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뷔 #
전쟁은 뜨겁고, 강렬했으며 짧았다.
드래곤 한 마리 추가되었다고 이렇게까지 제국군이 밀릴 것은 아니었지만, 한번 기울어진 승리의 추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고,
-퇴각하라! 퇴각!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만의 발키리 부대가 강변에 늘어서서 집중사격을 시작하자, 제국 지휘관은 공황에 빠졌다.
대체 저게 뭔가? 석궁도 아닌 것이 엄청나게 빠르다. 어떤 것은 갑옷이나 방패에 맞아 튕겨 나가는 것도 있었지만, 머리나 팔, 다리에 명중하면 치명적이었다.
-와아아아아!
-이겼다!
-우리는 무적의 군대다!
서로 어울려 치고받고 싸웠으니 에비뉴도 많은 사상자가 나왔지만, 대승을 거뒀다 평가할 수 있는 전투였다.
-으하하하! 덤벼라! 잡것들아! 우리는 최강의 철鐵의 군대다!
웃으며 죽는 남자를 본 적이 있는가? 전쟁터에서 이런 남자를 보았다면 결정해야 한다. 싸울지 말지를.
이러한 전쟁은 아주 작은 것들이 끼워지며 뒤틀리고, 승패가 갈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곧 역사가 된다.
-가까이에서 보니, 진짜 크네.
-흐미.. 소름이 돋는구먼.
-드래곤이라니.. 태자님께선 어떤 신통방통한 재주로 저런 것을 부리는 걸까?
제국군이 퇴각하자, 여유가 생긴 병사들이 강에서 기어 나오는 드래곤을 보며 수군거렸다. 이들 중에 드래곤을 이리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여행이라는 개념이 확립되지 않은 이 세계에서 드래곤은 그저 풍문으로만 전해지던 이야기 속 주인공이었을 뿐이다.
꿀꺽.
그건 스캇도 마찬가지였다.
살면서 온갖 일 다 겪어봤다, 자부했지만 블랙 드래곤을 이렇게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크르르르르..
몸에 붙은 물기를 털어내듯 부르르 몸을 떠는 드래곤. 그 앞에 번이 서 있다. 이미 전신엔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있었고, 얼마나 힘차게 움직였는지 땀이 식으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기막힐 일이군요.”
스캇이 번에게 다가가 말했다.
“스캇 경.”
“태자님.”
아깐 경황이 없어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눴다. 서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다가 절로 나오는 웃음.
“어떻게 된 겁니까?”
스캇의 물음에 번은 잠깐 지난 일을 떠올렸다.
블랙 드래곤. 일명, 공포의 흑룡黑龍!
만약 이놈이 레드나 블루, 그린만 되었어도 번은 찾아가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악마가 말했다. 블랙 드래곤이라면, 그것도 아주 오래된 고룡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풍문으론 드래곤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강해진다는 말도 있었지만, 그건 잘못된 얘기였다. 물론 3천 년 정도 살면 가장 혈기왕성하고, 육체적으로도 텐션이 최고점에 올라있는 상태라 적수가 없었지만, 모든 생물이 그렇듯 세월을 이길 장사는 없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드래곤은 5천 년쯤 되면 죽으니까.
그리고 이 블랙 드래곤 역시 마찬가지였다.
“교섭을 했습니다.”
마냥 속일 순 없기에 오면서 준비해둔 말을 했다.
“저.. 드래곤과 교섭을 했다고요?”
입가심거리도 안 될 것 같은 인간이 찾아와 협상을 하자면 그걸 받아주는 드래곤이 얼마나 있을까? 근데 그걸 해냈단다. 물론, 이면엔 아주 복잡하고 은밀한 거래가 둘 사이에 오갔지만, 스캇이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떡하니 증거가 있으니 믿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증명이라도 하듯,
“크르르르..”
드래곤이 번의 뒤쪽에 자리를 잡고, 질펀하게 누웠다. 머리와 꼬리를 날개 안쪽으로 말아넣고는 편히 쉬는 모습으로 말이다.
“에비뉴 역사상 최초로 드래곤 라이더가 되셨습니다. 하하!”
“그 정돈 아닙니다. 그저 서로 돕는 관계일 뿐이니까요.”
“그게 어딥니까? 저도 이런 듬직한 친구 하나 있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스캇의 부러움 찬 시선에 번이 쓰게 웃으며 말한다.
“폐하가 계시지 않습니까?”
