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광양회韬光养晦 #
“도광양회韬光养晦라 하였습니다.”
높이 뛰기 전에 잠깐 웅크릴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미 기세는 보였으니, 충분히 얻을 건 얻었다 생각합니다. 자칫 더 도발하여 제국이 전력을 쏟아 부으면 그 역시 우리에게도 좋지 않으니, 주변국과 동맹을 더욱 견고히 하여 강병을 양성하심이 어떠실지요.”
태자까지 이리 나오니, 황제는 혼자였다. 뜻을 같이하는 이가 있어야 신이 날 터인데, 모두가 반대하니 거참, 밀어붙이기도 난감하다.
“아울러 레인보우 사업도 오래 묵히면 좋을 것이 없다 생각합니다.”
그렇다. 그게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하지 않았나?”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언제까지고 에비뉴의 전유물이 될 순 없을 것입니다. 꽃이란 게 바람에 씨앗이 날리기 마련이고, 물에 휩쓸려 멀리 퍼지기도 합니다. 제국에도 이름난 석학들과 마법사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만큼, 곧 유사품을 개발할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게 되면 황국이 가진 이점이 사라지겠지요.”
그건 그렇다. 부랄옥잠 같은 건 마계를 통해야만 얻을 수 있어 까다로울지 몰라도, 레인보우 립은 에비뉴가 아니라도 어디선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거기에서 성분을 추출해 비슷하게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다. 뭐든 시작이 힘든 거지, 이미 개념이 잡혀버리면 따르기는 쉬우니까.
‘특허를 낼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니, 분명 복제품은 곧 나올거다.’
저작권보호법이나 지적 재산권 같은 법령 자체가 없는 곳이다. 이 말은 즉 뽑아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쭉쭉 빨아야 한다는 거다.
“황국은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제국과의 전쟁이 하루 이틀로 끝나지 않을 것인 만큼 장기적으로 보셔야 하옵니다.”
여기까진 스캇이나 다른 장수들이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번의 시간은 이제부터였다. 지난 일주일간 고민했던 모든 것을 풀어놓을 때가 왔다.
“에비뉴 본국을 제외한 모든 점령지가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방치할 경우 이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터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번의 말에 황제가 피식 웃었다.
“여자들 좀 더 잡아다가 발키리를 더 늘릴까?”
이 상황에서도 농을 하는 황제. 번은 머리를 흔들었다.
“고루 발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에비뉴를 빼면 벨버른 같은 곳은 사회시스템이 멈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곳을 다시 원활하게 돌게 하여야 합니다.”
“거야 오래전부터 골머리를 썩이는 문제였지. 허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아니, 동반성장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 아닌가? 지리, 여건, 자원 심지어 지역마다 백성들의 성향까지 다르다. 태자는 고드람프에 가보았는가?”
벨버른 남쪽 해안에 있던 작은 나라다.
“그곳 사람들은 하루 4시간도 일하지 않는다. 그것이 당연하다 여기지. 없으면? 굶는다. 내일을 위해 오늘 잡은 고기를 저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다 죽으면? 그조차 신의 뜻이라 여기지. 하지만 에비뉴의 백성들은 어떤가? 온종일 움직이지 않나? 일한 만큼 보상이 돌아와야 한다. 그게 당연한 것 아닌가?”
번 역시 이 말엔 딴지를 걸 생각이 없었다. 누구 사상이 옳네! 따지기보단 지금은 해결책이 필요할 때다.
“황국엔 벨버른 지역처럼 값싼 노동력이 사방에 있습니다. 이들은 그저 하루 배만 채울 수 있으면 무엇이든 할 겁니다.”
“그래서?”
번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파악한 황제가 빤히 보았다.
“방법이 있사옵니다.”
“그것이 무어냐?”
“국가에서 지정한 사업체를 골고루 퍼뜨려 공산품이나 생필품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레인보우 립 역시 그중 하나겠고요.”
“그렇게 많이 만들어 누가 쓰겠느냐?”
에비뉴의 형편이 낫다곤 해도 아직 제국에 비하면 형편없다.
“내수로 소화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번이 환하게 웃었다.
“수출을 해야겠지요.”
하나 상단을 운영하며 깨달았다.
