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04화 (104/177)

# 용감무쌍 #

세상 어디에나, 모든 동네엔 전설이 있다.

벨버른 또한 그렇다. 면적만 대한민국의 3배에 해당하는 큰 땅에 이런저런 일이 없었을까? 더군다나 언론, 인터넷, SNS 같은 것이 없는 세상이라 오지에선 무슨 사건 사고가 벌어지는지 알 방법이 없다. 그저 오가는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이 전부일 뿐.

“으음..”

그런 설화중에서도 아주 불길하고 끔찍한 소문들이 도는 것이 있는데, 누군가는 그런 걸 묶어 10대 금지禁地라 하였고, 또 누군가는 줄여서 5대 금지로 부르기도 했다. 설명우가 살던 세계에도 그런 것이 있지 않았는가? 세계 7대 불가사의라든지 빨간 마스크, 홍콩할매귀신 같은 것들 말이다.

“그건..”

페트릭의 미간이 깊이 파였다.

번의 얼굴을 보니 당장에라도 그곳으로 뛰쳐나갈 기세 아닌가?

“날 믿어. 충분히 자신 있으니까.”

페트릭의 염려를 덜어놓듯 자신만만한 번. 하지만 이것만큼은 페트릭도 이리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벨버른 몇대 금지라며 떠들기 좋아하는 하릴없는 사람들이 쓸떼없이 정한 것이라 쳐도, 아니 소문이란 게 세월이 지나면 변질하고 덩치가 부풀려지기 일쑤라고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물어보면 단연, 두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마굴이었고, 그리고 또 하나는..

고룡古龍의 둥지였다.

게다가 고룡 만큼은 실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 역사. 실존한다는 거다.

“늙고 늙어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고룡이라지만, 그래도 용은 용입니다.”

이빨 빠진 호랑이도 호랑이 아니던가? 토끼 따위가 설칠 레벨이 아니란 거다.

하지만 번은 그저 웃을 뿐.

‘그놈 비늘이 그리 좋다지?’

-말해 뭐해! 드래곤이다! 그것도 5천 년 넘게 살아온!

그걸로 무장할 수만 있다면 발키리는 공방 모두 풀템으로 무장할 수 있다. 가공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해도, 뭐 어떤가? 대충 죽죽 이어붙여 두르기만 해도 충분할 텐데. 패션쇼 나가는 거 아니지 않나?

번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한쪽으로 가서 뭔가를 집어왔다.

지도였다.

“어디쯤이지?”

“설마.. 혼자 가시려는 것입니까?”

이제까지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겠다며 길을 떠난 사람 머리만 모아 쌓아도 성벽 높이만큼은 되겠다. 세상에 미친놈이 얼마나 많던가? 이야기로 들을 땐 마냥 재미있지만, 내 주변 사람이 주인공이 되면 이것만큼 골치 아픈 일도 없다.

“…….”

번은 대답 대신 페트릭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가합니다. 기사단 전체가 가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페트릭은 최대한 단호하게 말했지만, 번의 다문 입술이 뭘 의미하는질 알고 있다.

“…….”

“…….”

서로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대치가 이어질 때,

“나는.”

번이 먼저 입을 열었다.

“허락받으러 온 게 아니야.”

그렇다. 페트릭을 통하지 않아도 고룡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번이 페트릭에게 말하는 이유. 그것은 하나였다.

“설령, 내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통보.

번은 지금 만약을 대비하는 것이었다.

“부대를 잘 이끌어주게.”

다소 가볍던 목소리가 무겁게 깔렸다.

“꼭.. 가셔야겠습니까?”

페트릭의 말에 번은 가볍게 웃으며 돌아섰다.

“나 하나 편하자고 나를 따르는 수많은 이들을 외면할 순 없지 않나?”

물론, 이면엔 많은 계산이 깔려 있긴 해도 번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태자님! 태자-님!”

급히 따라나서려 했지만, 이미 문은 콰앙-! 닫힌 후였다.

.

.

.

“그렇게 되어 제가 부대를 이끌었습니다.”

후단 성.

1만 2천의 지원군이 새로이 합류했다.

그런데 그 구성이 아주 독특했다. 솔개부대원을 제외한 전원이 여성이었고, 손엔 긴 막대 같은 것을 들었으며 등에 멘 통엔 여벌의 막대가 빽빽했다.

그녀들을 보는 반응은 다양했다.

휘익-! 휘파람을 불며, 거기 예쁜데! 오늘 밤 나와 어때? 놀아보자고! 으하하하! 짓궂은 농담을 던지는 사내들도 있었고, 게슴츠레한 눈길로 그녀들의 엉덩이를 바라보는 남자도 있었다. 누가 예쁘네, 아니 저 여자가 더 예쁜데? 순위를 매기는가 하면, 쯧! 말세다. 말세야. 이젠 계집들이 전쟁터를 대놓고 쏘다닌다며 혀를 차는 이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시끌벅적한 그녀들의 입성이 끝이 나고, 부대 사령관 페트릭은 황제가 있는 후단 성으로 직행했다.

