 쌓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전혀 그 의도나 목적을 종잡을 수 없었다. 수도에서 방귀 좀 뀐다는 모든 이들에게 초대장이 전달되었고, ‘7황비의 난’ 이후 열리는 가장 큰 규모의 파티였다.
벌써 1천 명이 넘었다. 참석자들은 두리번거리면서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파티에 나만 빠지면 괜히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쩝.. 사람을 이리 모아두고, 음식이 이것뿐이라니..”
모든 이들이 번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태자께서 처음 주최하시다 보니, 미흡한 점이 많은 것 같소이다. 술이나 마십시다.”
파티장은 아주 검소했다. 보통 술과 고기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한가득 쌓여 있어야 정상인데, 케이크는 커녕, 하인들도 마다할 것 같은 딱딱한 빵이나 과일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오래간만에 열린 대규모 사회지도층 파티다 보니, 발 빠른 자들은 연신 머리를 숙여 가며 인맥을 넓혀가기에 바빴다.
“백작님!”
“오! 루테인 자작. 오랜만이오. 이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소이다.”
친분을 확인하기도 하고,
“전쟁이 길어져서 그런지 말馬값이 많이 뛰었더군요.”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언제까지 갈까요?”
“그야 하늘만 알겠지요. 허나, 급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지금은 팔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역시 그렇겠지요?”
“예, 한동안 더 오를 거에요.”
정보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났다고 모두가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말주변이 없는 사람도 많았고, 딱히 친하지도 않으니 공유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이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야기의 끝은 자연스럽게 한 사람에 관해 떠들게 되었는데, 오늘의 주인공이기도 한 태자였다.
“태자께서 후계를 이으실 확률이 높겠지요?”
“전쟁터에서도 그리 활약하셨다 하니,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확실해 보이긴 합니다. 7황비께서 신전에 입적入籍 하신 뒤론, 태자님과 경쟁할 만한 재목도 없는 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거 참, 드래곤까지 부리신다죠?”
“허허, 목격한 사람이 그리 많다니 믿기진 않지만, 사실인가 봅니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의 관심사는 태자가 과연 황위를 이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고,
“태자님 배필은 누가 될까?”
“그러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으신 것 같은데. 왜 소식이 없으실까?”
혼기 찬 여인들의 관심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조혼早婚과 정략결혼이 일반화되어 있는 세계다 보니, 이 자리에 참석할 정도의 여인이라면 충분히 황실의 눈에 들 수 있는 사정권 안에 있었기에, 모두가 신데렐라를 꿈꾼다. 더군다나 태자님이 그리 훤칠하시다 소문이 자자하지 않나? 열넷 나이론 믿기지 않는 발육과 전쟁터를 누비는 남자다움, 거기에 드래곤이라는 전설까지 더해지니, 요즘 수도 여자 둘만 모이면 태자 얘기였다. 백마 탄 왕자님을 능가하는 드래곤 탄 태자님 아니던가?
하지만 역시나 모두가 번에게 호감을 가진 건 아니었으니,
“에잉.. 사람 모아놓고, 코빼기도 비추질 않으시는군.”
특히, 이 매부리코 사내. 프로가 백작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얼마 전 자살한 필립 공작의 먼 친척이었는데, 그 죽음에 어떤 음모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워낙 바쁘시니, 그런 거 아니겠소?”
“누군 안 바쁘나? 헹!”
“허어.. 말씀 가려서 하시오. 다 듣겠소이다. 그리고 취기가 제법 오르신 듯 한데, 술은 그만 드시는 것이 좋겠소.”
커험, 헛기침하며 멀어지는 남자는 험한 말을 지껄이는 프로가 백작과 괜히 함께 있다 봉변을 당하기 싫었는지 종종걸음으로 피했다.
“흥..!”
프로가 백작은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냉소했다.
이전, 그는 분명 기억한다.
핏줄로는 멀었지만, 평소 사업 파트너로 가까이 지냈던 공작이 어느 날 밤 찾아와 했던 말을.
-허허허! 우리 공작가가 이제 에비뉴! 아니, 대륙 제일의 가문으로 발돋움할 날이 머지않았다!
어째서 그러냐 물었더니, 자세히는 말할 수 없고, 훗날 저절로 알게 될 거라 했다. 그러면서 슬쩍 귀띔해준 말.
‘분명 태자가 연관되어 있을 거다.’
필립 공작가의 몰락으로 프로가는 사업기반을 모두 잃었다. 그간 살아온 인맥과 노하우로 꾸역꾸역 버티고 있긴 했지만, 과거에 비하면 벌이는 푼돈에 불과했다. 그는 주로 밀무역을 했는데, 강한 배경이 사라지니 기댈 곳이 없어진 거다.
‘모두 속고 있는 거야.’
평생 촉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다. 필립 공작가가 망한 것도, 그로 인해 자신의 사업이 기운 것도 모두 번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는 그는,
-태자님 드십니다!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파티의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오오오!”
“저리 늠름하시다니! 과연 소문이 사실이었구려!”
“어머머, 멋지시다!”
“꺄아-!”
180cm 언저리의 키와 떡 벌어진 어깨. 역삼각형의 상체와 굵은 허벅지는 여심을 뒤흔들었다. 설명우가 살던 21세기와는 미美의 기준이 다르다곤 하지만, 시대와 세대를 관통하는 절대적 아름다움은 변치 않는 법.
저벅, 저벅.
2층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번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천천히 눈을 맞추며 인자하고 대범한 모습으로 중앙으로 가 섰다.
“바쁘신 와중에도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귀빈 여러분께 존경과 감사를 전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묵직했고, 전신에선 매력이 탁탁 터졌다.
「매혹 효과가 활성화 중입니다.」
참석자 중엔 마법에 조예가 깊은 이도 있기에 융의 향수로 얻은 능력은 최소한만 발휘했다. 그러자 그것만으로도 청중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뵙고자 청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랏일은 나랏일.
종이와 연필 사업은 국가적으로 행해지는 것인만큼, 내 주머니를 채우기보다는 공익을 우선해야 한다. 그러나 번은 그것으로 만족할 남자가 아니었다.
“여러분께 아주 좋은 기회를 드리고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게 될까?
악마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무리 들어도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내가 이런데, 저 멍청한 작자들이 이해나 하겠냐?
번은 악마의 말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목소리에 더욱 힘을 준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얇은 나뭇가지 하나는 부러뜨리기 쉽지만, 그것을 겹치면 도끼로 내려쳐도 버팁니다. 이러한 것처럼,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좋은 뜻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의 눈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대체 태자는 무슨 말을 하려고 이리 뜸을 들이나?
-대체, 그 주식회사가 뭐냐고!
악마가 버럭 외쳤다.
그러나 여전히 번은 악마를 상대하지 않는다. 두 번 설명하기 싫었던 거다.
“번영회란 이름으로.”
이것이 번, 이 남자의 나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돈놀이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