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99화 (99/177)

# 뒤틀리다 #

“아..”

분홍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비음이 터졌다.

그 순간, 정신을 차린 라일락. 두 손으로 힘껏 번의 가슴을 밀쳤다.

“······!”

내가 잠시 미친 건가?

키스! 키스했어! 이 무슨 망측한!

그녀는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심장은 튀어나올 것 같이 벌렁거리고, 얼굴은 불타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때, 번은 여러 신규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달의 가호를 받았습니다.」

답답한 감옥 같던 달빛.

어느새 몸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매력이 증가합니다. 이제 음기를 지닌 모든 생물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매력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진 몰라도 번은 안다. 이성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힘인지를.. 이전 수컷 사마귀로 살때, 그 매력의 마수에 걸려 암컷과 교미하다가 산채로 머리부터 뜯어먹힌 경험도 있었으니까.

「매혹의 효과가 증가합니다.」

같은 카테고리에 묶인 능력이었는지 매혹도 덩달아 강해졌다.

「정신력이 강해집니다. 마법과 저주, 유사 능력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번은 확신했다.

이 여자를 반드시 가져야겠다고.

“잡아요. 그리하면 당신은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자들은 자신이 불행하다 여길 땐, 언제나 이런 꿈을 꾼다. 야성적이고 거친 사내가 불현듯 나타나 내 손목을 잡고 이 수렁에서 꺼내주었으면 하는.

“함께.. 도망이라도 치자는 건가요?”

번의 입가가 웃었다.

“무섭습니까?”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이 누군지도 모른다고!”

번은 손으로 가면을 잡아 벗었다.

이미 얼굴은 본 사이였다. 하지만 정세에 어두운 라일락이 모를 뿐.

“그게 중요합니까?”

번이 가면을 땅에 떨어뜨렸다. 빈손을 다시 그녀에게 뻗었다.

“서로가 필요하다면 그만인 것을요. 이름이나 신분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무모하네요. 당신 정말 무모해요. 우린 고작 두 번 만났다고요.”

“그런 말 자주 듣습니다.”

“멀리 가지도 못하고, 잡혀 죽을 수도 있어요. 나는 황비라고요. 병사들이 쫓아올 거에요.”

“그리되진 않을 겁니다.”

“당신, 정말..!”

"1초라도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환하게 웃는 번의 얼굴에 라일락은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

.

.

후단 성.

점령 35일째.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스캇의 말에 왕좌에 앉은 황제가 어깨를 으쓱했다.

“놈들이 당장 쳐들어올 기미는 없잖아? 뭐가 문젠데?”

“주민들이 협조도 하지 않고, 전염병까지 돌고 있어 사기가 떨어졌다니까요?”

“거야 다시 싸움이 터지면 해결될 문제고.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거야. 이건 약도 없다고. 늘어지게 쉬게 둬.”

3차 지원군의 합류로 강하게 밀어붙인 에비뉴 군은 마침내 후단 왕성을 점거했다. 이런 코딱지만 한 왕국 하나 얻겠다고 참으로 길고 긴 싸움을 했다. 뭐, 그래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지난 일은 잊고 앞만 보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큰 문제라 한다면 황제는 앞만 보는데, 신하들은 뒤를 돌아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

“그 일은 됐고, 마약 얘기나 해봐. 어떻게 되가?”

알아서 하란 말에 스캇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황제의 물음에 답한다.

“집정관이 도맡아 처리 중입니다.”

“따로 연락은 없고?”

“아직 두 달밖에 안 되었지 않습니까? 기틀이 잡히면 그때 연락이 오겠지요.”

깐깐한 집정관 성격상 뭔가 그럴듯한 그림이 만들어진 후에나 자랑하듯 보고가 올 거다.

“두 달 밖에라니! 두 달이나 된 거지! 하여간 다들 엉덩이가 어찌나 무거운지! 확 걷어 차버리고 싶다니까! 제국 놈들은 어때? 약이 없어 근질근질하겠지?”

“예상하신 대롭니다.”

“크크크! 꼴 좋구나. 꼴 좋아.”

아들내미 녀석이 일 처리를 아주 잘해주었다.

7황비가 재배하던 레인보우 립 농장의 규모는 황제가 짐작했던 것의 10배가 넘었는데, 번은 관련자들에게 모든 정보를 뽑아내 소상히 적어 보고서를 올렸다. 이걸 잘만 이용하면 앞으로 50년은 돈 걱정 없이 전쟁을 벌일 수 있을 터, 뿐인가? 전략적 무기로도 이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필립 공작의 일은?”

“공작의 처지에선 다른 방도가 없으니 곧 항복할 겁니다.”