“녀석.. 결국, 실패했나?”

큰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쓴웃음을 흘리는 남자.

황제였다.

“일만이천이면 적은 수가 아닙니다. 고작 3개월 아닙니까? 이 정도면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지요.”

스캇이 옆에서 번의 편을 들었지만, 황제는 고소한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거기에 신무기까지 가져왔다지 않습니까?”

페트릭의 옆엔 다루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상태였는데, 그녀의 앞엔 막대가 하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것인가?”

황제가 턱짓하자, 페트릭이 크게 끄덕였다.

“예. 이번에 개발한 무기입니다.”

“가져오라.”

페트릭이 막대를 집어 스캇에게 넘기자, 스윽 훑어본 뒤 황제에게 건네진다.

“사용법은?”

페트릭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어렵지 않습니다. 막혀있는 부분을 몸쪽으로 두시고, 구멍 뚫린 곳을 목표의 방향과 일치시킨 뒤.”

마디 쪽 표면의 까칠한 부분을 꾸욱 누르면,

퉁-!

“헛!”

씨앗이 나갔다. 그리곤,

“…….”

투욱.

반으로 쪼개진 씨앗.

그 뒤, 무표정으로 내려보는 은사는 보는 눈만 없었다면 한마디 했을 얼굴이었다.

“어때?”

황제가 스캇을 보았다.

어깨를 으쓱하는 스캇.

“쓸만한데요?”

그렇다. 은사였기에 망정이지, 보통 사람이었으면 머리가 깨질 수도 있었다.

황제가 페트릭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거다.

“사거리가 얼마나 되지?”

“활처럼 곡선으로 쏠 수는 없는 무기여서 유효 살상 거리는 50미터 정도입니다.”

“호오.”

황제가 흥미를 보이고,

“유효 살상?”

스캇이 되묻는다.

“그럼 상처를 입히는 것은 더 먼 거리로도 가능하단 것입니까?”

“저것을 자세히 보시면 표면이 매우 거칠다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부랄옥잠의 씨앗은 그저 동그란 게 아니었다.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돌기들이 잔뜩인데, 가시처럼 박히진 않아도 적당한 힘만 실리면 피부를 찢기엔 충분했다.

“두꺼운 갑옷이나 방패를 뚫긴 어렵겠지만, 전장에서 언제까지고 웅크리고 있을 순 없지 않겠습니까?”

페트릭의 말에 황제가 끄덕였다.

“녀석, 재미있는 걸 개발했군.”

활보다 위력은 떨어질지 모르겠으나, 방금 보지 않았나? 처음 사용해보는 황제가 은사를 향해 정확하게 쏜 것을.

“이게 몇 번이나 사용할 수 있지?”

“정해진 것은 없으나, 보통 가지 하나당 4에서 10발 정도입니다.”

“편차가 꽤 있군. 여인들이 다 무장했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오오오..

-제법 괜찮지 않나?

-쓸만한데?

지켜보던 장수들이 의외의 성능에 감탄했다. 얼추 일만 병력이 동시에 저걸 쏜다고 생각하면..

“연사도 되고?”

“대략 3초 정도 딜레이가 있습니다. 가지에 따라 차이도 있고, 어떤 것은 불량도 있습니다.”

이게 아무래도 살아있는 생물이다 보니 멀쩡한 놈도 있고, 아닌 놈도 있었다. 게다가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더 있었는데,

“두 달?”

“예.”

페트릭의 설명을 들은 황제가 입맛을 다셨다.

“본체에서 떨어진 가지는 두 달 정도 지나면 못 쓸 정도로 시들어버립니다.”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주 잠깐, 전 병력을 이걸로 무장시키면 어떨까?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황제가 달콤한 꿈에서 깨어났다.

“하긴 이리 좋은 물건이 있었다면 진즉 알려졌겠지.”

아쉽다는 듯 페트릭에게 막대를 던지는 황제. 그러더니 이제 관심 없다는 듯 말을 돌렸다.

“태자는 돌아올 것 같은가?”

이 질문엔 페트릭이 아주 잠깐 멈칫했지만, 곧 힘차게 끄덕였다.

“예!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좋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그대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하라.”

축객령에 페트릭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페트릭과 다루가 나가자, 황제는 스캇에게 물었다.

“어때? 할만하겠어?”

“확실히 보탬은 될 것 같긴 합니다. 후방에서 지원만 해줘도 적들은 크게 당황할 것이니까요. 마법도 아닌 물리적인 것이라 막아내기도 힘들 것이고요.”

스캇의 말에 황제는 묘하게 웃다가 일어났다.

천천히 걸어 은사의 근처에 가더니, 허리를 숙여 반쪽짜리 부랄옥잠의 씨앗을 집어 들었다.

