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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101화 (101/177)

# 단서 #

캬르르르르륵!

가래 끓는 듯한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마수.

웅크린 몸을 펴자, 몸길이 7미터에 키가 3미터는 훌쩍 넘는 거구가 위협적으로 포효했다. 그 거대한 몸의 피부는 딱딱한 갑각으로 덮여있었고, 흡사 도마뱀 같은 파충류처럼 생겼으나 자세히 보면 곤충을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이런 분류가 무슨 소용인가. 여긴 마계의 저층. 기존에 알던 모든 것이 의미 없는 장소였다.

-가온 터틀이라는 놈이야!  등껍질이 여간 단단한 게 아니다! 상급 악마조차 부수기 힘들다 전해질만큼 강한 놈이지만 느려서 충분히 벗어날 수 있어!

그래서 터틀이란 이름이 붙었나 보다. 그새 놈이 굵고 짧은 다리를 놀려 번 쪽으로 돌아섰다. 움찔움찔하는 걸 보면 언제라도 튀어나올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뭐해? 도망치라니까?

악마가 외쳤지만, 번은 가만히 서서 몸을 풀고 있었다. 목을 양쪽으로 꺾으며 발목을 돌리더니,

“여기라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도망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다량의 어둠을 흡수했습니다.」

「흡수한 어둠이 어퍼 홀을 자극합니다.」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최대치가 늘어납니다.」

「몸이 가벼워집니다.」

그렇다. 번은 이미 실감하고 있었다. 마계의 저층에 도착한 뒤로 어마어마한 힘이 전신에 누적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건 이전 메카에서도 맛본 경험이었지만, 그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과연 이곳을 왜 마계라 부르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탁하지만 농밀하고, 두렵지만 달콤한 어둠이 들이친다.

사라라라라락.

번의 손톱에 우윳빛이 머무른다. 신성력이다. 이걸 본 가온 터틀은 흥분했는지 더욱 포악해져 날뛰었다.

캬오오오오오!

녀석은 일대의 지배자로 군림해왔다. 천적도 없었고, 무엇이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놈의 영역에 침입자가 나타난 거다. 그것도 아주 조그마한 녀석이 겁도 없이!

쿠웅! 쿵! 쿵쿵쿵쿵!

녀석의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굉장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가리를 미친 듯이 좌우로 흔들며 쩍 벌어진 입에선 혀가 쉬이이익 날름거렸다. 녀석과의 거리는 고작 5미터 남짓.

-깔려 죽겠다! 피해!

“넌 좀 조용히나 해!”

번은 다리를 넓게 벌리며 살짝 옆으로 돌아섰다. 말아쥔 그의 주먹에 권투 글러브를 낀 듯 신성력이 뭉쳤다.

“내가..”

캬아아아아아!

어느새 다가온 마수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주둥이를 내리찍었다. 달려오던 힘 그대로 번을 압사시키려나 보다. 저 주둥이에 물리는 순간, 대항도 못 해보고 한 줌 핏물로 변하겠지.

“이겨.”

그러나 번은 마수를 바로 앞에 두고서도 미소지었다. 그리곤 쥔 주먹을 천천히 앞으로 뻗었다.

후우우우웅-!

싸움에서 중요한 게 뭔지 아는가? 설명하기 쉽게 인간부터 예를 들어보자면 한때 인간계 최강자라 불렸던 마이크 타이슨을 상대한다 쳐보자. 그가 눈을 내리깔고 적의를 품는 순간, 이쪽은 몸의 세포가 죄다 오그라들 거다. 공포, 두려움, 예상되는 고통과 내가 이길리 없다는 마음이 혼합되어 그리 만드는 거다.

하지만 결국 타이슨이 사용하는 공격 방법은 주먹이다. 그것만 집중하면 다른 건 무시해도 좋다. 아, 귀를 물어뜯길 수도 있나? 어쨌든 지금도 마찬가지란 거다. 저 마수가 아무리 무시무시하다고 해도 공격 방법은 한정되어있고, 이쪽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지점부터 상대하면 된다는 간단한 이야기다.

콰앙!

번의 주먹과 마수의 주둥이가 부딪혔다.

“..!”

튼튼한 벽에 사정없이 들이받은 차의 앞부분처럼 뭉개지기 시작하는 마수의 아가리.

“크크크!”

예상이 맞아떨어져 기분 좋은 듯 웃기 시작한 번은 그대로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쿠오오오오!

아픈지 대가리를 한껏 들고 자지러지는 마수. 그런 녀석에게 번의 사정없는 공격이 이어졌다.

“뭐..”

5분쯤 지났을까?

“별거 없네.”

곤죽이 된 마수 위에 올라 씨익 웃는 번이었다.

-이런 무식한 놈..

