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100화 (100/177)

# 사기꾼 #

“아무래도..  이미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습니다.”

하긴 만 명이나 모았으면 대단한 성과이기도 했다.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집안일만 하던 여자들이 그 무서운 전쟁터에 나갈 용기가 있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밭에서 시금치나 키우던 아낙들이 말이다.

“흠..”

레터링을 써먹어야 하나 고민하던 번.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최후의 순간이다. 강제로 동원해서는 뒤끝이 좋지 않을 터.

“내가 좀 더 생각해보지. 그럼, 그간 밀린 이야기나 하라고. 융에게 말해놓을 테니.”

번이 가볍게 웃으며 방을 나섰다.

부녀의 행복한 시간을 주려는 거다.

“태자님..”

페트릭의 목소리에 번이 돌아보았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죽어서라도 갚겠습니다. 라는 뒷말은 삼키며 뜨겁게 바라보는 페트릭에게 번이 피식 웃었다.

“고맙긴..”

내가 고맙지.

비록 그에게 속았다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번은 아주 귀한 보물을 하나 얻은 셈 아닌가? 물론, 이게 밝혀지면 아주 위험한 폭탄이나 다름없지만, 안 걸리면 그만이지.

타악!

문이 닫히자, 악마가 물었다.

-생각해둔 거라도 있냐?

‘아니.’

-그냥 이쯤에서 포기하지? 처음부터 안될 일이었다고.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노력한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란게 있다. 지금이 딱 그런 경우. 여자로 10만 병사를 만든다는 건 이전에도, 아니 앞으로도 없을 괴이한 도전이었다.

‘총이라도 있으면 쉬울 텐데..’

여자들이 가지는 두려움의 근본은 신체조건에서 오는 벽이었다. 예로부터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진 전장에서 그들과 칼을 맞대야 한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웬만한 독기 아니면 엄두도 못 낼 거고, 이미 그런 여자들은 다 모인 것이었다.

-총? 그게 뭔데? 보물이냐?

‘그래, 보물이지.’

세계 역사를 바꿀 수도 있는 보물.

그런 무기가 있다면 여자도 남자처럼 잘 싸울 수 있으리라.

내 손에 무엇이든 죽일 수 있는 든든한 것이 있는데, 뭐가 무서울까? 하지만 고작 한 달 만에 총을 만들어 보급할 수는 없다. 애초에 개념만 알지 어떻게 만드는지조차 모르니까.

-어떤 보물인데?

‘몰라도 돼.’

-이이익! 또 이럴 거냐? 너 자꾸 이러면 재미없다? 나도 영원히 입 다무는 수가 있어!

'행여나 다물겠다?'

번은 큭큭 웃으며 설명을 첨부했다.

‘석궁처럼 쏘는 무기라 보면 돼. 하지만 더 파괴력이 강하고, 다루기도 쉽지. 시위 같은 거로 미는 게 아니라 폭발력으로 쏘는 거니까.’

-마魔탄?

현자의 서를 보면 이 세계에도 총처럼 생긴 물건이 있긴 했다. 다만, 그건 아주 귀해서 이름난 마법사나 돈 많은 용병 아니면 소유할 수도 없었다. 그걸 쓰느니 차라리 훨씬 싸고, 간편한 석궁이 좋기도 했고.

‘그래, 그런 거.’

-흐으음..

‘왜?’

-흐으으으으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악마의 반응에 번이 갸웃했다.

‘뭔데?’

-안 알려줌.

뭐 이런 새끼가..

울컥한 번이 욕을 뱉으려다 간신히 참았다. 대신 번도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더 물어보지도 않고, 갈 길을 간다.

“태자님!”

“고생이 많다.”

“아닙니다!”

“그럼, 수고.”

“충!”

마주친 솔개부대원 등도 두드려주고.

“어머, 태자님..”

“아.. 태자님이셔!”

“언제 오셨지?”

“역시 멋져! 꺄악-! 방금 나 보신 거 맞지? 그치?”

휴식을 취하는 발키리에게도 빙긋 웃어준다.

이쯤 되니 소외당하는 기분을 느끼는 건 악마다.

-야..

1시간도 못 참는 놈이 무슨 영원히 입을 다무나? 웃기지도 않는다.

번은 내색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영주성 밖으로 나갈 생각이다.

-야!

‘왜?’

-내가 안다니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번.

-안 궁금해?

‘안 궁금한데?’

