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02화 (102/177)

# 딱총 #

-견딜 만하냐?

“물론!”

두두두두!

날아오는 씨앗은 번에게 그리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다. 전이라면 고생 좀 했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공간 전체에서 보내오는 충만한 어둠과 마나 호신기는 전신을 둘러싸 몸을 단단히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마르지 않는 샘 같달까? 써도 써도 끝이 없었다.

-그럼, 가!

“오케이!”

일단, 복잡한 것은 나중에 생각하자! 우선은 해야 할 것부터.

번은 몸을 숙이고, 전력으로 숲을 향해 질주했다. 지그재그로 뛸 필요조차 없다. 성난 코뿔소처럼 직진!

케에에에엑!

케케엑!

숲에 가까워지자, 원숭이가 비웃는 것 같은 소란이 들렸다. 물론, 동물 따위가 있을 린 없었다. 이것들이 다잡아 먹었을 테니까. 평소라면 이런 기괴한 소리와 스멀스멀 움직이는 나무줄기들로 먹잇감의 혼을 쏙 빼놓았겠지만, 오늘은 위치가 바뀐 듯하다.

투우-! 투!

번이 다가오자, 필사적으로 씨앗을 뱉는 가지들. 어떤 것은 씨앗 뱉길 포기하고, 채찍처럼 후려쳐왔다.

번은 손을 들어 가장 가까운 것부터,

파악!

손날로 후려쳤다.

그러자 무력하게 뚜욱! 끊기는 줄기. 중간엔 대나무같이 일정하게 마디가 있었는데, 그 부분을 빼면 유연한 것이 지렁이처럼 꾸물대고 있었다.

“흐음.”

번이 가지를 들고 유심히 바라보자, 이제 씨앗 공격이 차츰 줄기 시작했다. 그걸론 번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나 보다.

“묘하네.”

-그거 하나하나가 독립된 기관이다. 누구든 사용할 수 있지. 내가 예전에 마계 전쟁에 참여했을 때, 다크 고블린이라는 잡것들이 그걸 쓰는 걸 보았는데..

악마의 말처럼 부랄옥잠은 참으로 기괴하고, 신비로웠다. 인간의 상식으로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다 이해하겠냐만은, 이 가지 하나가 꼭 살아있는 생명체 같기도 하면서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산호같달까? 분명, 이 가지에선 생기가 전해지는데, 무생물처럼 움직임도 없고 딱딱했다.

“본체랑 떨어지면 스스로 움직이진 않나 보군?”

-나도 정확히는 몰라. 허접스러운 놈들이 들고 다니는 것만 봤으니까.

악마 기준에선 새총이나 다름없는 물건이라 해도 인간에겐 아주 유용할 것이다. 한둘이 아닌, 일만이 동시에 쏜다면 말이다.

“으음..”

번은 가지를 요리조리 만져보다가 숲을 주욱 훑어보았다.

스스스스스스..

앙상한 가지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몸짓 하나하나에서 위협과 적대감이 느껴진다.

“…….”

그때, 번의 뒤편으로 땅에 바짝 붙어 뱀처럼 꾸물대는 두꺼운 가지들이 접근했다. 씨앗 공격이 안 통하니, 다른 공격법을 시도하려는 거다.

“그럼, 어디 한번..”

번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피식 웃었다.

“놀아볼까?”

융이 소환할 때까지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

.

.

비가 왔다.

그것도 아침부터 정오까지 아주 세상을 쓸어버리려는 듯 쏟아졌다.

“하늘에 구멍이 났나..”

농담처럼 중얼거리며 지나가는 솔개부대원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대단한 비였다. 나무 위에 서면 앞이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근, 가장 높은 나무 꼭대기.

“아.. 좋아.”

한 여인이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아름답다.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아 관능적이었고, 육감적인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 뿐인가, 나무줄기를 꼬아 만든 심하게 단출한 복장은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한 그녀의 몸매를 돋보이게 했다.

“시원해.”

인간들은 하늘을 보며 투덜거렸지만, 그녀는 너무도 좋았다. 여기 내리는 비는 그녀가 살던 곳에 내렸던 비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까.

맑고 깨끗하며 청량하다. 이런 비라면 온종일 맞고 있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문제는 모두가 그녀와 같은 건 아니라는 것. 인기척에 아래를 내려보는 체리티. 누가 올라왔나 보다.

“밍밍.”

4구역 농장 관리를 맡은 아이다.

“여왕님.”

“무슨 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말해봐.”

밍밍은 귀엽게 생긴 작은 키의 아이였다. 얼굴도 통통해서 마냥 착하게 보였지만, 사실 아주 똑 부러지고 손속이 매운 반전 매력을 가진 다크 엘프였다.

“밭이 망가지고 있어요. 저장창고도 비가 새는 곳이 있고요.”

“심각해?”

“수로를 파고 무너진 둑을 보수하고 있지만, 만약 이 비가 저녁까지 그치지 않으면 밭의 30%는 손실을 피할 수 없을 거예요.”

30%.