악마가 기가 막히나보다. 그와중에도 번은,

“챙길 건 없냐?”

챙길 건 챙긴다.

-독한 놈.. 잘 뒤져보면 가슴 안쪽에 마정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정석?”

-그래. 너희 식으로 말하자면 고승의 사리 같은 거지. 이 경우엔 어둠의 고밀도농축고체 형태로 볼 수 있다.

악마의 조언대로 마수의 몸을 헤집던 번이 손에 까맣게 반짝이는 조약돌 같은 것을 들었다.

“이건가?”

-그래, 그게 마정석이다. 마법사들에게 꽤 비싼 값에 팔 수도 있고..

악마가 말을 하는 도중에 번이 감기약 털어 넣듯 입에 훌쩍 삼켜버렸다.

-네 경우엔 처먹을 수도 있겠지.

「농밀한 어둠이 육체에 녹아듭니다.」

「새로운 성분 2종을 흡수합니다.」

“호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어둠이 번의 몸에 쌓였다.

“괜찮은데?”

-여기서 나고 자란 녀석의 몸에 있던 것이니 그 어떤 어둠의 정수보다 순수하겠지.

마수가 보이면 죄다 잡아 죽여야겠다고 생각하며 번이 끄덕였다. 그러면서 훌쩍 마수의 몸에서 뛰어내렸다. 툭툭 몸에 묻은 피와 살점을 털어내며 묻는 번.

“이제 어디로 가야 해?”

-그건 사방에 있으니까 방향 정해서 가다 보면 금방 발견할 수 있을 거다.

애초에 여길 온 목적을 잊으면 곤란하다. 남은 시간은 5일. 그 안에 탐색을 끝내야만 했다.

성큼.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동서남북 방향을 잡을 수 없는 곳이라 마수 주둥이가 가리키고 있는 곳으로 무작정 걷는다. 별 의미는 없다.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지나치게 조용하군.’

마계의 저층에 대해 짧게 요약한다면 그건 고요였다. 또한, 자연스럽다는 말은 곧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수많은 생물이 어우러져 생태계를 이루고 살아간다는 뜻인데, 여긴 그런 게 없었다.

풀도 나무도 작은 곤충도 보기 드물었다. 있다면,

콰직!

-그놈은 스몰 비다. 작지만 강한 독을 가졌지!

자잘한 마수였다.

어느 사이, 슬금슬금 기어오는 벌레 한 마리를 밟아 비볐다. 몸이 으깨지는 그 순간에도 꽁무니를 흔드는 걸 보면 그쪽에 독침이라도 숨겼었나 보다. 그래봐야 번에겐 한주먹거리 였지만.

“여긴 바람이 안부나?”

-보통은 그래. 인간들의 세상과는 구조 자체가 다르니까. 이렇게 넓긴 해도 일종의 지하 공간이라 생각하면 될 거다.

“그래서 이렇게 답답한 건가?”

번은 허리를 숙여 스몰 비를 손으로 잡아 입에 넣어 본다. 마정석이 없는 꽝도 있었기에 이거라도 한다.

당연하겠지만, 맛은 없다.

"퉤.."

그리 몸에 도움이 되지도 않았고.

번은 다시 걸었다.

1시간, 2시간, 3시간.

이윽고 5시간이 넘어가자, 그제야 깨닫는다. 아까 터틀 어쩌고 하는 놈을 마주쳤을 때 악마가 왜 로또라 했는지를.

지나치게 넓은 땅. 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체는 많지 않았다. 중국이나 인도처럼 무식하게 인구밀도가 높다면 자주 타인을 마주칠 수 있겠지만, 여기 마계는 무식할 정도로 거대한 한 땅에 상대적으로 적은 생물이 살고 있을 뿐이었다. 지리산에 곰이 한 마리 정도 있는 상태랄까?

“야, 언제까지 가야 하는 건데?”

-가다 보면 보일 거라니까. 왜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

그러고 보면 악마는 인간과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달랐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시간이나 공간에 대한 개념이 겹치는 부분이 없었다. 악마는 타살他殺 당하지 않는 한 무한대로 살아가고 애초에 이런 한적한 마계에서 살았으니 인간 세상의 북적거림이 오히려 낯설 것이다.

이런 놈에게 따져 뭐해.

번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묵묵히 걸었다.

이윽고 마수를 만난 시점으로부터 12시간이 경과 했을 때,

“..?”

-저기다! 저기!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그래, 착각이 아니다.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봐도 황량한 황무지다. 그 중심에 거짓말처럼 숲이 있었고, 이렇게 멀리서 봐도 생동감이 물씬 풍겨왔다. 나무 사이론 물이 고여 있는 것이 보이고, 전체 면적은 축구장 2개 정도 보인다. 울창한 나무가 평소 보던 것에 비해 낯설었지만, 환경과 기후가 다르니 이해할 수 있었다.