-거짓말!

‘아아, 시끄러운데, 좀 닥쳐줄래?’

이 몸 지금 바쁘시다.

번은 걷는 속도를 더욱 빠르게 했다.

다크 엘프가 있는 회색 숲에 가볼 요량이었다. 못 본 지도 꽤 됐고, 그녀라면 어떤 방법을 제시해줄 수도 있으니까.

-이이익..!

결국 발광하던 악마가,

-그 총이라는 거, 있는 곳을 내가 안다고!

외치는 말에 번이 우뚝 섰다.

.

.

.

세상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살 때도 수많은 이론이 있었고, 이곳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라 한다면, 2차원 4차원 다차원 가설을 한국에선 증명하지 못했지만, 여긴 가능하단 거다. 신神이 실존하는 세상이니까.

“돌아오지 못하실 수도 있어요.”

마녀 융이 걱정하는 얼굴로 그리 말했다.

‘그렇다는데?’

-뭐, 그럴 수도 있지만, 너 정도면 괜찮아. 나 못 믿냐?

‘당연하지. 넌 악마잖아.’

-네놈이 더 악마 같은 건 모르고?

'그런가?'

쓰게 웃은 번이 융에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고 준비해. 돌아올 테니까.”

정령계, 마계, 천계 같은 곳은 다차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예를 들면 비행기를 타고 저 하늘 끝까지 쭉쭉 간다고 해서 천계에 닿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차원과 차원을 잇는 특별한 문이 필요하고, 그런 문을 열 수 있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마녀 융은 그런 드문 능력자 중에 하나였다. 마계 한정이긴 해도 아주 잠깐 저쪽에서 악마를 넘어오게 할 수 있는 틈을 생성할 수 있었다. 당연히 저쪽에서 올 수 있으면 이쪽에서도 갈 수 있었고.

“하지만..”

차마 저도 같이 갈까요?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매혹의 향수를 대량생산하는 일을 마쳐야 하기도 했고, 마계는 그녀의 능력을 한참 벗어난 곳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오갈 수 있는 곳이 아닌데..”

그녀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은 번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저층은 안전하다 들었다. 아닌가?”

마계는 크게 3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 중 하급 마수나 마계에서도 버려진 잡것들이 사는 저층은 어지간한 기사 수준이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 했다.

“심해에도 괴물은 있어요. 혹여 그것들을 마주치면..”

마녀가 머리를 바르르 털었다.

왜 예전에 메카에서 다크니스 컨택트 주문을 쓸 때, 마계의 괴물이 번에게 따끔한 키스를 했던 적이 있지 않았나? 그 아베란 마수도 저층에 산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것들도 우글거린다 했다.

번은 미소 지으며 융의 어깨를 잡았다.

“독은 내게 약이 되고, 어둠은 활력이 된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하긴 그도 그렇다. 메카에서 번이 얼마나 강했는진 두말하면 입만 아프다. 그리고 어쩌면 어둠 충만한 마계라면 더 큰 힘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 그는 신성력까지 가지고 있지 않나.

“후우.. 알겠어요. 준비할게요.”

하급 마물 하나 불러내는 가벼운 주문은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제물로 쓸 거 몇 개랑 슥슥 바닥에 마법진만 그리면 뚝딱 완성되니까.

번이 마법진 위로 올라가자, 융이 그의 머리칼을 채집하며 묻는다.

“5일이라 하셨죠?”

“그래.”

이 머리칼이 있으면 5일 뒤 번을 소환할 수 있었다. 물론 그가 살아 있다면 말이다.

“걱정 말래도.”

푹 숙인 융의 턱을 번이 손으로 잡아 들어주었다.

“예..”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번은 선택해야 했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10만 병사를 징병할까? 아니면 10만을 대신할 수 있는 1만의 강병을 만들까?

보통 방법이라면 어림도 없겠지만, 총이라면 또 얘기가 달라질 거다.

싸움에서 가장 큰 이점은 바로 거리다. 적은 나를 때릴 수 없는데, 나는 적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무한한 자신감과 힘을 선물한다. 그래서 궁수와 마법사가 무서운 거고. 하지만 둘 다 피나는 노력과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직업군이라 그 수가 아주 적다. 결국, 남은 시간에 발키리를 그리 키워낼 순 없으니 방법은 하나.

그녀들에게 다루기 쉽고, 파괴력은 강한, 그러면서도 대량을 구할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다.

