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순과감 #
하지만 놀람도 잠시.
“씨..부럴..”
웬만해선 쌍욕을 하지 않는 번이었지만, 쑥쑥 자라다가 한순간 발기부전처럼 시들어버리는 부랄옥잠을 보며 이를 까득 깨물었다.
-허어.. 또 실패야?
‘보면 모르냐?’
아무래도 마계와 이곳은 여러 조건이 달라 그런지 부랄옥잠을 키우는 것이 어려웠다. 그나마 다른 곳보다 어둠의 기운이 충만한 이 숲에서도 이 지경이었으니, 불가능한 것일까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하긴 이게 쉬웠다면 이미 이 세상은 저 녀석들로 뒤덮여 있을 거다.
민들레처럼 하늘하늘 씨앗을 날려 보내진 않지만, 탁탁 뱉어 멀리 날릴 수 있으니 환경만 맞았다면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몬스터 중 하나였을 거다. 그러나 자연은 이토록 정교해서 부랄옥잠같이 생존력 뛰어난 녀석도 자라지 못하게 하는 방어장치는 있는 것이었다.
‘비아그라 같은 극약 처방이 필요한데.’
-더 해볼 거냐?
“…….”
번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씨앗은 넉넉하지만, 씨앗만 낭비할 뿐 아무래도 성공확률이 희박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
“……?”
눈이 마주치는 남녀.
‘오호라?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체리티.”
“네, 네?”
번이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네가 한번 해봐.”
"네에에?"
엘프보고 부랄옥잠을 키우라고? 말도 안 돼! 화들짝 놀랐지만, 지긋하게 노려보는 번의 눈은 아주 진지했다.
“그때, 그거 다시 해봐.”
“뭐요..?”
“왜, 있잖아.”
숲에서 이전에 그녀가 보여준 것.
흥얼거리며 노래하니, 식물이 무럭무럭 자랐지 않나? 기괴하게 생기긴 해도 부랄옥잠 역시 식물 아니던가!
“하, 하지만..”
“하지만은 뭐가 하지만이야. 괜찮대도 그러네. 내가 책임져.”
번은 삽을 들고 조금 이동했다.
부랄옥잠 실패작이 공간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어 자리가 부족한 거다.
“순서 알려줄 테니까.”
하겠다고도 안 했는데, 적당한 곳을 골라 삽질을 시작하는 번.
푸욱! 푹! 푹!
희망이라도 발견한 건지 아까보다 더 경쾌한 삽질이었다. 순식간에 사람 네다섯은 묻을 수 있는 깊이로 파 내려간 번이 훌쩍 뛰어 올라왔다.
“웬만하면 네가 하는게 낫지 않겠어?”
거절하면 다른 엘프라도 잡아와 시킬 기세였다. 체리티는 입술을 깨물고 번에게 다가갔다.
“태자님, 진짜 이게 뭔지 아시고 하시는 거죠?”
“그럼! 염려 마! 다 안다니까!”
왜 모르겠나. 마계 저층에서 4박 5일 동안 이놈과 합숙하다 왔는데. 아마 인간 중엔 그보다 부랄옥잠에 대해 잘 아는 이는 없을 거다.
“알겠어요.. 해보긴 할 텐데..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번이 냉큼 가방에서 씨앗을 꺼내 체리티의 손에 쥐여줬다.
“썩은 피랑 어둠의 마력은 잔뜩 먹여놓았으니까 그냥 던져. 그럼 이게 자라서 너를 주인으로 인식할 거야.”
“주인이요?”
“그래, 똥오줌도 못 가리면 곤란하니까 융이 장치를 해뒀어. 되기만 하면 널 해치진 않을 거야.”
어차피 번에게 필요한 건 가지뿐이었다. 기괴한 식물이 따르든 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꿀꺽.
먼저 가신 선대 엘프들이 이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속상할까. 울상가득한 그녀.
맙소사! 부랄옥잠이라니! 이런 괴물을 위해 일족의 성스러운 노래를 불러야 한다니!
“어서!”
번이 엄하게 노려보자, 그녀는 결국 입술을 뗐다.
“..흙 이불 덮어주면-.”
두 손 모아 씨앗을 받아들고 노래하기 시작하는 체리티.
“호오..”
그녀의 손에서 씨앗이 반짝 빛나자, 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좋아! 잘하고 있어! 뭔가 달라! 계속해!”
번의 칭찬에 그녀의 표정이 조금은 나아진다.
“하룻밤, 이틀 밤- 싹이 났어요.”
토옥.
