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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105화 (105/177)

# 깽판 #

어릴 적, 용龍을 본 적이 있다.

녀석은 구름 높이에서 고고하게 유영하며 그 거대한 날개를 휘적휘적 움직였었다. 우연히 궁에서 그걸 바라보던 어린 왕자는 그날, 이런 생각을 했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어느덧 세월은 흘러, 인간 세상 따윈 관심도 없다는 듯 굽어보며 떠나갔던 그 용처럼 어린 왕자는 이제 황제가 되었지만, 아직도 이런 밑바닥에 있었다.

“왜..?”

그때가 생각나 갸웃하면서도 황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용이 인간을 해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으니까. 사람이 애써 개미를 찾아 죽이진 않지 않은가? 어쩌다가 재수 없게 발에 밟히면 몰라도. 인간을 대체할 먹잇감은 널리고 널렸기에 둥지 근처에서 먹이를 찾는 것이 일반적인데,

“피,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스캇이 옆에서 팔을 잡아 끌어당길 정도로 용은 확실히 이쪽으로 하강 중이었다.

“가긴 어디로 가?”

그도 그랬다. 위에서 방향만 살짝 바꾸면 목표지점을 손쉽게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그래도요!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순 없습니다!”

“아니야, 기다려봐. 뭔가 이상해.”

백수의 왕 사자라 해도 얼룩말이 500마리씩 뭉쳐있는 무리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진 않는다. 용도 마찬가지다. 한둘이면 몰라도 이리 많은 인간이 모여있으면 절로 위압감이 들게 마련. 게다가 인간 중엔 용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강자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텐데..

그런데도 뛰어들어?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으으.

-히이이익!

-저게 뭐야?

전선 뒷열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병사들은 기겁하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저쪽 하늘로 고개를 돌릴 때쯤엔, 이미 불청객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아무래도 우, 우릴 노리는 것 같습니다!”

스캇은 급히 수인을 맺으며 마법주문을 읊었다.

부우웅-!

황제와 그의 앞에 반투명한 푸린 빛이 이내 서리고,

“마법병단은 실드를 준비하라!”

큰소리로 외치며 하얀 깃발을 들고 흔들어대는 스캇.

“공격에 대비하라!”

“드, 드래곤이다!”

“으아악!”

정신 바짝 차리려 하지만, 이미 혼비백산이었다.

전선에 나가 사람과 싸우다 죽는 건 뭐 그렇다 치자. 내가 이길 확률이라도 있으니까. 하지만 괴물을 상대한다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공포 말이다. 하물며 그냥 괴물도 아닌, 전설의 드래곤이라면 말해 뭐할까?

이제 50미터까지 접근한 드래곤.

날개를 쫙 펴고 활강했다. 가속도가 붙어 더욱 빨랐고, 아가리는 한껏 쩌억 벌려 무언가를 내뱉으려는 듯 보인다.

“브, 브레스breath?”

시커멓고 불길한 연기가 드래곤의 아가리에서 흘러나와 뒤쪽으로 긴 수염을 만들자, 지상의 사람들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피..!”

피하라고 외치려던 스캇.

그러나 드래곤의 아가리에서 토해낸 검은색 구球가 유성처럼 긴 꼬리를 달고 하늘을 수놓자, 그것이 이쪽을 향한다는 게 아닌 걸 깨닫는다.

각이 달랐다.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제국군이 있는 강 건너를 보는 스캇.

-뭐, 뭐야?

-피해라!

-흩어져!

-갑자기 무슨 날벼락이야!

저쪽에서도 인지했는지 난리가 났다. 하지만 피한다고 피할 수 있으면 그게 드래곤의 숨결일까?

솨아아아악!

쏟아지는 화염구!

쿠웅!

몇 사람쯤은 간단히 몸을 녹여버리며 지면을 강타한 그것은, 그 즉시 폭발하며 터졌다. 그리고 이어진 충격파는 사방으로 퍼져가며 거대한 먼지 구름을 만든다.

화악-!

터져나가는 압력에 날아가는 제국군은 옹기종기 모여있던 터라 피해가 극심하다.

고작 한방.

그런데 그 한 번의 숨결로 제국군 5천 명 이상이 영향권에 들어가버린 것이다. 바깥쪽에 있던 사람들도 코와 입을 손으로 막고는 괴로운 듯 자리를 피했고, 다리가 풀린 사내는 기어서라도 벗어나려 했다. 그나마 살짝 비켜나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은 닿기만 해도 옷이 녹아내리고, 스치기만 해도 살이 썩어드는 이 끔찍한 파괴력에,

-미친..!

-빠, 빨리 수습해!

-이쪽으로 날아온다! 공격 준비!

-마법사! 뭐 하고 있나? 마법사아아!

어떻게든 불청객을 저지해보려 발버둥치기 시작한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브레스는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이제 본체가 온다.

후우우우우웅-!

에비뉴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를 스쳐 날아가는 거대한 동체를 보며 안도와 함께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저 드래곤이 왜 제국군을 공격하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에겐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만약 이쪽이 공격받았다면 어찌해야 했을지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블랙.. 드래곤이라니..”

