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광 소나타 2 #
“우리는..”
번의 뜨거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라일락의 시선이 저쪽을 향한다. 환한 불빛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아스라이 보였다.
“여기에 모여 먹고, 마시고, 춤을 추며 웃고 떠듭니다.”
“······.”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저 어딘가에선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죠. 여기에 차려진 음식이면 수백, 어쩌면 수천 명을 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진 알겠지만, 마음의 고통은.. 사람마다 그 무게가 다른 법이에요.”
“예, 압니다. 저 벨버른의 딱한 사람들을 돕고자 오늘 이 자리에 모여있지만, 이 또한 자기만족이며 위선일지도 모르겠지요. 어쩌면 남의 불행을 위안으로 삼으려는 마음일 수도 있고요.”
“저들이 다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맞습니다. 아닐 수도 있지요.”
번은 뒷짐 지고, 달을 올려보았다.
왠지 처연해 보이는 그 뒷모습에 라일락의 가슴이 쿠웅, 내려앉는다.
“훈계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저 잠시 내려놓고 싶었습니다. 의무도, 책임도, 신분도..”
좋지 아니한가.
마침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이 땀을 식히고, 꿈꾸듯 몽환적인 주변의 어둠은 본래의 ‘나’를 덮어주었다.
오늘은 누구라도 될 수 있는 날.
남자는 여우. 여자는 토끼. 그저 그뿐이었다.
“아..”
그 마음을 읽은 라일락의 입에서 작은 비음이 터졌다. 그녀가 지난 5년간 그토록 원했던 순간 아니던가.
“당신도.. 힘든가요?”
어떤 동질감을 느낀 라일락이 번의 뒤로 다가섰다.
“각자의 고통이 있는 법이니까요.”
그녀가 했던 말을 비틀어 쓰는 번. 그 목소리가 사뭇 안타깝다.
“나는..”
그녀의 팔이 번을 향해 뻗다가 손가락이 파르르 떨었다.
이때였다.
-어.. 어어? 어어엇?
이제까지 덮쳐! 발라버려! 아버지 여자쯤은 빼앗아 줘야 진정한 악당이라 할 수 있지! 자리 깔렸다! 멍청아! 같은 말을 내뱉던 악마가 돌연 의식 저 끝으로 밀려났다.
번도 이 순간, 어떤 위화감을 느낀다.
악마와 접속이 끊긴 것은 이제까지 단 한 번.
“..너무 힘들었어요.”
그녀가 한 발 더 내디뎠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등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지만, 그래서 가능했으리라. 가끔 사람은 나를 모르는 타인에게 속을 털어놓고 싶어질 때도 있는 거니까.
번이 무겁게 끄덕였다. 그러면서 말했다.
“세상 모든 이들은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크든, 작든, 이고 가는 사람에겐 힘겨울 뿐이겠지요. 이분법이 아닙니다. 그저 잠시 내려놓자는 것이지요. 그래야 다시 걷는 길 힘내지 않겠습니까?”
번은 그녀에게 일탈을 주문하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아주 음란하거나 퇴폐적인 일을 하자는 게 아니다. 그저 이렇게 달빛 좋은 날 의지가 되는 사람과 추는 춤.
“그러다 영영 주저앉아버리면요?”
“그땐 제가 일으켜드리겠습니다.”
번이 돌아섰다. 그러면서 손을 내민다. 언제든 그녀가 원하면 잡을 수 있도록 따스하고 포근한 체온으로 가득하다.
“추실까요?”
등이 축축하다. 라일락의 가면 속 얼굴도 그러하리라.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훨씬 나아졌다. 살며시 웃는 그 입술만 봐도 많은 걸 덜어낸 것 같이 가볍다.
“네.”
그녀의 손이 다시 번의 손 위에 올려졌다. 드레스 끝자락이 살랑거리고, 앙증맞은 귀걸이가 찰랑댔다. 콩닥콩닥 뛰던 그녀의 심장이 묘하게 차분해지기 시작한다. 마음이 바뀌니 몸이 반응한다.
‘아, 좋아.’
마녀가 만든 매혹의 향수 때문일까? 아니면 이 달빛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그녀는 에비뉴에 온 이후로 처음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그 마음이 모여 그녀의 허벅지 안쪽 은밀한 곳에 있던 어떤 것을 자극했다.
“······?”
잡은 손을 파르르 떠는 그녀를 보며 번이 급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예. 괜찮아요. 조금 어지러워서.”
“그만할까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처음으로 그녀의 발이 번을 리드했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아니까.