번이 파놓은 구덩이로 쏘옥 들어가는 씨앗. 그걸 본 번이 재빨리 가방에서 나머지 재료를 체리티에게 준다. 까마귀 깃털부터 코트리스 이빨까지 다 던져지자, 냉큼 삽질을 시작하는 번. 이리도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은 처음보는 것 같다.
“지금이야!”
번의 외침에 미리 건네준 유리병을 체리티가 화악! 뿌렸다. 인류를 멸종시킬 수도 있는 무서운 괴물을 키우다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왠지 흥분한 번을 보고 있자니 즐겁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했던가? 번의 우쭈쭈 엉덩이라도 두드려줄 기세에 망설이던 엘프는 이제 응원에 힘입어 될 대로 되란 심정이었다.
드드드드드드득!
다시 시작된 울림.
"오오!”
번이 삽을 번쩍 들고 자라기 시작하는 부랄옥잠을 보았다.
“오오오오-!”
확실히 이번엔 뭔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가지들의 뻗음은 더욱 힘찼고, 기둥은 아까보다 더욱 굵었으며 맺히는 잎은 싱그럽기까지 하다.
3미터, 5미터, 7미터까지 순식간에 자라는 나무!
그으으으으으으응.
기괴한 소리와 함께 성장이 멈추고, 우스스스 가지들이 잎을 떨어댔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비를 흠뻑 맞으며 뱀굴의 뒤엉킨 뱀처럼 매끈매끈 움직이는 부랄옥잠의 가지. 그것들이 스스스 체리티에게 다가갔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기겁하며 자빠졌겠지만, 체리티는 느낀다.
뭔가 이어져 있음을.
“아..”
자석에 이끌리듯 부랄옥잠 기둥에 다가가 가만히 손을 대는 체리티. 그러자 나뭇가지 역시 그녀를 끌어안듯 덮어주었다.
입가엔 그녀도 모르게 엄마 미소가 걸렸다. 일반 식물관 달리 부랄옥잠은 분명하게 그녀에게 감정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
-성공이다! 아주 잘 자랐어! 역시 엘프! 심지어 다크 엘프라 약발이 더 좋았나 본데? 저 가지 좀 봐! 굵고 튼튼하다!
이제 막 태어난 게 이 정도면 시간이 지나 영양보충도 하고 몸집도 불린 후엔 딱총이 아니라 대포도 만들겠다.
“크크크..”
아주 좋은데? 번이 웃었다.
“…….”
웃음소리에 뒤를 돌아본 체리티가 움찔했다. 번의 모습이 너무도 음흉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됐나요?”
체리티의 말에 번이 환하게 웃으며 가방을 그녀에게로 던졌다.
“보름.. 아무리 늦어도 20일 안에 키워. 씨앗은 충분할 거야. 부족한 건 융을 통해 더 보내주지.”
“네?”
무기가 생겼다고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숙련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흐흐흐..”
번은 체리티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저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폭우 속에서 바지만 입고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이상했지만, 원래 보통은 아닌 남자였다.
“일하라고! 일!”
벌써 멀어진 그의 목소리.
체리티는 머리를 흔들다가 고개를 돌려 부랄옥잠을 바라보았다. 대체 이걸로 뭘 하려는 걸까?
“하아..”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
.
.
부족한 공격력은 부랄옥잠으로 커버하고, 정신력은 약 기운을 빌린다 치자. 그럼 이제 남은 건 뭐가 있을까?
“방어력이지.”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은 여러 가지다. 번처럼 마나를 이용해 호신기를 둘러도 되고, 단단한 갑옷이나 두꺼운 방패를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발키리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오래전 하던 게임으로 비유해보면 공격력은 10인데, 방어력은 0에 피통까지 낮아 그야말로 종잇장 몸뚱이를 가진 유닛이랄까? 체력까지 형편없어서 무거운 건 걸치지도 못할 거다.
-먹고 죽을 돈도 없는데, 방어구를 어디서 구해?
“뭐 아는 거 없냐? 이번처럼 마계에..”
-이거 웃긴 놈이네. 거기가 만능잡화점이냐? 네가 필요하면 다 구비되어 있게?
“쓰읍..”
마계 딱정벌레 같은 놈 껍질이라도 벗겨 두르면 돼! 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번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여자의 체력으로 버틸 수 있는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그런 게 없을까? 접근전에선 어쩔 수 없어도 원거리에서 화살이나 마법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으면 좋겠다. 멀리서 쏘면 뭘하나? 그 반대로 멀리 쏜 거에 스치기만 해도 끝이면..
사색에 잠겨 어느새 도착한 영주성 인근.
병사들이 번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부산스러워졌다.
“안녕하십니까!”
“태, 태자님?”
“이 비에 어딜 다녀오시는 것입니까?”