드래곤도 정령처럼 자연과 아주 밀접한 연관을 지녔다. 그 때문에 타고난 속성에 따라 몸의 색이 정해지는데, 어릴 땐 희미하다가도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차 영롱하게 단색 비늘로 덮인다. 그 비늘의 색에 따라 드래곤의 나이를 가늠할 수 있었는데, 나무를 잘라 나이테를 보는 방법과 비슷했다.

개집에서 자라면 개가 된다고, 드래곤 역시 속성에 따라 성격이 따라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화기를 듬뿍 먹은 레드 드래곤은 불같이 포악하며, 나무처럼 있는 듯 없는 듯 한 자리에서 뿌리박고 온순하게 살아가는 그린 드래곤도 있다고 현자의 서는 전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블랙 드래곤은 그 이름과 색에서부터 파악할 수 있듯 절대 상종하지 말아야 할 괴물의 1순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만큼 가장 많은 전설과 괴담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행동을 종잡을 수 없다 전해졌다. 게다가 드래곤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블랙 드래곤의 브레스는 아주 독하고 불길한 기운을 품고 있어 사람을 태우는 게 아니라 녹여버릴 정도로 산성이 강해, 질식할 만큼 독하다 알려져 있었다.

그런 블랙 드래곤이 오늘 여기에 나타난 거다.

흑룡黑龍의 난.

그렇다. 드래곤 한 마리가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일까?

어떻게 된 것인지 그렇게 한바탕 재앙을 쏟아낸 드래곤은 쏘아진 화살처럼 강 위를 유유히 나는가 싶더니,

“어..?”

스캇의 눈을 크게 뜨이게 하고 말았다.

당황하기는 제국군도 마찬가지. 모두가 강을 건널 거라 예상했던 드래곤이 갑자기 뚝 떨어져 아래로 처박힌 거다.

콰앙!

높이 물이 솟아오르고, 우스스 비처럼 다시 떨어져 내렸다. 힘을 이기지 못한 드래곤은 한참을 주르륵 강바닥을 쓸며 밀렸나갔고, 덕분에 근처에 있던 사람에겐 참극이 벌어졌다.

-으아아아아악!

-살려줘!

몸길이 30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괴물이 온몸으로 깔아 뭉개버린 것이다. 강에 들어왔던 사람들은 도망갈 새도 없이 쥐포가 되어 버렸고, 에비뉴 쪽은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드래곤이 떨어진 지점이 제국군 진영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국군의 피해는 참담했다. 수심이 낮은 곳으로 빽빽하게 늘어서서 강을 건너는 중이었는데, 그 위를 무참히 드래곤이 덮쳐버렸기 때문이다. 브레스에 이어, 이번에도 300명이 넘는 병사가 죽거나 크게 다쳤다. 몸집이 크다 보니 행동 하나 하나가 메가톤급이 되버린 거였다.

-꺼어어억..

-사, 살려..

가슴까지 오던 수심이 드래곤에게 휘말리며 다리를 접질리자, 순식간에 얼굴을 덮어버린다. 허우적거리는 사람. 기지를 발휘해 물속으로 헤엄쳐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 공포에 잡아먹혀 빽빽 비명만 지르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대혼돈이자, 아무도 예상할 수 없던 황당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건, 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아우.. 씨.. 뭐야?”

하마터면 깔려 죽을 뻔했다.

드래곤의 등에 바짝 달라붙어 있던 번은 드래곤이 강에 처박히며 뒹굴뒹굴 구르자, 압사할 뻔했다. 울퉁불퉁한 등 짝 돌기 사이에 쏘옥 파묻혀있지 않았다면 분명 어디 하나 부러졌으리라.

『미안하다.. 관절염 때문에..』

촌극의 원인은 간단했다.

쫙 뻗어 중심을 잡던 오른쪽 어깻죽지가 갑자기 뜨끔했기 때문이다. 왜 사람도 그런 적 있지 않나? 멀쩡하던 허리가 갑자기 삐끗하면, 그 순간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이 늙은 용도 중심을 잃고 추락한 거다. 따져보면 그도 억울하긴 마찬가지였는데, 어쨌든 최선은 다했다. 삐걱거리는 몸으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하여간..”

강물에 흠뻑 젖은 머리를 부르르 털어내며 드래곤의 몸통을 밟고 올라서는 번.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제국군 병사들은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건 아군이라도 마찬가지였고.

“좀 더 멋지게 등장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아쉽다는 듯 주변을 훑어보는 번.

그나마 마지막이 에러긴 했어도 이만하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듯 싶다. 시선집중은 확실히 한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이제, 기이한 소요 속에 번이 검을 쥔 손을 번쩍 들고, 한 방향을 향해 외쳤다.

“아버님! 소자 번! 전선에 합류했사옵니다!”

마력까지 운용해 쩌렁쩌렁 외치는 목소리는 강 주변으로 널리 퍼져나갔고, 당연히 황제의 귀에도 들이 박힌다.