이때, 번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뭔가 다가오는 기분은 드는데, 그의 초인적인 감각으로도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악마마저 숨게 한 위압감.
그래, 신神이다.
‘미치겠군.’
마치 달빛 감옥에 갇힌 것 같다. 대지 가득 뿌리는 그걸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쏘아보는 시선처럼, 도사리는 뱀의 혀처럼 등줄기를 핥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그 영감..!’
페트릭을 떠올리며 번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속은 것 같은 기분이다.
-허허! 그냥 그 아이를 만나, 받아오시면 됩니다!
어째, 너무 쉽게 말한다 했더니.
“아.. 아아아..”
춤이 멎었다.
“하아..”
라일락이 번의 두 손을 잡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떨기 시작했다.
‘아직 아닌데.’
그녀로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정일은 며칠 남았을 텐데, 왜 갑자기?
“아, 안돼..!”
스스스스슷..
레터링이 이동을 시작했다.
그녀의 볼록한 아랫배를 지나, 명치로. 다시 가슴을 타고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가 내려온다.
“······.”
어디 편찮으십니까? 라는 멍청한 질문은 생략한다. 번은 그저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기다렸다. 곧 어떤 일이 터질 것 같았으니까. 페트릭이 나를 죽이려고 사지로 밀어 넣은 것이 아니라면 분명 이로울 테지. 번은 마치 깊은 물 속에 빠진 것 같은 압력을 전신으로 느끼며 참았다.
그러다가 본다.
“······!”
그녀의 드레스 속, 가슴에서 목 쪽으로 기어 나오는 벌레 같은 것을.
허, 거참. 얼핏 보면 진짜 벌레처럼 생겼다. 지네나 송충이 같은 다리 여럿 달린 그런 거 말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장판 밑에 산다는 돈벌레? 뭐 그런 놈 같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글자다.
까만 글자가 뒤엉켜 움직이고 있으니, 다리처럼 보였던 거다. 그게 라일락의 목을 타고 올라가, 그녀의 턱에 붙었다. 이제 그녀는 눈을 꼭 감고 버텨내는 것이 전부다. 이미 정신을 반쯤 놓은 것 같았다.
“하아, 하아, 하악..!”
벌어진 입술.
그 속으로 쏘옥 글자 벌레가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번뜩.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차분하다 못해, 너의 그 알량한 비밀쯤은 다 꿰뚫고 있다는 듯한 무서운 눈빛. 번은 순간적으로 그녀의 손을 뿌리칠 뻔했다. 하지만 와락, 그녀의 손이 번의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휘익-!
“······!”
다시 춤이 시작된다.
서로의 손끝만 닿은 채 한껏 멀어졌다가 다시 화악 붙는 동작 이후,
“짓궂은 아이구나.”
나온 목소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라일락의 그것은 약간 코맹맹이 섞인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어릴 적 자장가를 불러주던 엄마의 그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훅! 번의 얼굴로 다가왔다.
흠칫, 상체를 뒤로 물려 피하며 몸을 뒤트는 번. 그녀의 가녀린 몸이 깃털처럼 딸려오다가 다시 중심을 잡고 팽이처럼 빙글 돈다. 누가 본다면 정말 완벽하게 호흡이 맞아떨어지는 춤으로 보이리라. 하지만 지금 번의 기분은 전투를 하는 것 같았다.
“크윽.”
30kg짜리 검을 이쑤시개처럼 휘두르던 번이었지만, 잡힌 손을 뿌리칠 수도 없다. 이건 여자의 힘이라고 볼 수 없다. 괴력이다. 아니, 신력이었다.
“왜 불렀니?”
무음의 박자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며 그녀가 묻는다.
이게 처음이었다면 내가? 라고 반문했겠지만, 이젠 아니다. 저번에 악마도 그러했고, 삼안에 깃든 신도 그랬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번은 자신이 신을 끌어당기는 어떤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레터링을 받아야겠어.”
짜내듯 번이 말하자, 그녀의 머리가 하늘을 향해 젖혀졌다.
“호호호!”
목젖이 보일 정도로 웃는 그녀.
“이야기 하나 해줄까?”
그녀의 몸이 아까보다 조금은 느린 템포로 번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때, 달에서 내리는 빛이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조명처럼 둘을 비추는 그 빛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따라온다.
“아주 먼 옛날, 신을 사랑한 인간이 있었단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당사자는 힘겨워도 떠드는 사람은 즐겁다.
“하지만 신에겐 남편이 있었지.”