“여봐라! 어서 마른 천을 가져와라! 태자님, 어서 이쪽으로 비를 피하시지요!”
번의 추레한 모습에 놀라 다들 난리가 나지만, 정작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휘 저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곤 제일 먼저 융을 만나 부랄옥잠을 체리티가 키웠다고 말하곤, 그녀가 필요한 게 있다면 도와주라 했다.
번의 발걸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계속 영주성 곳곳을 다니며 수뇌부를 만났다. 이제 황제와 약속한 시일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이번 일만 잘 마무리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그러니 어떻게든 성공해야만 했다.
“뭐가 좋을까. 뭐가..”
여러 사람을 만나며 그들의 의견도 들어보았지만,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벨버른 전체가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였고, 요세인에 하나 상단의 돈을 모두 풀었다곤 하지만 여전히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능 좋은 보호구를 대량으로 구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nonsense)인 것이다. 그럴 돈이 있다면 차라리 배불리 먹겠다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거니까.
“일단은 돈인가?”
최악의 상황이 오면 대충 나무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이라도 걸치게 해야겠지만,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발키리의 방어력을 1이라도 올리고 싶은 번이었다.
-무슨 수로 돈을 벌 건데? 나올 구석이 없잖냐.
악마의 말이 맞았다. 당분간 눈 시퍼렇게 뜨고 살필 집정관과 황제 탓에 약을 팔 수도 없었고, 벨버른의 농작물 수확 시기가 왔다지만, 입에 풀칠할 수준밖에 안 되었다.
하지만 이 남자의 사전에 포기란 없다.
언제였더라? 중학교 1학년 겨울이었나? 엄마 몰래 컴퓨터 게임을 했던 적이 있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하다가 문명, 대항해시대, 심즈, 삼국지 같은 게임이 적성에 맞아 집중적으로 했었는데, 끝내 성적이 떨어지고 컴퓨터를 뺏겼지만 몇 달간 아주 푹 빠져 살았었다.
‘크게 다르지 않아.’
-뭐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데?
게임이라고 우습게 볼 게 아니다. 역사나 실제 자료를 기반으로 세계관을 만들었고, 근거 없는 허무맹랑한 시스템이 아니라 최대한 사실과 근접하게 구성했다. 후에 등장한 스타 크래프트는 그 기막힌 벨런스로 단박에 국민 게임이 되었지 않았나?
‘쇼미더머니를 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미네랄이 필요하다. 자원을 캐야 한다는 거다. 다행히 노동력은 사방에 널려있지 않은가? 그들을 동원한 채무증서도 있고 말이다.
‘전쟁터에 가긴 싫어도 단순 노동은 충분히 할 수 있겠지.’
-뭔데? 응? 궁금하게 왜 이래?
번은 악마를 무시하고, 빠르게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여전히 언제나처럼 책상에 앉아 있는 페트릭이 보였다.
“아, 오셨습니까?”
얼굴이 홀쭉하다.
이 사람, 잠은 자는 건가? 혀를 차며 페트릭에게 가까이 걸어가는 번.
“시간이 없으니 용건만 간단히 하지. 혹시 인근에 광산이 있나?”
“광산이요?”
“금이나 은 같은 게 매장된 곳 말이야.”
고개를 갸웃하는 그의 머리칼에서 먼지들이 훌훌 떨어졌다. 대체 이 양반 언제 씻은 걸까?
“..있다 해도..”
한참을 번과 얘기한 페트릭은 부정적인 의견이었다. 광산 개발이란 게 그리 쉽게 뚝딱 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다. 정확한 매장량도 알아야 하고, 땅을 파낼 도구도 있어야 하며 숙련된 감독관도 필요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경험자들이 전쟁 통에 죽어버렸으니 초보자들이 모여서 뭘 도모할 수 있겠는가?
“상급 땅의 정령을 이용하면 어디에 뭐가 묻혔는지 정돈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걸 파내도 상품으로 만들고 유통하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SCV 몇 마리 보내서 캐오라 해면 알아서 가져오는 작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급 정령은 있고?”
“에비뉴 쪽 마탑에 의뢰하면 비용이 들긴 해도 고용할 순 있을 겁니다.”
번은 끄덕였다.
“그건 일단 진행하도록 하고.”
눈을 가늘게 뜬 번이 페트릭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 왠지 불안함을 느낀 페트릭이 묻는다.
“하실 말씀이라도..?”
“그때 했던 말.”
“무슨..?”
“왜, 벨버른의 금지에 관해 이야기했었지 않나?.”
분명 그런 적이 있다.
그중에 마굴魔窟을 선택한 것이 번이었고.
“다시 자세히 해보지. 그 용龍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