“그래, 그 자는 꼭 사로잡아서 세이프 레인보우의 출처를 알아내야 해. 그게 없으면 노른자 없는 계란이나 마찬가지니까.”

스캇은 끄덕이다가 황제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말했다.

“..이런저런 일도 많은데, 일단 돌아가셔서 직접 처리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여기 후단에 계셔 봐야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요.”

“왜 없어? 병력만 모이면 바로 제국 놈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데! 수도로 돌아가면 또 어느 세월에 와?”

“징집도 안 하셔놓고, 병력이 어디서 납니까?”

“했잖아?”

“..네? ..아!”

스캇이 기막혀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설마 태자를 기다리시는 겁니까?”

10만의 군대를 끌고 온다고 호언장담했던 태자. 그게 말이 되나? 수도에서 동원령을 내려 모아도 힘든 판국에. 게다가 모았다 치자. 벨버른의 여인들이 무슨 힘이 되겠나?

“10만이 아니라도 돼. 2~3만이면 충분하지. 제국 놈들 허리에 알을 박아둬야 다음 전투가 쉬워져.”

“태자가 안 오면요?”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면 되고. 어차피 뾰족한 수도 없잖아? 시간을 번 김에 집정관 좀 더 조여. 다른 거 하지 말고, 무조건 그것부터 처리하라고 말야.”

마약을 써먹을 수 있게 되면 아주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황제의 머릿속엔 이미 각양각색 아이디어가 샘솟고 있었다.

“그게.. 되겠습니까..”

국정을 도맡아 하는 사람에게 다 때려치우고 마약에 집중하라니. 거참, 아무리 무대포라도..

“어차피 한 달이야. 이왕 기다린 김에 좀 더 기다려보자고. 그 녀석이 언제 약속 어긴 적 있었나? 사람이 없으면 노새(mule)라도 끌고 오겠지. 크크크!”

황제가 말을 돌리자, 스캇도 별수 없다는 듯 끄덕였다.

소식통에 의하면 마약 공급이 끊긴 제국은 혼돈 그 자체라 했다. 거리엔 미친 사람처럼 포악한 중독자들이 약을 찾아 헤매다 국경을 넘는 경우도 허다하다 했다. 이 혼란속에 병사를 모아 후단으로 올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제국은 그저 이를 박박 갈아댈 뿐이라나? 물론 어디까지나 소문이니 그걸 액면 그대로 다 믿을 순 없겠지만, 분위기가 에비뉴 쪽으로 넘어왔다는 것은 확실히 느껴졌다.

“휴.. 알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는 스캇.

“..은사?”

아침부터 여기 있다가 성을 둘러보고 온다며 조금 전에 나가지 않았나? 그런 그가 왜 벌써?

“폐하. 몇 가지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해.”

은사는 난감한 듯 잠시 뜸 들이다 말했다.

“필립 공작이 목을 맸습니다.”

“······!”

스캇의 눈이 커지고, 황제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바로 전까지도 그의 얘기를 하지 않았었나?

“세이브 레인보우는?”

황제의 관심사는 오직 그것뿐인 듯 하다.

“급보로 간략하게 온 소식이라, 자세한 것은 추후에 집정관이 보고 할 것입니다.”

“으음..”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필립 공작을 자극하지 말라고 명령까지 내려놓았건만, 자결을 하다니. 이건 생각도 못 했던 변수였다.

“윗선이 있는 건가?”

보통 이런 경우 책임을 떠안고 죽는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죄책감이거나 주변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거나. 공작은 후자일 것이 분명한데, 누구에게 무엇을 지키고 싶었던 걸까? 이미 7황비도 그렇게 된 마당에 말이다.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작은 단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거야.”

마약이 독이라면 세이프 레인보우는 해독제나 다름없었다. 내 손에 든든하고 안전한 그것을 쥐어야 본격적으로 무기를 써먹든 말든 할 것 아니겠는가? 자칫 아군까지 물들 염려가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은사의 목소리에 황제의 고개가 돌아갔다.

“24황비가 실종되었답니다.”

“에-엥?”

얼마나 황당했으면 황제가 이런 소리를 낼까?

“실종?”

“정식 보고는 그리 왔지만, 그게.. 아무래도 야반도주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공주와 기사가 눈맞아 도망갔다.

하녀와 귀족이 불륜을 저질렀다.

형부와 처제가 딴 살림을 차렸다. 이런 가십은 수도에 흔히 도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비가 도망간 건 이제까지 없던 일이다. 뭐, 딴 놈 자식을 키우고 있었던 것보다야 낫지만, 어쨌든 남편 입장에선 뒤통수를 맞은 거다.