아무리 대항할 수 없는 자연재해라지만, 너무 큰 피해였다. 사실 꽃이야 다시 기르면 되는 거지만, 이 일로 상심할 ‘그’의 표정을 보고 싶진 않았다.

“정령들은 뭐래?”

바람의 정령과 물의 정령은 비가 언제 멈출지 알고 있지 않을까?

“그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에요. 이런 비는 100년 만에 처음이라고 할 정도니..”

“그 정도야?”

“예.”

이상이 생겼다.

자연적이지 않다는 것 자체가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엘프들에겐 비상이나 다름없다.

“인간들에겐 알렸니?”

“물론이죠.”

체리티는 끄덕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쪽에 요세인이 있고, 거기에 그가 있을 거다. 그는 괜찮을까?

‘잠깐 보러 갈까?’

생각이 들었다가도 문전박대당할 수 있단 생각에 입술을 깨문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인간을 만났는데, 그의 반감을 사고 싶지 않았다. 아직 그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있는 그녀. 일족을 보살피는 건 어렵지 않은데, 이런 연애문제는 서툴었다.

“후.. 알았어. 문제가 생기면 다시 말해줘.”

“네!”

밍밍이 사라지자, 체리티는 다시 비속에 서 있었다. 잠깐 그의 생각을 떠올려서 그런가? 갑자기 그가 더 보고 싶어졌다.

‘아니야!’

머리를 부르르 털며 잊으려 애쓰는 그녀. 자존심도 없이 귀찮게 구는 건 좋지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걸 보았다.

“어?”

저기 저 앞.

그러니까 숲 동쪽 외곽에 묘한 게 보인다. 비 때문에 시야가 좋지 않아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었지만, 분명 없던 것이 생긴 기분이 들었다.

“뭐지..?”

일단 궁금하면 무조건 가보는 것이 좋다. 회색 숲은 이제 그녀의 집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차아-!”

다람쥐처럼 이 나무와 저 나무를 훌쩍훌쩍 뛰어 건너는 그녀의 몸은 아주 가볍고 경쾌했다. 비가 와 미끄러울 텐데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이..”

비슷하게 생긴 나무들 사이에 이상한 게 있었다. 흡사 거대한 괴물이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순간, 그녀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단어. 그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이게 왜 여기에..”

그녀는 일족의 여왕이었다. 당연히 어려서부터 선대에게 교육을 받아왔고, 일족의 역사와 그녀가 속한 세계에 대해 배워왔다. 그 옛날 다크 엘프들이 메카로 이주되었을 때 그곳엔 여러 포식자가 있었다 했는데, 그중 하나가 식물과 동물의 중간쯤 있는 녀석. 나무와 꽃을 사랑하는 엘프에게도 도무지 사랑받기 힘든 괴물.

“부랄..”

식인食人식물이었다.

“말도 안 돼.”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게 있었다. 이건 마계의 식물 아닌가? 설마 일족이 넘어올 때 딸려왔나?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이 부랄옥잠들은 이미 선대가 메카에서 완전히 멸종시키지 않았던가?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한발씩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솨아아아아아-!

쏟아지는 비. 그 아래 자연스럽게 빗방울에 몸을 떠는 나무들과 달리, 흐느적거리는 기분 나쁜 움직임을 보이는 저건 틀림없이 어머니께 전해 들은 그놈이 맞았다.

-체리티, 혹시 가지를 뱀처럼 구부리는 나무를 보게 되거든 절대 가까이 가지 말거라. 그것들은 아주 무서운 괴물이거든.

어찌 모르겠나. 식물은 한눈에 봐도 느껴짐이 있는데.. 그리고 저건, 그 어떤 것보다 그저 거북할 뿐이었다.

하지만 좀 이상하기도 하다. 듣기론 저것들은 접근하는 모든 것들을 먹어치운다 했는데..

‘설마.. 자는 건가?’

아니면 비가 와서 그런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이상했다.

황당함에 그녀의 발길이 멎었을 때,

푹, 푸욱! 푹!

빗소리를 뚫고 그녀의 귀에 괴상한 소음이 잡혔다.

“……?”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부랄옥잠을 피해 멀리 돌아가 본다.

바짝 긴장하던 그녀.

“엥?”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삽을 든 남자가 하나 있다.

상체엔 아무것도 입지 않아 건장하고, 아름다운 몸엔 빗물이 타고 흐르는 남자. 종아리까지 걷어 올린 바지와 맨발은 그 와중에도 야성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그가 잠깐 허리를 폈다가, 다시 삽을 올렸다.

푹! 푹푹푹!

“허..!”

기막힌 광경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저거 봐라. 삽 대가리에 빛이 난다.

오러를 두르고, 삽질을 할 인간.

체리티가 아는 한,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태자님!”

“여어..”

번이 허리를 펴고, 체리티를 보며 웃었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

번은 이마에 틘 흙을 팔뚝으로 닦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적당한 말을 생각하는 거다.

“농사.”

“예엣?”

“별일 아니야. 가던 길 가.”

번은 그리 말했지만, 체리티가 가긴 어딜 가겠나? 눈앞에 없어야 할 게 떡하니 있는데.