‘확실한 거지?’

-그럼! 그렇다니까!

악마의 말에 의하면 그런 게 마계의 저층에 있다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악마와 대화하는 사이, 융이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영혼조차 먹어 치우는 지옥의 청소부여! 내 부름에 응하라! 여기 너의 양식이 있나니!”

양팔을 활짝 펼쳐 노래하듯 읊조리자, 마법진이 반응하고, 스멀스멀 어둠이 모여들었다.

쩌억-!

공간이 찢어졌다.

그리고 거기에서 아주 불쾌한 콧물 덩어리 같은 게 꾸역꾸역 기어 나오고 있었다.

‘더럽게도 생겼군.’

-슬라임이다.

“아아..”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끄덕인 번.

그러고 보니 저런 형태로도 살아본 적 있었다.

그가 팔을 뻗어 슬라임을 움켜쥐었다.

이게 참 신기한 게 보기엔 말캉말캉 한 것 같지만, 이렇게 잡으면 고무처럼 질기다.

훼엑-!

공간의 틈에서 슬라임을 꺼내 바닥에 매치는 번. 껌처럼 철푸덕 버려진 슬라임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가 급히 몸을 날렸다. 틈이 벌써 닫히고 있다!

“조심하셔야 해요! 태자님!”

뒤에서 융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번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이쪽과 저쪽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환경은 삽시간에 바뀌었고,

“…….”

번은 얼굴을 찌푸리며 아래를 보았다.

발목까지 아주 불쾌한 진창에 잠겨 있었는데, 오래된 하수구에 고여있는 시궁창 같았다.

-크크, 아까 그놈이 살던 곳으로 와서 그런 거다.

슬라임이 꽃밭에서 살진 않았을 것이니.

“멀어?”

철벅거리며 걷기 시작하는 번.

그나마 온갖 생물로 산 경험 덕에 이런 불쾌함은 쉽게 털어낼 수 있었다.

-아니. 위로 올라가면 바로 보일 거다. 그것들은 여기 저층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거든.

“이쪽으로?”

-그래, 물이 내려오는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위가 나올 거다.

“이걸 물이라고 하기엔 물한테 미안하지 않냐?”

이곳은 어떤 협곡 같은 곳의 틈새 아래인 것 같았다. 슬라임의 주거 환경을 욕할 생각은 없었지만, 절로 인상이 구겨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방이 오물 천지고, 마계의 온갖 쓰레기를 다 여기 모아둔 것 같다. 골이 띵할 정도의 악취는 메카의 박쥐 똥통보다 더하면 더했지, 부족하진 않으리라.

-캬캬캬! 물 맞다니까? 궁금하면 마셔봐!

“됐거든?”

아무리 뭐든 먹어보는 번이라지만, 이건 싫다.

찰팍, 찰팍.

번은 계속해서 물길을 타고 올라갔다.

확실히 위로 향하는 느낌은 있다. 주변 경관이 변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르막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참 이상도 하지. 확실히 여긴 그가 살던 세계와는 뭔가 달라도 한참 어긋나있었다.

뻘을 크게 한 삽 뜨면 안쪽에 침전물이 쌓인 거무튀튀한 흙이 나온다. 여기가 딱 그렇게 생겼다. 광활한 황무지 전체가 마치 화성의 표면을 보는 것 같았고, 하늘엔 별이나 달도 없다.

“근데 여기 원래 이렇게 조용하냐?”

마계라면 온갖 마수들이 우글우글할 줄 알았더니 어째 한 놈도 안 보인다.

-너, 마계가 얼마나 큰지 알고 하는 소리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는데?”

산에 오른다고 해서 바로 사슴, 토끼, 호랑이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마계 역시 마찬가지. 이 저층만 해도 21세기 설명우 기준으로 미대륙보다 큰 규모였다.

-그래서 안전하다 했던 거다. 이 드넓은 땅에 널 위협할 수 있는 마수는 몇 마리 없으니까.

“…….”

어느 정도 지상이라고 할만한 높이까지 올라온 번.

갑자기 멈춰 섰다.

“그럼 저건 뭔데?”

번의 목소리에 저 앞에 있던 어떤 물체가 움직였다.

정확히 말하면 대가리를 이쪽으로 돌린 거다.

-아..음.. 로또?

크르르르르..

못해도 2미터는 쫙 찢어진 아가리에서 위협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튀자!

이놈을 믿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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