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08화 (108/177)

# 번창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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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버른으로 돌아오자마자, 번은 대부분의 일을 페트릭에게 떠넘기고, 회색 숲으로 직행했다. 과거 메카였던 동굴은 이제 블랙 드래곤의 레어 겸 번 친위대의 본부로 사용된다.

“역시 당신은..”

체리티는 번을 보며 끄덕였다.

드래곤을 부리는 인간이라니,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다.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젠 확신이 든다. 이 남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어떻게든 씨를 받아야 해.’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서늘해진 번. 미간을 좁히며 말한다.

“뭘 그렇게 봐?”

“아니에요.”

인간에겐 마냥 솔직한 것도 좋지 않다는 것을 체득한 체리티는 그저 웃었다. 예쁘게 빙긋.

“..싱겁긴.”

번은 뒷짐을 지고, 메카 안으로 향했다.

발키리는 요세인에 남겨두어 페트릭에게 계속 훈련시키라 해뒀다. 부랄옥잠 가지에만 의지하면 정작 중요할 때 써먹질 못할 테니 말이다. 번에게는 쓸모없는 인력이 필요한게 아니라 어디에나 쓸 수 있고, 심지어 단기간 용병으로 팔아먹을 수도 있는 다방면으로 유능한 군대가 필요했다.

아무튼, 번은 철저하게 이중생활을 하려고 했다. 개인재산을 불려봐야 의심만 받을 터, 뒤로 꼬불쳐야 할 일은 여기 메카에서 은밀하게 진행하고, 확실히 공을 세울 수 있는 일은 요세인에 기반을 잡았다.

“나무는 잘 자라나?”

의자에 앉은 번이 체리티에게 물었다.

“그럼요. 이제 확실히 여기에 적응한 것 같아요.”

“잘됐군. 필요한 게 있으면 리켄스에게 언제든 말해. 그가 도와줄 거야.”

“지금도 충분해요.”

부랄옥잠을 키우려면 막대한 먹이가 필요한데, 그걸 리켄스가 전담하고 있었다. 전직 하나 상단 직원들을 모아 몬스터 사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일거양득의 효과를 낳았는데, 몬스터의 부산물 중에 돈 되는 건 따로 챙겨 팔았고, 독성이 강해 사람이 먹기 힘든 사체는 부랄옥잠의 식사가 되었다. 다행히 마계에서도 뭐든 다 처먹는 식성 좋은 녀석이었기에 가리는 건 없었다. 게다가 벨버른의 치안이 무너져 몬스터 개체 수가 불어나고 있던 터라 이런 움직임은 사회적 공헌도를 올려주었고, 상단의 파산으로 노는 인력을 쓰임새 있게 굴리게 했으니 최고의 효율을 내고 있는 것이었다.

“올해 안에 목표한 10만 정을 채울 수 있겠나?”

“큰 문제가 없다면 가능하리라 생각해요.”

“잘됐군.”

-그렇게 많이 만들어서 뭐에 쓰려고?

악마가 물었다.

‘팔아야지.’

-무기를 판다고?

‘그래.’

번은 군수 사업을 구상 중이었다.

-위험하지 않겠냐? 제국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어.

‘그러면 더 좋지.’

-좋다고?

그것도 강력한 핸디캡을 지닌 무기를 말이다. 무기를 사 간 저쪽에선, 절대 모를 사실. 여기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본체를 잘라버릴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쪽에서 마음껏 주무를 수 있으니까. 크크크.’

-이런 악마 같은 자식.. 잔머리 하난 기막히게 돌아가는구나!

돈 되는 건 뭐든 하려 한다.

벨버른에 남아도는 인력으로 번만의 지식을 총동원해 이 세계엔 없는 혁신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려면 기초를 잘 다져야 했다. 잠깐 삐끗한다고 와르르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시스템을 말이다.

“리켄스.”

“예, 태자님.”

옆쪽에 서 있던 리켄스가 다가왔다.

번의 시선이 떠나자, 체리티가 아쉬운 듯 입을 삐죽이며 물러난다. 그 모습을 힐끔 보며 금세 무시하는 번.

“당분간 나는 에비뉴에 있을 거다. 그 사이 사람들을 모아둬. 벨버른 전역에 퍼지도록 소문을 내서 말야. 곧 궁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국가사업이 시작될 것이다. 늦지 않게 바로 투입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거야.”