“헙.. 어디 가서 그런 말씀 마세요. 친구라니요? 그분이 아시면 제 뒤통수가 남아나질 않습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스캇과 황제의 유대가 얼마나 강한진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햐..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네요. 내 평생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몸을 말고 있어도 동산 하나가 떡 하니 눈앞에 있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거대했고,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번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 씁쓸했다. 어둠을 익힌 자에게 천고의 명약이나 다름없다는 드래곤 하트나 빼먹고, 남은 비늘로 발키리 갑옷을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일이 꼬여 버린 것이다.
죽을 날만 기다리던 고룡.
브레스도 한번 토해내면 다시 모으는데 기약이 없고, 지금도 봐라. 그거 조금 움직였다고 지쳐서 뻗어버렸지 않은가? 사실, 보기는 좋을지 몰라도 겉모습의 위용만큼 실력발휘를 하지 못하는 빈 쭉정이였던 거다. 물론, 아직까지 눈치챈 이는 없지만 말이다.
“가시죠! 폐하께서 기다리실 겁니다!”
어쨌든 빛 좋은 개살구란 사실을 모르는 제국군은 이제 감히 드래곤이 지키는 강변을 넘지 못할 것이다. 에비뉴로서는 아주 좋은 경비견을 하나 얻은 셈인데, 덕분에 병사들은 전쟁으로 지쳐 녹초가 된 몸을 편히 쉴 수 있었다.
크르르르.. 퓨후우우우우..
물론, 드래곤 코 고는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긴 했지만 말이다.
.
.
.
“뭐가 어쩌고 어째?”
대청은 웅장했다.
천장은 아치형 유리로 되어 빛이 잘 들었고, 아기 천사들이 뛰노는 멋진 그림이 새겨있었다. 200명 이상이 들어와 있어도 넉넉한 공간감에, 깔린 양탄자조차 최고급이 아니면 들이질 않는다는 이 곳. 대륙을 지배하는 9강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나라. 스스로 황국을 천명하고, 황좌에 앉은 어설픈 나라가 아닌, 500년간 대륙의 중심을 굳건하게 지켜온 진짜 황제의 땅. 포르토피노 제국이었다.
황좌에 앉은 노인이 성난 얼굴로 묻자, 저 아래 엎드린 대신이 몸을 떨며 다시 말했다.
“저 에비뉴의 잡졸이 드래곤을 동원하는 바람에 우리 군이 후퇴하였다 하옵니다.”
드래곤? 그게 어디 뉘 집 개처럼 원할 때 끌고 와서 써먹을 수 있는 생물이던가?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누가 나에게 설명을 좀 해보라. 지금 저 자가 내게 무슨 소릴 지껄이고 있는 것인가?”
수많은 대신이 있었지만, 대답을 하는 이는 없다. 괜히 나섰다가 화풀이를 당할 수도 있었고, 어설픈 지식을 뽐내다가 망신을 당해 체면을 구길 수도 있었다.
“허어, 답답한지고.. 누가 속 시원하게 말해보라지 않느냐?”
분노하던 황제가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를 내자, 용기를 얻은 한 대신이 나섰다.
“에비뉴의 태자 직위에 있는 자가 그 블랙 드래곤을 부린다 하였습니다.”
“태자라?”
태자라면 대를 이을 후계자란 소리 아닌가? 그런 자가 전쟁터에 아비와 함께 나선다? 그것조차 이상하다. 자칫 씨가 마를 수 있는 일 아니던가?
“그러하옵니다.”
“무슨 수로?”
“그건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하오나 저쪽에 심어둔 우리 사람이 전해온 말에 의하면 그 태자의 영향력이 대단해 그가 참가한 전투는 결코, 패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에비뉴에 그런 용자가 있던가? 들은 기억이 없는데?”
“번이라는 이름을 쓰는 올해 십사 세 된 황자라 하옵니다.”
“허..! 뭐라? 열넷? 열넷이라고 했느냐?”
아까 드래곤에 대해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황당했다. 이제 열넷 된 애송이가 무슨 놈의 전쟁을 안단 말인가? 그래, 백번 양보해서 1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 어려서부터 아비 따라 다니며 익혔다 치자. 그래 봐야 20년도 안 된 주제에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백전노장들을 어떻게 감당할까? 그런데 뭐?
“흑룡이 선택한 사내라며 병사들이 그 자를 상대하길 꺼리고 있습니다. 그 자의 검에 죽으면 영혼까지 저당 잡힌다는 소문도 돌고.. 당분간은 상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관이었다.