-저거야 저거.

“뭘 말하는 거냐?”

-저기 널린 게 네가 찾던 그거라니까?

번이 인상을 쓰며 오아시스를 더 자세히 보았다. 뭐가 있다는 걸까? 보이는 거라곤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나무?”

-나무가 아니야!

그래, 여긴 바람이 없다.

흠칫.

빠르게 걷던 번이 숲과 200미터 정도 남기고 멈춰섰다. 선입견이 이리도 무섭다. 나무라 생각할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아니라 여기니 수상한 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혹 효과에 저항합니다.」

「혼란, 공포 효과에 대항합니다.」

사탕을 줬다 뺏으면 슬프다. 처음부터 안 줬다면 모를까 기대하게 해놓고, 그걸 박살 내면 당하는 처지에선 아주 서럽다. 지금도 마찬가지. 오아시스라 생각했는데, ‘현혹’을 걷어내니 디테일한 광경이 쏙쏙 박혀 들었다.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저것들은 한 몸이나 다름없거든. 적을 인식하는 순간, 전체가 하나가 되어 달려든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던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움직인 거다. 이제 번은 저 거대한 군집체를 오롯이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물웅덩이를 둘러싼 거대한 괴물.

-부랄옥잠. 마계 저층에 사는 마수이자, 네가 찾던 녀석이다.

“..”

거, 이름 한번 참..

식충食蟲식물은 설명우가 살던 대한민국에서도 볼 수 있었다. 파리지옥 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저 부랄옥잠은 차원이 다른 괴물이었다. 뿌리는 하나지만, 수백, 수천 그루의 몸통이 땅 위로 솟아있었고, 거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는 적을 공격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는 것이다.

-물과 양분만 있으면 어디서든 순식간에 자라는 놈이야. 저거 보이냐? 깨끗하지? 놈이 모든 노폐물을 다 빨아먹어서 그렇다.

마계에선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물웅덩이다. 딱 봐도 사람이 그냥 마셔도 별 탈이 없을 것 같이 푸르다.

“저게 총이라고?”

-곧 알게 될 거야.

일단 부딪혀보란 얘긴가?

번은 입맛을 다시며 여러 기운을 끌어올렸다.

「호신기가 발동합니다.」

마나를 피부에 두르고,

「머리가 단단해집니다.」

방어 수단도 강구 했다.

그렇게 거리를 좁혀갈 때,

스스스스스스스..

숲 전체가 움직였다. 이건 참 기이한 기분이었다. 커다란 숲이 오직 나 하나를 적대하며 노려보는 듯한 느낌. 보통이라면 이 순간 오줌을 지리며 자빠졌을 정도로 무섭고 두려운 순간이었다. 뭐, 이 남자에겐 그저 약간 불쾌한 정도겠지만.

“더?”

-그래, 가까이.

터틀 뭐시기를 보곤 도망치라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큰 위험은 없을 거란 뜻이다. 악마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만큼 멍청한 것도 없으니 긴장을 풀지 않고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하며 접근했다.

그러던 그때,

투우-!

소음이 들려왔다.

한여름계곡에서 수박을 먹다 씨를 힘차게 뱉었을 때 나는 소리 같았다.

“..”

-키키키키! 놀랬냐?

아직 거리가 있었기에 날아오는 작은 것을 손으로 낚아챌 수 있었는데, 엄지손톱만한 까맣고 동그란 것이 잡혔다.

-놈들은 씨앗을 날려 공격한다. 어때? 이 정도 위력이면 마탄과 비슷하지 않냐?

마탄을 본 적이 없으니 비교하긴 어려워도 150미터 거리의 목표에게 탄을 명중할 수 있다는 건 나쁘지 않다.

투우, 투! 투투투투투투!

아니, 좋았다. 보라, 수천, 수만 개의 가지에서 집중 사격하듯 날아오는 씨앗을. 전면이 까맣게 덮일 정도로 번을 향해 날아오는 씨앗은 호신기를 뚫진 못했지만, 번의 걸음을 멈추게 할 정도로 밀어내는 힘이 강했다.

두두두두두둑!

장마철 우산 위를 두드리는 빗방울처럼 번의전신을 타격하는 씨앗.

-어때? 쓸만하지?

과연 악마의 말처럼 이 정도면 일반인이 맞았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줄 수 있겠다. 워낙 씨앗이 크고 강선 효과가 없어 관통력은 부족해도 가까운 거리에서 맞으면 뼈가 부러지거나 머리가 깨질 거다.

‘발키리 전부가 이걸로 무장하면..’

급조한 부대의 부족한 공격력을 크게 올려놓을 수 있겠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가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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