“어느 정도의 인력이면 되겠습니까?”

“일차 삼만, 이차 오만이면 우선, 급한 불을 끌 수 있겠지. 단, 그 인원 전부를 요세인에 모아선 안 돼.”

지역이 고루 발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도시 하나 성장시키려고 이 고생을 하는 게 아니니까. 지역의 특성에 맞는 아이템을 배치하여 특산품 경쟁력을 강화시켜야 했다. 그것이 곧 무기가 되고, 개성이 될 테니.

“알겠습니다.”

그리 어려운 주문은 아니었다.

“한데, 어떤 사업을 하시려는 것인지 대충 알 수 있겠습니까? 그에 맞는 인력을 선발하겠습니다.”

“그건..”

번의 말이 이어지자, 리켄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놀랍긴 하지만, 그것이 통할진 반신반의하는 표정이다.

그러나 번은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이미 알지 않는가? 설명우가 살던 시대에 충분히 상업적 가치를 인정받아 오래도록 굳건히 이어진 품목이었으니까.

‘판돈이 준비되었으니.’

어디 한번 배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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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는 사촌 형에게 어린 명우가 물었었다.

“그렇게 비싼 차가 왜 필요해요?”

오픈카에 기대, 한껏 개폼을 잡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이건 내 명함이나 마찬가지야. 여자들이 들고 다니는 명품 가방이나 액세서리 같은 거라고 보면 돼. 너도 나중에 크면 알겠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것들로 타인을 판단하거든.”

다른 한 가지는 뭐에요? 라고 물으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 좀 쩔어! 하며 나에게 주는 선물이야. 큭큭큭. 내가 더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원동력이자, 삶의 이유이기도 하지.”

그때의 명우는 무슨 소린지 이해도 못했지만, 그런 차 굴릴 돈 있으면 집부터 마련하라며 혀를 쯧쯧 차는 집안 어른들의 조언은 깔끔하게 무시하던 사촌 형의 기분을 이젠 좀 알 것 같다.

-히이이이이익!

-드래곤이다!

-으아아아악!

헬기가 착륙하라고 만들어 놓은 주차장 따윈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번은 황궁 안에서 가장 넓은 잔디밭을 골라 드래곤을 내려서게 했다.

당연히 황궁이 발칵 뒤집힐 수밖에.

-소문이 진짜였어!

-태자께서 정말 드래곤을 부리신다는 건가?

-오오오..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오싹 돋은 소름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번이 드래곤의 등에서 내려섰다.

벨버른에서 여기 에비뉴 수도까지 한방에 올 수 있는 직행 ktx가 있는데, 굳이 말을 탈 이유 따윈 없었다. 늙고 부실해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교통수단이라고 하지만, 그 정돈 감수할 장점이 충분했다.

보라, 이 시선을.

사촌 형의 오픈카와는 비교조차 거부하는 월등한 번의 전용기였다.

크르르르르..

드래곤의 목구멍에서 신음이 터지자, 사람들은 히이이익! 물러섰다. 에구머니나! 자빠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번은 진실을 안다.

“푹 쉬라고.”

저건, 힘들어서 골골거리는 소리다. 뭐, 엔진이 맛이 갔든, 어쨌든 겉모습은 훌륭하니까 1차 목적은 달성했다. 이제 모은 관심을 이용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자.

“크흠, 소식은 들었습니다.”

집정관의 집무실로 곧장 찾아온 번.

썩 달갑지 않은 그의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사업하신다고요?”

“예.”

귀족이나 왕족이 사업을 벌이는 경우가 없진 않다. 큰 목장을 소유하거나 광산 개발 같은 것에 참여하기도 했고, 유통이나 용병을 길러 사병처럼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번이 하려는 것은 기존의 통념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다.

우선, 국비가 쓰인다. 당연히 1년 예산을 빠듯하게 맞춰놓은 집정관으로서는 갑자기 돈 달라는 놈이 예뻐 보일 수 없다.

“필요 예산은요?”

“우선 5만 골드 정돈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

5만 골드.

그 돈이면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훌쩍 떠난 황제가 몇 달을 군자금으로 쓸 수 있는 큰돈이었다. 그런 천문학적인 돈을 무턱대고 달라니.

“설명이 필요한 거로 보입니다만?”

뭐, 일단 돈드는 건 아니니, 들어나 보자.

“종이를 만들 것입니다.”