저 끄덕이는 대신들을 보라. 제국이 피한다? 고작 그 족보도 없는 에비뉴 따위를?
“허면, 그 드래곤부터 죽여버리면 되는 거 아니냐?”
“물론 그런 방법도 있습니다만, 만약 실패할 시 곤두박질친 사기를 걷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서겠다는 이가 있을지도 잘 모르겠고요.”
제국의 이름난 용사들을 모아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 드래곤 한 마리쯤은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과거에 몇 번 드래곤 사냥에 성공했던 전례가 있었으니까. 저기, 저 벽에 박제해둔 거대한 날개 한쪽도 그렇게 얻은 블루 드래곤의 부산물 아니던가?
하지만 당연히 여우나 사슴사냥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그만큼 희생도 감수해야 할 거고.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이대로 두고 보자 이건가? 경은 지금 그리 말하고 있는 건가?”
다시 황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자, 대신은 급히 머리를 낮게 숙이며 말했다.
“에비뉴는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습니다. 후단을 정복하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본 손실은 막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국은 잃은 게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후단을 잃어 본 손실은 다른 곳에서 채우면 그뿐이니까요. 이럴 때는 놈들의 피를 말리는 전략을 사용하시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되옵니다.”
“잡아먹은 거 소화도 못 시킬 것이니, 배가 터질 때까지 기다리자?”
“침략은 쉽습니다. 타이밍만 맞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요. 허나 내치는 전혀 다른 분야 아니겠습니까? 저 에비뉴의 황제는 그쪽으로 전혀 관심이 없다 들었습니다. 몇 해 가기 전에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옵니다.”
황제는 이마를 구기며 시선을 돌렸다.
“프라마 경.”
“예, 폐하.”
빨간색 연미복을 입은 사내가 나와 답했다.
“마약은 어찌 되고 있나?”
“노력 중이오나 흔적이 에비뉴로 이어져 있어 깊게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제국 측에서도 마약의 출처를 쫓고 있었다. 병사들뿐 아니라 귀족 상당수가 이미 몇 번씩 쾌락을 맛본 뒤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언젠가부터 가짜도 판을 치고, 설령 남은 약을 구한다 쳐도 한 줌조차 안 되는 그 값이 소 한 마리에 필적할 정도로 올랐다. 거기에 최근 세이프 레인보우라는 부작용 없는 안전한 마약이 있다는 정보까지 입수한 터라 조바심은 더욱 강해졌다.
세상을 다 가진 거나 마찬가지인 황제. 그가 유일하게 가지지 못하는 하나가 되버린 것이다.
“빌어먹을 에비뉴 놈들..”
왜 죄다 거기와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길 한 번 줄리 없던 변방의 소국에 불과할 뿐이었는데 말이다. 이젠 회의를 하면 놈들 얘기가 절반이었다.
“폐하.”
처음 나왔던 대신이 결심한 듯 말했다.
“전면전이 반드시 옳다 할 순 없사옵니다.”
“그러면?”
“제게 맡겨 주신다면, 몇 해 안에 에비뉴를 붕괴시켜 보이겠습니다.”
"오호라? 그래?"
황제의 눈이 오늘 처음으로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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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누구도 철鐵의 군대를 얕보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하옵니다! 명실상부 10강에 당당히 자리했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륙엔 9개의 강대국이 있었고, 에비뉴는 그보단 한 급 낮은 중간에 걸쳐있었다. 하지만 이번 제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분위기가 한껏 고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서열 놀음 따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지.”
황제의 말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최고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 문득, 앞을 보았을 때 아무도 없어야지. 뒤를 돌아보아서야 되겠나?”
스캇이 쓰게 웃으며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나인 강 전투는 일주일 전에 끝났지만, 에비뉴 군은 아직도 강변에서 머물고 있었다. 아직 어찌할지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하오나, 이젠 잠시 아래를 내려보셔야 할 때이옵니다.”
뒤를 보라는 게 아니다. 제발 저 아래 백성을 좀 보라고! 이 양반아! 스캇의 표정은 그리 질책하고 있었다.
“크음..”
하지만 황제는 쉽사리 마음을 정하지 못한다. 이 기세를 몰아 제국 땅 한번 밟아보고 싶은 거다. 마침 드래곤도 있고. 이 얼마나 멋진가?
“폐하.”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지난 일주일간 계속 이 자리에 있었지만,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았던 태자가 드디어 먼저 입을 연 것이다.
“태자는 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