“설마 이거.. 태자님이..?”

“아아..”

번은 씁쓸하게 웃으며 혀를 찼다.

“실패작이야. 할 일 없으면 나 좀 도와주지?”

번이 부랄옥잠을 향해 턱짓했다.

“무슨..”

“난 새로 해야하니까, 저거 좀 뽑기 쉽게 줄기 좀 잘라줘. 아는진 모르겠는데, 뿌리까지 싹싹 파내야 하거든. 안 그러면 금세 또 자란다니까. 어흐! 농사가 쉽지 않아.”

“…….”

그랬다. 번은 지금 이 숲에 마계 식물을 키우고 있는 것이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실에 체리티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번이 다시 삽질을 시작하자, 화들짝 놀라 외치는 그녀.

“이, 이걸 왜 심었는데요?”

“당연히 쓸 데가 있으니까 심지.”

“이게 뭔지 아시는 거예요?”

“당연하지, 그것도 모르고 키울까.”

“이거! 순식간에 번진다고요! 사람도 잡아먹고, 동물도.. 심지어 꽃과 나무도요! 이 저주받은 식물이 자생하는 곳엔 아무것도 살지 못해요! 그것도 아시는 거에요?”

체리티는 분명히 그렇게 들었었다. 물론 이 말도 어느 정돈 사실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건 번이 없을 때 얘기다. 이 남자에겐 일반상식은 통하지 않는다.

“그건 네 생각이고.”

안심하라는 듯한 말이었지만, 체리티는 더 불안해졌다. 구덩이를 판 번이 삽을 놓고 옆에 내려놓은 가방에서 거무튀튀한 뭔가를 꺼내 손에 쥐었기 때문이다.

씨앗이었다.

‘피..?’

인간보다 월등한 후각을 지닌 그녀는 바로 알아차렸다.

‘분명 피 냄새가..’

이마를 잔뜩 구긴 채 체리티는 번이 하는 행동을 바라보았다.

묵묵히 움직이던 번.

투욱.

파놓은 구멍에 피 머금은 부랄옥잠의 씨앗을 던진다.

“씨앗 하나, 까마귀 깃털 5개.”

중얼 거리던 그는 허리를 숙여 가방에서 재료를 꺼내 하나씩 구덩이에 던졌다. 잊지 않으려고 융에게 몇 번이나 배웠는데, 뭐가 문젠지 뜻대로 되질 않았다.

“마정석 작은놈 하나에. 쥐꼬리 열둘.”

-조금 전이랑 똑같잖냐? 변화를 줘야지!

악마가 말하자, 번이 멈칫했다.

“그런가?”

마지막 재료를 꺼내려던 번이 입술을 삐죽이더니 끄덕였다.

“그럼 이번엔 세 개를 넣어보자.”

코트리스라는 몬스터의 이빨을 두 개가 아닌, 세 개를 구덩이로 던져 넣었다. 하이에나처럼 동물의 사체를 먹고 사는 이 몬스터의 이빨은 그 악취만큼이나 강력한 불길함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살짝만 만져도 손에서 그 냄새가 사흘은 갈 정도랄까?

“대체..”

체리티가 번에게 한발 다가오며 일그러진 표정으로 확실한 대답을 구했지만, 번은 하늘을 보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삽을 잡고 힘차게 구멍에 흙을 덮었다.

“도와줄 거 아니면, 가던 길 가라고. 지금 내가 좀 바쁘거든?”

비가 멈추기 전에 어떻게든 부랄옥잠을 키워야 했다. 마계에서 만난 이놈들은 호수를 끼고 살아갔는데, 그만큼 엄청난 물이 필요했고, 마침 폭우가 내리는 이때가 씨앗을 심기에 적기였던 거다.

“돼라. 돼! 좀!”

푹푹푹!

번의 팔이 더욱 빨라지고, 구멍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삽을 던져버리고 재빨리 가방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내 마개를 딴다.

“이 망할 콩나물아!”

화악-!

구덩이가 있던 자리로 뿌려지는 유리병 속 액체는 비에 닿자, 무지개처럼 여러 색을 뿌리며 바스라 졌다. 그게 화학 가스처럼 퍼지며 주변을 맴돌자,

“……!”

식물의 성장에 민감한 체리티가 절로 두 걸음 물러났다.

느낀 거다.

드드드드드드득!

아래에서부터 뭔가가 땅을 뚫고 올라오는 것을 말이다.

불쑥!

흙 속을 뚫고, 들이미는 머리.

번이 콩나물이라 부른 이유가 여기 있었다. 커다란 호박만한 대가리가 지면 위로 튀어나온 것인데, 그건 두 개로 갈라져 있었고, 노란빛을 띠었다. 또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 속도가 빨랐으니..

스스스스스스스!

얇은 나무 덩굴 같던 줄기는 금세 어른 허리만 하게 굵어졌고, 대가리는 점점 더 커지더니 둘로 쪼개진 부분에서 수많은 가지를 뻗기 시작했다.

부랄옥잠.

“오오오..!”

뭔가 직감한 듯 번이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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