번의 말에 집정관이 책상에 있던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이거요?”

“예.”

어이가 없다는 듯 번을 빤히 바라보는 집정관.

“이걸로 돈이 되겠습니까?”

“됩니다.”

확신하는 번의 표정에 집정관이 양피지를 다시 툭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팔짱을 낀다. 나를 설득해보라는 표정으로 말이다.

번은 씨익 웃으며 옛 기억을 하나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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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이게 종이에요?”

“그래. 이게 한지韓紙란다.”

할머니는 장인匠人이셨다. 대한민국 최고의 한국대 출신의 돈 잘 버는 아들이 있음에도 평생 일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어린 명우가 시골에 가면 마당 뒤편엔 언제나 산더미처럼 각종 나무가 쌓여 있었는데, 시골에선 그리 드문 광경은 아니었다. 물론, 이게 땔감이 아니라는 것이 다른 집과 다른 점이었지만.

“이걸로 스케치북이나 종합장 만드는 거에요?”

어린 명우가 아는 종이는 딱 이 정도였다. 그런 손주가 귀여운지 할머니는 배시시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양피지는 오백 년을 가고, 한지는 천 년을 간다는 말이 있단다. 지금은 종이가 아주 흔해졌지만, 할미가 어릴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지.”

종이는 아주 다양했다. 어떤 나무로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뉘었고, 나무가 아닌 동물의 털이나 가죽, 누에고치의 실로 가공할 수도 있었다.

“이젠 뒷간에서도 마음껏 휴지를 쓸 수 있지만, 할미 어릴 적엔 그런 게 없었거든.”

“에엑? 그럼 뭘로 똥 닦아요?”

“호호호! 여러 방법이 있었지.”

볏짚을 엮어 긴 줄을 만든 다음 그걸 변소에 걸어둔다거나, 외부에서 급할 땐 주로 나뭇잎을, 후에 신문이 보급되기 시작했을 땐, 그걸 구겨서 썼다.

“으윽.. 디러.”

상상도 못 하겠다는 듯 더럽다는 표정을 짓는 명우를 보며 할머니는 계속 웃었다.

“다 그렇게 살았지. 그래도 그때가 좋았단다. 이렇게 하얀 종이처럼 세상도, 사람도 깨끗했으니까.”

그땐, 할머니가 왜 그리 아련한 눈으로 말씀하셨는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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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버른에 남아도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상념에서 깨어난 번이 집정관에게 질문했다.

“여자겠죠.”

“예, 정확히 말하면 노동력입니다. 게다가 지천에 널린 것이 나무죠.”

“나무로 종이를 만드시겠단 말씀이십니까?”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느냐는 눈빛에 번은 상체를 기울여 아까 집정관이 던진 양피지를 집었다.

“다소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종이는 아주 다양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그 값이 비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번이 종이제조에 빠삭한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 시골에 가면 어깨너머로 할머니 하시는 것을 지켜보는 게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곱셈이 있고, 나눗셈이 있다는 것을 알면, 덧셈 뺄 셈은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다. 요컨대, 개념의 문제라는 거다. 이곳 사람들은 비행기나 컴퓨터를 상상도 못하겠지만, 번은 직접 보고 경험하지 않았나? 앞이 까마득히 보이지 않는 것과 목적지가 보이는 것은 대단히 큰 차이가 있고, 다소 헤맬지라도 어떤가? 도착만 하면 되는 것을.

“글쎄요···.”

차분하게 이어지는 번의 설명에도 집정관은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다.

“이것이 성공하려면 두 가지가 꼭 필요합니다. 이 또한 요청하려 했습니다.”

“그게 뭐죠?”

“머리가 비상한 인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을 이용해 개념을 현실화할 수 있을 것이다. 번이 그리는 이미지를 정확히 실물로 구현하는 것은 기술자들의 몫이 될 테니까.

“다음은요?”

번은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만 구상하지 않는다. 그것과 관련되어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것도 하는 김에 같이 하면 좋지 않은가?

“광산을 개발해야 하니, 이쪽으로 도통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광산이요? 그건 갑자기 왜요?”

금, 은, 구리, 철 같은 것을 채굴하는 것은 지금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하지만 번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것.

“흑연Graphite, 黑鉛이 필요합니다.”

바늘 가는데, 실 간다고.

종이가 가는데, 연필이 빠져서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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