흔한 아침 드라마 신화 버전인가? 원래 이런 불륜 막장이 더 흥미롭긴 하지만.
“그녀는 세상에 내려와 인간과 아주 잠시 달콤한 시간을 보냈지만, 그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단다. 둘의 사이엔 너무도 큰 것들이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듣다 보니 선녀와 나무꾼을 살짝 비튼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세계가 워낙 판타스틱 해서 그런지 스케일이 남다르다.
“신은 3년 후 다시 본래 있던 곳으로 떠났고, 여자아이를 하나 남겼지. 인간은 그 아이를 아주 정성스럽게 키웠어. 그게 그녀를 사랑하는 다른 방법이라 여겼을 거야.”
이젠 얘기가 아침 드라마에서 주몽이나 박혁거세로 장르가 바뀐다.
“3년간 신의 사랑을 듬뿍 받은 인간은 보통 사람관 달랐단다. 그 넘치는 재능과 매력으로 왕국을 세웠고, 사랑하는 신의 이름을 따 왕국의 이름을 지었지.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난단다.”
“벨버른..”
번이 신음하며 말하자, 그녀가 빙긋 웃었다.
“네가 무엇을 얻고자 레터링을 탐하는진 모르겠지만, 이건 사랑의 증표이자 무녀巫女의 표식이란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번은 자기도 모르게 지껄였다.
“젠장..!”
페트릭에게 완벽하게 속은 거다.
“호호호! 입이 거친 아이로구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벨버른의 선택받은 여자아이는 나를 품을 수 있단다. 또한, 그 선택받은 아이에게 사랑받는 사내는 내 힘의 일부를 나눠 갖지. 그 옛날 벨버른을 세운 왕처럼 말이야.”
“아..”
‘이거였나?’
페트릭의 의도가 읽혔다.
적국의 왕에게 팔려간 딸. 구차한 목숨을 구걸하고자 담보가 되었다. 하지만 세상 어느 아비가 딸의 불행을 두고 볼까. 페트릭은 이미 번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를 던진 거다. 번이 황제가 되면 딸도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 요망한 늙은이가.’
피식. 기막혀 쓴웃음이 나온다.
여긴 21세기 대한민국과 다르다. 형제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는 왕실도 있고, 반대로 형제가 죽으면 동생에게 절로 모든 것이 넘어가는 왕국도 있었다. 아비와 아들이라고 해서 다른 건 없다. 법도란 건 만들기 나름이니까.
“너는 이미 많은 신神에게 사랑받고 있구나. 그런데도 부족하니?”
번은 현자의 서- 신神편에서 읽은 것을 떠올렸다. 거기서 하나의 이름을 끄집어냈다.
“벨루시아.”
달의 여신이자, 태양신의 아내로 알려진 여신.
“너를 취하면 나도 강해질 수 있다는 건가?”
번의 대담한 말에 벨루시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 덕에 춤이 멎었다.
“당돌한 건, 그를 쏙 빼닮았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번을 보았다. 입은 웃고 있지만, 시선은 아주 차갑다.
“나는 더이상 인간을 사랑하지 않아.”
“그럼 여긴 왜 왔지?”
“네가.. 예쁘다고 했으니까..”
그래, 아까 분명 달을 보며 그런 말을 하긴 했다.
“궁금해서.. 네가 어떤 인간인지 그저 궁금해서야. 다른 뜻은 없었어.”
「달이 예뻐서 그런데, 한 곡 추시겠습니까?」
'궁색한 변명이군.'
그녀의 동공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본 번은 웃었다. 그러면서 팔에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뿌리치려면 그리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무력하게 번의 품으로 들어왔다.
‘그저 아버지의 여자였다면..’
취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달의 여신이라면?
그것도 사내에게 일국一國을 세울 수 있는 힘을 준다면?
번의 눈동자 역시 흔들렸다.
지금 이 순간, 그 역시 일생일대의 기로에 서 있는 거다.
달빛 아래 남녀가 포개져 있다.
벨루시아는 라일락과 감정을 공유한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 했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밤이 되면 그녀는 언제나 인간을 내려보고 있었으니까.
홀로 외롭게 죽도록 시린 저 밤하늘에 떠서.
“그 이야기.”
번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모공에서 매혹을 최대치로 분출합니다.」
탁, 탁 터지는 향수의 능력.
더불어 그 눈빛이 저 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아직 안 끝났어.”
“······!”
번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보자, 융.
너의 향수가 신神마저 유혹할 수 있는지!