교통이 발달하진 않았지만, 이 세계의 인건비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며, 대부분 영지에 묶인 몸이기에 난 땅에서 평생 일하다 묻힌다.
“절로 상인이 늘어 일자리 창출 효과도 기대해 볼 수 있으며, 이들은 군사적으로 볼 때 척후병 역할도 할 것입니다. 정보에 빠르다는 것은 전쟁에서 아주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습니다.”
“네 말처럼 되면 아무 근심 걱정이 없겠다만, 어디 세상일이 그리 쉽게 흐르더냐? 게다가 공장을 지어 물건을 만든다 한들 아무도 사지 않는다면 그 막대한 손해는 국가가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것인데.”
번도 이 정도 질문은 예상했었다.
예를 들어 벨버른에서 싼값에 칼을 하나 만들었다 치자. 이게 대륙 저 멀리 누군가에게 판매된다면 과연 그 값이 얼마가 될까? 처음 저렴했던 물건값은 운송비와 인건비로 계속 몸집을 불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지경에 이른다. 이럴 바엔 그냥 거기서 만드는 게 더 싸지 않겠나? 어차피 같은 칼이라면 말이다.
“맞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핵심이 있고, 답이 있었다.
“그래서 특별한 물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레인보우 립이 가장 좋은 사례가 되겠지요. 오직 에비뉴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 한번 써보면 그 맛을 못 잊어 계속 찾을 수밖에 없는 그런 제품을 만들면 됩니다.”
어차피 중독이란 건, 제품군의 경계가 없다. 꼭 마약이나 술만 중독자를 양산하나? 스마트폰, 게임기, TV나 심지어 야동조차 안 해본 사람은 있어도 딱 한 번만 써본 사람은 없지 않나?
“그런 것이 어디 하루아침에 뚝딱 나올까?”
황제의 말에 번이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제가 석학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보겠습니다.”
이미 염두에 둔 것이 몇 가지 있었지만, 이 자리에서 패를 까긴 싫다. 개념만 잡아놓은 것이라 실물로 구현되는진 직접 해봐야 아는 것이니까.
“흐음..”
황제가 스캇에게 눈을 돌렸다.
“태자의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나?”
황제가 전장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뭐든 좋았던 스캇은 앞뒤 가리지 않고 번의 말에 찬성했다.
“시도하는 것은 좋다 생각합니다. 몇 가지 중 하나만 건져도 충분히 남는 장사가 될 테니까요. 어차피 노는 인력 아니겠습니까? 이미 태자는 이번 전투로 그걸 훌륭하게 증명했고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여인들이 발키리라는 이름을 갖고 철의 군대 내에서 집단전 한정 최고의 화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2달이라는 유통기한과 탄을 모두 소비하면 바보가 된다는 단점이 있긴 해도 분명 그녀들의 활약은 모두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으니, 태자가 또 어떤 것을 들고 올지 궁금하지 않은가?
“좋다.”
황제의 허락이 떨어졌다.
“이번 전투에서 세운 공에 대한 포상이라 생각하고, 해보아라. 비록 실패한다 한들 책임을 묻진 않겠다.”
황제로선 크게 선심 쓴 것이었지만, 번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기필코 만족스러운 성과를 낼 것이옵니다!”
웃는 황제.
“그래, 그래.”
이렇게 일단락되는 듯하다.
황제는 수도로 돌아가 내실을 다지고, 점령한 후단 왕국을 황국으로 편입시켜야 했다.
하지만,
“내가 그리하라 명했다 집정관에게 이르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의 도움을 받도록 하라.”
“네?”
황당한지 스캇이 끼어들었다.
갑자기 집정관이 왜 튀어나온단 말인가? 본인이 보고받으면 되는 일을.
“······?”
번도 의아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는데,
“뭘 그리 보느냐? 네가 말하지 않았더냐? 주변국과 동맹을 더욱 견고히 하여야 한다고.”
분명 아까 그리 말하긴 했지만..
“손이 붙을지, 떨어질진 일단 잡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황제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었다.
.
.
.
제국에 스며든 십위가 전해오길, 그들은 당장 전쟁을 이어 갈 생각이 없다 했다.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도 국경 근처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 소식을 들은 에비뉴의 황제는 후단성에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훌쩍 떠나버렸다. 무려 4만의 군사를 이끌고서 말이다.
“······.”