“여기에 독은 못 바르나?”

과연 전쟁엔 천부적인 감각을 지닌 인물이다.

“시험해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일러둡죠.”

황제가 씨앗을 쥔 손을 움켜쥐었다.

“너무 오래 기다렸다. 이젠 지칠 지경이야.”

태자와 약속한 시각은 오늘로 끝났다. 이제 결정해야 한다.

황제는 딘딘을 바라본다.

말없이 끄덕이는 딘딘. 언제나처럼 믿음직스럽다. 은사 역시 반대하진 않을 것이다.

황제는 이제 스캇을 보며 물었다.

“승률은?”

“만이천이 붙었으니, 대략 40% 내외입니다.”

“여기 백성들을 끌고 가면?”

“45%까진 올라가겠지요.”

“반반이라.”

나쁘지 않다. 제국 땅을 밟는데,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은가?

“좋아. 부대 구성 다시 짜고, 모레든 글피든.”

황제가 환하게 웃었다.

이리도 즐거운 거다. 이 전쟁광은.

“볕 좋은 날 아침 가보자고.”

제국을 침공하면서 마치 산책이라도 다녀오자는 듯 말하는 황제를 보며 스캇 역시 쓰게 웃었다.

다음날. 날씨는 흐렸다.

하지만 에비뉴 군은 언제든 출정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날.

역시 오전부터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거, 날 한 번 기가 막히는구나!

이른 아침 오줌싸러 나온 사내 하나가 무심코 하늘을 올려보며 외친 날. 이날 에비뉴 군대가 동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제국 쪽에서도 정찰병을 운용하고 있었고, 후단 성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기에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다. 거동할 수 없을 정도로 병이 들었거나 부상이 심한 이들을 제외한 에비뉴의 병사는 7만. 새로이 합류한 발키리와 지난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이들까지 모조리 끌고 나왔고, 뒤는 없다는 생각으로 보급을 최소화했다.

후단과 제국의 국경까진 행군으로 나흘.

이윽고, 병사들의 굳은살 박인 발에 또다시 물집이 잡히기 시작할 때,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야..”

나인 강을 사이에 두고, 군대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후단과 제국은 강을 하나 끼고 영토를 나누고 있었는데, 대륙을 관통하는 이 물줄기는 이곳이 지류가 아닌데도 그 위용이 대단했다. 넓은 곳은 그 폭이 200미터에 이르고, 깊은 곳은 수심이 10미터가 넘었다.

“어째 우리보다 더 많아 보이지 않나?”

황제의 말에 스캇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가 예상한 것보다 제국 쪽에 2만 정도가 더 모인 거다.

“비리비리한 놈들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제국도 이번엔 제대로 칼을 뽑아든 것 같다. 뒤쪽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앞 열엔 마약 중독자들은 없어 보였다.

“그럼 돌아갈까요?”

묻는 스캇의 말에 황제가 시원하게 웃었다.

“가야지.”

물론 뒤가 아닌 앞으로.

“전군! 전투준비!”

-충!

-충!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스캇이 깃발을 번쩍 들었다. 부대 곳곳에서 스캇의 깃발과 같은 색의 깃발이 들리고, 둥둥- 북이 울렸다.

제국군 역시 물러설 생각 따윈 없다는 듯 전투준비를 끝냈다.

-죽여라!

-우와아아아아아!

-잡것들아! 덤벼라!

수심이 얕은 곳으로 에비뉴 군대가 찰박찰박 쏟아져 내려간다.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유속은 제법 강했지만, 사내들의 심장을 멈추게 하긴 어려웠고, 양쪽 진영 병사들은 강의 중간에서 충돌한다.

-크흑!

-컥!

-이 빌어먹을 자식이..!

대 혼전이었다.

흐르는 강물이 시뻘겋게 변할 정도로 서로의 몸에 검을 쑤셔 박는 사내들은 공포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더욱 악을 써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캇. 황제에게 묻는다.

“원거리 타격부대를 앞에 배치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죽어가는 병사들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아니야. 비장의 무기는 아껴야지.”

다소 초반 피해를 보더라도 놈들에게 강력한 한 방을 먹여줘야 했다.

전쟁은 흐름.

곧 강물은 이쪽으로 흐를 것이라 확신했다.

그런데,

“……?”

문득, 어떤 기시감을 느낀 건지 황제의 머리가 저쪽으로 돌아갔다.

그의 눈은 하늘을 본다.

하지만 새하얀 뭉게구름 느리게 지나갈 뿐 보이는 것은 없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이상한 일이군.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스캇을 보려는 그때.

“……!”

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저게 뭔가?

먼 하늘. 작은 점 하나가 구름을 뚫고,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건 아주 빨랐고, 여기서도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컸으며 평소라면 매나 독수리 따위로 여겼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존재감이 강했다.

벨버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정체불명의 어떤 것.

스캇 역시 황제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다가 입을 떡 벌렸다.

“..드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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