“24황비면.. 그 벨버른의 걔 아냐?”

스캇이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리를 흔들었다. 폐하께선 황비의 이름도 모르시나 보다.

“라일락 드 오리온 살룬. 페트릭 드 오리온 살룬의 딸입니다.”

“알아. 안다고. 내가 설마 그것도 몰랐을까?”

“예..”

“아니라니까? 그 비쩍 마르고, 까무잡잡한 애 맞잖아?”

쩝, 입맛을 다시는 걸 보니 잊었던 게 확실하다.

“감히 에비뉴에서 황비를 납치하는 간덩이 부은 자식은 없을 거고. 어느 종놈이랑 눈이라도 맞았대?”

괜찮으십니까? 라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황제는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으니까. 하긴 황제에게 여자가 몇인가. 게다가 24황비는 황제의 총애도 받지 못한 외톨이 아니던가. 어린 여자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시니까.

“어떤 남자와 수도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본 병사가 있답니다.”

“쯧..”

황제는 입이 쓴지 혀를 차며 말했다.

“제 아비가 알면 미치겠네.”

페트릭이 번을 돕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잡아오라 할까요?”

추적에 능한 십위를 보내면 머지않아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됐다.”

점령국의 민심을 염두에 두고 잡아오긴 했지만, 이젠 그리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망국의 왕이 태자 손아귀에 있는데, 뭘 더 보나? 십위 같은 고급 전력을 그딴 일에 소모할 필요도 없었다.

“형식적으로 수배나 걸어둬.”

딱히 떠오르는 얼굴도 아닌 걸 보면 미련도 없다.

“궁은 보존하라 할까요?”

“치워. 제 발로 나간 년이 돌아올 곳은 없다.”

고작 이 정도였다. 황제에게 24황비란 존재는.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보다 벨버른에 사람 좀 보내봐.”

“태자에게요?”

“그래, 어떻게 하고 있는지.”

"고 녀석, 참 궁금하단 말이지. 하하핫"

황제는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

.

.

“아버지-!”

“라, 라일락!”

문을 열고 들어오던 페트릭이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놀랐다.

“엉엉엉..!”

페트릭의 품에서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라일락. 그런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페트릭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번을 보았다.

‘어찌하시려고요!’

그의 시선이 그리 묻고 있었다.

황비를 데려오다니! 이런 기절초풍할 일이 또 어디 있나!

그러나 번은 태연한 얼굴로 내가 뭘? 어깨만 으쓱했다.

페트릭은 기막혔지만, 딸의 얼굴을 찾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잡고 조목조목 뜯어보았다.

“어디 상한 곳은 없느냐?”

“예, 저는 괜찮아요.”

번의 비밀통로를 이용해 수도를 빠져나왔으니 안전은 당연하다. 게다가 일부러 슬쩍 한 병사에게 노출까지 했으니 지금쯤 소문이 파다하게 났을 거다.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진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추적하는 것은 십위라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허어, 어찌, 어찌..”

페트릭이 땅이 꺼질 것 같이 한숨을 내쉬자, 보다 못한 번이 말했다.

“융이라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쭈글쭈글한 할머니가 아름다운 처녀의 모습을 하고 다니는데, 다른 걸 못할까? 이목구비를 조금 바꾸거나 특수한 마법으로 수작을 부린다면 라일락을 24황비로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거다. 다 이런 계산이 깔렸으니 번도 모험을 감행한 것이고.

“너는.. 정말.. 이걸로 괜찮은 것이냐?”

가슴이 미어지는지 페트릭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하지만 라일락은 아주 행복한 얼굴로 끄덕였다. 이미 여기까지 오며 번의 신분은 알아차렸다. 황궁을 빠져나와 벨버른으로 향할 때, 얼마나 놀랐던가? 아들과 붙어먹는 년이란 오명을 뒤집어 써야겠지만, 이렇게 아버지와 함께 벨버른에 있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그 어떤 손가락질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후회나 미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페트릭. 다시 그녀를 꼬옥 안아주며 번을 보고 얼굴을 끄덕였다. 고맙다는 표시다. 하지만 팔짱 낀 채 둘을 보던 번은 콧등을 찡긋했다.

“왜 아직 발키리 숫자가 그대로지?”

번이 벨버른을 떠날 때 분명 5기를 받는 것까지 보았다. 그런데 오늘 돌아와서 둘러보니 그때와 변한 게 없지 않은가? 적어도 7에서 8기까진 진행되었을 줄 알았건만!

“이제 고작 한 달 남았다는 거 설마 모르는 건가?”

번의 말에 페트릭이 신음하며 딸을 품에서 떨어뜨렸다.

“그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