발키리와 솔개부대, 드래곤 한 마리는 번에게 남겨졌다.
황제가 드래곤을 탐내는 기색이 보이긴 했으나, 번이 아니면 통제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곤, 깨끗하게 포기해버렸다. 확실히 이런 모습만 봐도 대단한 남자였다. 다른 지휘관이었다면 어떻게든 드래곤을 차지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발키리 역시 마찬가지다. 황제는 그녀들이 신무기의 유통기간이 끝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짐덩이가 될 거라 보았다. 벨버른에 사람을 보내 무기를 공수해오면 되긴 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않아도 4만의 군대면 최근 제국과의 일전 소식이 퍼져나간 지금 충분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건 정확한 판단이었다.
“아주 전쟁광이시라니까.”
번이 씁쓸하게 웃으며 저 멀리 떠나가는 철鐵의 군대를 보았다. 마치 이곳저곳 떠돌며 유랑하는 방랑자들 같지 않나?
“우리도 가지.”
번의 말에 페트릭이 힘차게 외쳤다.
“예! 선두 출발-!”
또각, 또각.
번이 탄 말발굽이 울리고, 머리 위론 후우우우웅-! 거대한 생물이 날아간다. 벌써 열흘 가까이 함께 생활했지만, 아직도 적응이 힘들었는지 발키리 몇이 뾰족하게 놀란 소음을 냈다.
번은 벨버른에 들렀다, 에비뉴 수도로 향할 생각이었다.
설명우가 살던 세상에선 일단 전쟁이 터지면 죽기 살기로 화력을 쏟아부었지만, 여긴 좀 다르다. 이번 나인 강 전투처럼 서로를 견제하는 힘겨루기가 수십 년에 걸쳐 이어지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전면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수송기에 특수부대원 태워 적진 한복판을 타격하는 빠른 작전을 구사하기 힘든 시대라 그런지 전쟁은 아주 길고, 복잡하게 흘러가는 것이다.
물론, 이건 대국과 대국의 싸움일 때 그렇다는 거였다. 황제가 향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은 머지않아 소식을 듣고, 발칵 뒤집힌 상태로 고민할 것이다. 저항할 것인가, 맞설 것인가. 제국만 믿고 이제껏 간을 보고 있었는데, 선택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황제는 그저 이 과정 자체가 즐거워 보였으니까. 정복자 자질을 타고났다고 해야 하나? 역마살驛馬煞 제대로 맞은 남자의 가족은 언제나 괴롭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말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 페트릭이 다가왔다.
“일단은.. 무사히 넘긴 것 같습니다.”
페트릭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뭘 그리 걱정하나? 문제 될 거 없다니까.”
번은 황제에게 거짓말을 했다. 페트릭도 가담했고 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속일 순 없지 않겠습니까?”
“그때는 그때 맞게 둘러대면 돼.”
“하아, 이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그대만 입 다물면, 세상 누가 알아? 게다가 말했잖아. 급하면 본체를 잘라버려. 그럼 가지도 시드니까. 영 찝찝하면 그럴듯하게 사람들 모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몇 번 보여주던가.”
그렇다. 번은 부랄옥잠의 가지를 두고, 황제에게 거짓을 고했다. 애초에 유통기간 따윈 없었던 것이다.
가지는 본체와 떨어져 있어도 한몸이나 마찬가지라 본체가 살아있는 한 계속 살수 있었다. 심지어 씨앗을 다 소비해도 물에 담가두면 알아서 생성도 되었으니, 이 좋은 무기를 번이 그냥 넘길 리 만무하지 않나?
아마 황제가 진실을 알았다면, 가지만 빼앗아 철의 군대에게 무장시켰을 것이다. 그럼 번이 고생해서 만든 발키리는 또다시 손가락만 쪽쪽 빠는 신세로 전락하게 될 것이고.
‘그렇겐 안 되지.’
얘들 키우느라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데 말이다.
“크크크..”
절로 웃음이 터졌다.
그간 황제나 그의 측근들이 있어 마음껏 속을 드러낼 수 없어 답답했는데, 이젠 아주 후련했다.
드래곤도 마찬가지.
번은 애초에 드래곤을 전쟁터에서 굴릴 생각이 없었다. 왜 아니겠는가? 훨씬 더 유익하고 다양하게 써먹을 수 있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