“허, 거, 참..”

이번 일은 황제로서도 어이가 없었다. 저 아들놈이 매번 황당한 일을 벌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쿠쿠쿠, 태자께서 10만 대군에 필적하는 걸 가져오셨군요.”

스캇이 웃음을 멈추지 않고, 쿡쿡거렸다.

“재밌냐?”

“그럼요! 저 여기 보이십니까? 돋은 닭살이 가라앉질 않습니다! 드래곤이라니! 하하하! 기발하지 않습니까?”

무시무시한 괴물이 우리 편이란다. 드래곤을 타고 날아온 사람이 에비뉴의 태자라니. 이것만큼 병사의 사기를 돋우는 일이 또 있을까?

“태자님-!”

에비뉴 진영에서 큰 목소리 하나가 터져 나왔다. 발키리 부대가 있는 쪽이었다.

목이 찢어질 것 같이 외치는 노장. 투구까지 벗어 던진 그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페트릭.”

번은 그런 페트릭을 마주 보며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믿으래도.

-예! 믿을 것입니다!

거리가 멀어 말로 하긴 무리가 있었지만, 사내들의 뜻은 충분히 통하였다. 씨익, 웃은 번이 힘차게 돌아서자, 많은 사람이 번을 보고 있었다.

참으로 오싹오싹하지 않는가?

무릇 주인공이라면 그럴듯한 인사말 정도는 해줘야겠지?

“대 에비뉴의 무쇠처럼 강한 철鐵의 군대여!”

말을 하며 발끝으로 드래곤의 등을 툭툭 치자, 기다란 목과 거대한 머리가 제국군을 향해 들렸다.

“우리는 오늘 전설이 될 것이다-!”

검을 앞으로 뻗는 동시에 드래곤이 날개를 쫙 펴고 포효한다.

카라라라라라라라라락!

늑대의 하울링이나 호랑이의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짐승의 울음소리에 자빠지는 제국군. 그와 반대로 에비뉴의 병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 눈빛이 초롱초롱 빛이 나기 시작한다.

“가라!”

번의 목소리에 병사들이 열광했다.

-가자!

-싸우자!

-드래곤이 우리와 함께한다!

-태자님 만세!

-우와아아아아아!

가만히 있질 못하겠는지, 번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에비뉴의 병사들은 해일처럼 강을 넘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위에서 보면 큰 뱀 한 마리가 구불구불 기어가는 것 같았다.

이 와중에 번은 모두와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아까 드래곤이 포효할 때, 녀석의 등에서 뛰어내린 번. 일정한 속도로 한 곳을 향해 나아갔다.

“…….”

황제 역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아들을 본다. 그러고 보니, 이런 장면 저번에도 그랬지 않나? 이 녀석은 매번 이렇게 극적인 순간에 나타나 사람 못 견디게 만드나?

카아아아아아아-

저 멀리서 드래곤의 울음이 들려왔다. 본격적으로 제국군을 향해 깽판 치기 시작한 거다. 늙었다고 해도 꼬리를 휘두르거나, 발로 밟기만 하는 가벼운 동작으로도 인간에겐 자연재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아악!

-도망쳐!

-마법사! 마법사들은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냐!

소란을 한 귀로 흘리며 번은 이윽고, 황제의 앞에 섰다.

스아악.

검이 수직으로 땅에 박히고.

“소자, 번, 늦었사옵니다. 그에 따른 벌은 달게 받겠사옵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

아니다. 잘했다. 잘 와주었다. 말해야 하는데, 묘하게 그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 황제. 머쓱해서 스캇을 보았다. 얄미운 스캇은 알아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얼굴을 홱! 돌려버린다.

“…….”

황제는 한발 앞으로 걸어, 번에게 바짝 다가섰다.

“벌을 받겠다니, 내리겠다.”

“..폐하?”

황당한 말에 스캇이 다시 고개를 돌려 황제를 불렀지만, 번은 묵묵히 기다렸다. 그런 그의 어깨에 황제의 손이 올라갔다.

“고개를 들라.”

번의 눈과 황제의 눈이 위에서 아래로 마주한다.

“오늘 이 전투를 너의 것으로 만들어라.”

그리하여 너의 이름이 제국 저 너머까지 진동케 하라.

이건 벌이자, 상이었다.

“할 수 있겠나?”

입을 꾹 다물고, 웃음기를 머금은 번.

“녀석, 그리도 좋더냐?”

황제 역시 훌훌 웃으며 돌아서서 뒷짐을 지었다.

“소자! 번!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일어서며 칼을 뽑아 드는 번은 황제의 등을 본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오늘이 지나면 이 대륙의 중심에선, 에비뉴의 철鐵의 군대가 아닌, 오직 한 사람 이름이 울려 퍼지게 하리라!

-캬캬캬캬! 피다! 피가 부른다! 저 강물을 새빨갛게 물들여 죄다 마셔버리자!

검을 쥔 번이 다시 강을 향해 무섭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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